상단여백
HOME 기획 연재 고영화의 거제산책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연재] 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1397∼1467년)은 본관은 성주로, 1449년 부임하여 읍을 옮기고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케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거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초의 읍치였던 사등이 협소하고 동남의 방비가 긴요하다고 여겨 세종조에 고현으로 읍치를 옮겼다. 경상우도처치사(1453년~1455년)로 재직 때에도 남해안 특히 거제도 연안의 해상방어를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으며 지방행정에 유능하였다. 우리 거제도를 일으킨 위인 중에 한 분임에 틀림없다. 이호성을 칭송하는 글이 여러 문헌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김담(金淡)과 신숙주(申叔舟) 두 분께서 똑같은 제목"送別巨濟、鎭武討評事李好誠"으로 이호성을 칭송하는 한시를 남겨 거제문학과 역사를 조명케 하고 있다.

1). 거제로 떠나는 진무토평사 이호성(送別巨濟 鎭武討評事 李好誠) / 김담(金淡, 1416~1464년)은 조선전기 문신, 천문학자.

才高穿札易 재주가 비범해 화살을 쏘아 쉽게 사상자를 내니

謨壯運籌神 계책이 귀신같이 궁리하고 계획하는 일이 장하도다.
却繼留侯躅 제후가 머뭇거려 지체하니 이어받아 물리치고
堪爲養子隣 이웃 자식같이 돌보았다지.
分憂時俗化 지방 벼슬아치로써 당시 풍속을 교화시켜
起廢舊墟新 폐허를 일으키고 옛 성과 건물을 새롭게 했다.
南府恩何重 남녘 거제 고을의 은혜, 어찌 중하지 않겠는가?
天心只在民 천심은 다만 백성에게 있음이라.

[주] 천찰(穿札) : 화살이 갑옷의 미늘을 뚫고 들어가는 것.

2). 거제로 떠나는 진무 토평사 이호성(次送別巨濟 鎭武討評事 李好誠) / 신숙주(申叔舟).

水國初還邑 바닷가 거제로 다시 읍이 돌아와서
人安遂及神 사람들이 마침내 신과 더불어 편안케 되었다.
循良廷有議 어진 고을현령을 조정에서 논의하였는데
武略古無隣 무인의 책략이 언제나 백성과 함께 했다네.
發政仁威著 훌륭한 정치와 어진 공덕을 세우니
宣麻聖眷新 임금이 내린 글에 신임이 새롭도다.
行春應露冕 봄에는 응당 예복을 갖춰 순시를 하면
手額走邊民 거제현민이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지.

現 거제시 중심지 고현성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고정부곡’으로 불리다가 부곡이 폐지된 후에는 고정리(古丁里)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1432년 거제현의 치소가 옮겨오고 본격적인 고현성 축조가 끝난 후부터 고현(古縣)이라는 현재 명칭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관찰사 하연(河演)에 의하면, 대마도 정벌이 끝난, 1419년(세종1년) 세종과 태종 두 임금께서 거창군에 있던 거제현을 거제도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거창 진주에 있는 거제현민을 8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고현성 축조를 위해 현령 "이호성"을 먼저 보내고, 하연을 관찰사로 임명하여 1451년 가을부터 1453년까지 고현성을 축조했다. 이보흠(李甫欽)의 축성기에는 정이오(鄭以吾)의 아들,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 진양(晉陽) 정상공(鄭相公) 정분(鄭苯)공에게 음양을 살피고 샘물을 찾아보아 치소를 옛 관아 남쪽 10리쯤에 옮기도록 했다. 하도민(下道民) 2만여 장정들, 영천 군사(永川郡事) 정차공(鄭次恭), 진주 판관(晉州判官) 양연(楊淵), 곤양 군사(昆陽郡事) 최성로(崔性老), 청도 군사(淸道郡事) 이의(李椅), 사천 현감(泗川縣監) 장오(張俁), 진해 현감(鎭海縣監) 김한진(金漢珍)에게 공사를 나누어 감독하게 하고, 그 역을 위해 분감을 관리했다. 또 현령 이호성에게 관사(館舍)와 부고(府庫)를 세우게 하니, 이에 멀고 가까운 곳의 백성이 다 모여서 각기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성 3천 6백여 척과 집 40여 칸이 몇 달 못 되어 완성되었다. 또한 현령 이호성이 관사와 창고 곳간 향교 객관을 짓는 일을 주관했다. 1453년에 끝난 고현성에는 ‘황취루(黃翠樓)’ 누각이 객관과 마주하며 북쪽에 위치했고, 서문 북쪽 편에 ‘거제향교’가 있었다. 토지의 주인인 사(社)와 오곡의 우두머리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 제사 드리는 곳인 사직단(社稷壇)은 고현성 서쪽에 있었고 공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는 향교에,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城隍神)을 모신 당우(堂宇) 성황사(城隍祠)는 고현성 남쪽 1리 지점에, 역질이 돌아서 여귀(厲鬼)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를 올리는 여단(厲壇)은 현(縣) 북쪽에 있었다. 고현읍성은 석축(石築)으로 둘레는 3천 38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샘 셋과 못 둘이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3). 이 첨추(이호성 거제현령)를 격려하며 보낸다.(賀寄李僉樞 好誠○幷小序 時李公疑行巨濟縣令) / 하연(河演, 1376~1453년).

1419년(세종1년) 두 임금 태종 세종께서 신기한 계책을 내었다. 바다에 있는 본토로 거제를 옮기기로 하였다. 나는 예조참판으로 책임을 맡아 시행하였다. 그 이후 관찰사가 되어 지시한 명령을 친히 받들었다. 무릇 군인과 백성의 미래 일인지라, 경상우수영을 살펴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자 공적인 일로 고을을 순시하는데,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임금의 은혜가 극진하여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임금의 뛰어난 방책을 지키고자 하는데 하례하지 못해 시를 지어 기증한다. 이에 더욱더 힘쓸 것이다. "하늘이 내린 계책으로 고을을 옮겨 세우기가 중하여 기반을 닦는 데는 성신(聖神)의 도움이 필요하리라. 이호성장군은 어질고 자식을 돌보는 사랑을 가진 임금의 신하이나 세속의 예절이 사납다. 고을을 다녀보니 의관이 다르고 첨지중추부사는 비와 이슬이 새로우리라. 몇 년 전엔 조부의 상주로써 극진했는데 이제는 백성의 안녕에 하례한다네."

[己亥春兩殿(太宗,世宗)出神策 徙巨濟於水內本土 吾以禮曹參判主掌施行 厥後爲監司 親承指命 凡軍民事之未 缺 右縣物阜民康 公亦以行縣 缺 世之賞 缺 恩渥霈然 亦 缺 聖圖保 缺 不賀 缺 作詩寄贈 尤加勉焉. "徙建深天策 經營出聖神 將軍仁子惠 獷俗禮臣隣 行縣衣冠異 僉樞雨露新 昔年承重命 今日賀安民"]
 

뉴스앤거제  nng@daum.net

<저작권자 © 뉴스앤거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앤거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 뉴스
  • 1
  • 2
  • 3
  • 4
  • 5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