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면 실전리 칠전대교 입구 공원에 세워진 존 시블리 박사 기념비 뒷면. 지난 77년 연초 하청 장목면민 일동으로 세웠다고 돼 있다.

44년 전 차도 전기도 없던 시절, 낙도 거제도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을 무려 8년간이나 펼쳤던 Dr. John R. Sibley(한국명 손요한 박사). 그의 타계(12년 6월24일) 1주기를 맞아 그가 한국에서 인술을 펼쳤던 대구와 거제에서 작은 추모행사가 열린다.

생전에 그리도 한국(특히 거제도를)을 그리워하고, 한국에 묻히기를 소원했다던 ‘존 시블리’ 박사의 유지를 위해, 그의 가족(부인 Jean B. Sibley 한국명 손진희)과 국내 지인들(계명대 김정남 교수, 연세대 유승흠 명예교수 등)이 이 행사를 주관한다. 어려웠던 시절 낙도 거제도에서의 헌신적인 인술활동을 다음 블로그(빨간머리앤)를 통해 소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린 옥명숙씨도 이 추모행사에 힘을 보태고 있다.

대구 계명대 동산의료원은 오는 6월5일 계명대 의료선교박물관 옆 ‘Grace Garden'(은혜정원)에 그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우고, 그 옆에 작은 봉분을 쌓아 미국에서 가져온 시블리 박사의 무덤 흙을 뿌리는 추모행사를 갖는다.

사흘 뒤인 8일(토) 오후, 그가 생전에 직접 병원을 지어 지역주민들에게 인술을 펼쳤던 거제시 하청면 실전마을에서도, 그의 가족과 지인들이 칠천대교 다리입구에 세워진 그의 추모비에서, 역시 같은 흙을 뿌리고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존 시블리 박사, 그는 누구인가

▲ 하청면 실전리 칠천대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존 시블리 박사 기념비

▲생전의 존 시블리 박사

존 시블리 박사의 작은 추모행사가 거제시민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건,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그의 헌신적인 인류애(人類愛) 때문이다. 얼마 전 타계한 고 이태석 신부가 아프리카 오지 수단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를 통해 그곳 사람들로부터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존 시블리 박사는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찢어지게 가난하고 무지했던 거제도민을 위해 진료, 예방, 재활사업 등 오늘날 대한민국의 총괄 보건의료서비스 토대를 개척한 선구자였고, 민간 장학사업까지 펼친 선각자였다.

지난 1960년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존 시블리 박사는 연세대에서 한국의사면허를 딴 뒤, 61년부터 대구 동산의료원(계명대 의대 전신)에서 무의촌 진료 및 나환자들을 돌보며 8년간 봉사했다.

이후 69년 세계기독교협의회 지원을 받아 무의촌 낙도였던 거제도 하청 실전마을에 터를 잡고 흙집으로 된 ‘거제지역사회개발건강원’(일명 실전병원)을 개원했다. 시블리 박사는 가난하고 무지했던 지역민들을 위해 1차진료는 물론, 마을건강요원을 훈련시켜 방문 예방접종, 가족계획(피임법) 계몽, 학교방문 보건교육, 민간 장학사업 전개 등 종합의료서비스를 뛰어넘는 지역사회 계몽사업을 헌신적으로 펼쳐나갔다.

존 시블리 박사는 특히 지역사회의학사업이란 새로운 개념의 의료봉사를 통해 국내최초 농촌형 의료보험인 ‘거제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73년 해외단체의 지원을 받아 당시 군청소재지(고현 상동)에 보건지소 같은 병원을 지어 운영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거제백병원의 효시가 됐다.

존 시블리 박사는 1977년 거제지역사회개발건강원(실전병원) 운영권을 당시 한국 실력자들에게 넘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정부 측에서 외국인 선교사가 펼치는 획기적 방식의 지역사회의료사업에 부담을 가지면서 결국 타의로 떠나야만 했다고 일부 지인들은 회고하고 있다.

이후 한국인이 맡아 운영하던 거제지역사회갭개발건강원(실전병원)은 상동소재 거제기독병원으로 흡수됐고, 하청 실전에 있던 병원은 문을 닫아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다행인 것은 존 시블리 박사가 거제를 떠날(아쉬움에 울면서 떠났다고 함) 당시 연초 하청 장목면민 일동으로 세운 작은 기념비가 지금까지 남아 당시의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1970년대 초 거제건강원(실전병원)이 있던 자리. 지금은 칠천대교가 놓이면서 도로로 변했다.

어려웠던 시절 거제도민을 구휼했던 파란눈의 선각자
이제는 시 차원에서 추모사업 지원해 숭고한 뜻 기려야
8일 열리는 추모행사는 존 시블리 박사 가족과 국내 지인들이 자체비용을 들여 추진하고 있다. 추모행사를 마친 가족과 지인들은 거제지역 주요관광지를 둘러본 뒤 하룻밤을 묵고 갈 예정이다. 이들의 추모행사에는 거제백병원 측이 음식 일부와 가족숙박비 정도를 지원할 예정이다. 그러나, 거제시는 현재까지 별도 지원계획이 잡혀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하청 거제지역사회개발건강원(실전병원)과 존 시블리 박사의 헌신적 의료봉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자신을 불살라 이방인을 구휼했던 그를 이제는 제대로 대접하고, 그의 숭고한 뜻과 헌신적 사랑을 되새기는 추모사업을 거제시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개인 블로그를 통해 존 시블리 박사의 헌신적 사랑을 소개했던 옥명숙씨는 "말년의 존 시블리 박사는 한국, 그것도 힘들었던 시절의 거제도를 매우 그리워했다고 들었다"며 "40여년 전 낙도중의 낙도였던 거제에서 헌신적 인술을 펼쳤던 그를 기억하는 추모행사에 거제시의 아무런 지원도 없다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스럽다"고 말했다.

옥씨는 특히 "이번 추모행사에 존 시블리 박사의 부인과 가족들도 오는 만큼, 이들에게 감사패와 명예시민증을 선물하고, 가족들에게 거제관광 편의라도 지원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며 “현재 칠천대교 개통으로 흔적조차 사라진 실전병원 터에 작은 기념관이라도 만들어 후세들에게 이런 고마운 파란 눈의 선각자가 있었다는 걸 깨우쳐 주는 것이 은혜를 입은 우리들의 작은 도리”라고 강조했다.

지난 70년대 초 존 시블리 박사와 함께 거제도에서 인술을 펼쳤던 연세대 의대 유승흠 명예교실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조카)의 저서 ‘우리나라 의학의 선구자’에 실려있는 존 시블리 박사와 관련된 내용. 유 교슈는 이 책에서 존 시블리 박사를 ‘지역사회 의학사업의 효시’라고 지칭하며 그가 어떻게 거제에 정착했고 어떤 의료봉사를 펼쳤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유승흠 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적은 존 시블리 박사에 관한 부분을 인용 소개한다. /편집자

지역사회의학사업의 효시
존 시블리
존 시블리(John Rawson Sibley, 한국명 손요한)는 1926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하였다. 앰허스트(Amherst) 대학 재학 중 이차대전 말기에 군 복무를 하였으며, 1948년에 졸업을 하고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을 1952년에 졸업하였다. 뉴햄프셔 하노버에 있는 힛치콕 기념병원에서 병리와 일반외과 수련을 1959년에 마치고 미국 장로교선교사로 갈 것을 준비하였다.

그의 조부모(Horace and Gertrud Sibley)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였으며, 중국에서 태어난 부친(Norman Sibley)은 목사로서 중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1948년에 결혼 한 부인(Jean Lee Butler, Jean B. Sibley, 한국명 손진희)과는 대학에 입학하여 기독학생모임에서 사귈 때부터 선교사업을 하는데 의기투합하였다. 1960년에 한국에 와서 연세대학교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뒤에 한국의사면허를 받고 1961년부터 8년간 대구 동산병원 및 나환자병원(애락원)에서 일하면서 무의촌 진료도 하고 나환자도 돌보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료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시블리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산하에 있는 기독교의료위원회(CMC)에 한국의 무의촌 중 3개면의 인구 3만명을 대상으로 의사보조인력을 활용하여 종합적인 지역사회보건시스템을 개발하려는 거제지역사회보건 시범사업(Kojedo Community Health and Development Pilot Project)계획서를 제출, 승인을 받게 되어 세계적인 시범사업을 현지에서 1969년부터 준비하였고 1970년 말에 정식 개원하였다. 거제군 하청면 실전리에 있는 이 기관(거제건강원)을 주민들은 실전병원이라고 불렀다.

이 사업은 전통적인 병원 중심의 의료에서 벗어나서, 전체 주민을 위한 폭 넓고 총괄적인 보건의료서비스로 전환하려는 바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인 거제도의 북쪽 3개면(장목, 하청, 연초)의 50여개 부락을 중심으로 하여 예방, 진료, 재활 등 전 영역에 걸쳐서 일차보건의료를 포함한 총괄적인 보건의료서비스를 개발 시행하였다. 마을건강요원을 훈련시켜서 마을을 방문하여 예방접종, 가족계획, 모자보건 등을 종합적으로 실시하였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방문하여 학교보건과 보건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에 부산에서 충무행 배를 타고 2시간 반 쯤 가 칠천도에 내려서 다시 나룻배를 타고 거제도 본섬으로 건너가야 했다. 전기도 없는 낙도에다 흙벽돌로 병원을 짓고 환자를 보았으며, x-선 촬영은 발동기를 켜서 하였고, 혈액검사를 위한 원심분리기는 손으로 돌렸으며, 프로판개스로 돌리는 냉장고를 사용하였다.
진료와 함께 보건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담당할 예방의학의사가 없으니 1년 만 현지에 와서 일하여 주기를 바라기에 필자는 결혼 직후 신혼생활을 거제에서 하였다. 초창기에는 부산에 있는 복음병원 장기려원장이 격주로 주말에 이틀씩 와서 진료를 지원하였다.

이 시범사업의 시작과 더불어 지역사회의학의 개념이 확산됨에 따라서 전국의 의과대학에 지역사회의학 강좌가 개설되고 의과대학생과 간호대학생 실습의 거점이 되었으며, 보건진료원의 개념도 자리를 잡았다. 국내 최초의 농촌형 의료보험인 거제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하였으며, 젖염소를 키우는 등 지역사회개발과도 연계하였다.

오륙년 간 3개면을 중심으로하던 사업을 확대하여 해외의 재정지원을 얻어서 군청 소재지(고현)에 병원을 짓도록 하였으며, 시블리는 1977년에 이 사업의 운영권을 육군의무감, 보건사회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한국인에게 넘기면서 발전시키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 후 부실 재단이 되어 몇차례 운영자가 바뀌었다. 현재 거제시 고현에는 거제지역사회 보건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던 병원이 확장 운영되고 있다. 옛 실전병원 터 부근에 섬(칠천도)을 잇는 다리와 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시블리의 공적을 칭송하는 기념비가 있을 뿐이다.

거제도를 떠난 시블리는 도미하여 1979년에 하버드보건대학원에 보건학석사를 마쳤으며, 1980년에는 타일랜드의 피난민캠프에서 보건사업을 하였고, 1983년부터는 네팔에 선교사로 일하였다. 1986년에는 은퇴하여 그의 농장이 있는 뉴햄프셔 에트나(Etna)로 돌아와서 다트머스-힛치콕 크리닉에서 일하며 이웃을 돕는 등 활동을 하다가 1993년에 은퇴하였다. 몇 년 전부터 건강 상 문제가 생겼다. 교육학 전공의 부인과의 사이에 2남2녀가 있다. 시블리는 1977년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였다.

▲ 거제를 끔찍히 사랑했던 존 시블리 박사. 미국에서 온 부모님과 병원사람들, 마을 주민들이 함께 기념촬영했다. 뒷줄 가운데 키가 큰 사람이 존 시블리 박사. 사진제공 : 블로그 빨간머리앤

 

신기방 기자  nng@daum.net

<저작권자 © 뉴스앤거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