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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서원 유허비(盤谷書院遺墟碑)[연재]고영화의 거제산책 / 충청학연구소 한기범 교수 (자료제공 고영화)

   
▲ 고영화
1879년(고종 16) 당시의 진주목사 신석유가 지은 <반곡서원 유허비>를 편의상 4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번역하여 옮긴 것이다. 반곡서원은 우암 송시열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선생이 이곳에 유배 중에 독서와 강도(講道)로 거제의 향풍을 크게 변화시켰으므로, 당시 거제에는 우암이 이 지방에 유배오신 것이 ‘선생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거제에는 행운이었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전해준다. 이것은 반곡서원의 역사에서 우암이 어떤 위상의 존재인지를 증명해 주는 말이다.

그리고 향촌의 유림들이 선생의 덕을 추모하여 숙종 갑신년(1704)에 서원을 세워 향사했고, 이후 5현을 차례로 추배했는데, 이들의 도학과 명절(名節)은 모두 선정(先正 : 우암 송시열)을 따른 것이고 이 땅의 선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한 1863(철종 14)에 이르기까지 거제 유림들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 운동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는데, 이로써 선현을 추모하는 정성을 알 수 있지만, 곧 이은 서원 훼철령으로 담장을 헐게 되어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처량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덕수이씨 이태권이 이 고장에 관원(거제부사)으로 부임했는데, 그가 옛 기록을 살피고서, 개연히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유허비를 세우고 자신에게 비문을 청하매 그 의리를 존중하여 이 글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반곡서원 유허비는 비교적 짧은 글이지만, 300여 년 전 우암을 주향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배향인물의 추배와 사액상소운동, 또 서원훼철로 인한 안타까움, 그리고 선현을 사모하는 강한추양지사(江漢秋陽之思)를 잊지 못해 유허비를 세우고 글을 남긴 일까지 서원의 변동사를 지금으로부터 134년 전의 기록으로 간명하게 잘 전해주고 있다. 이 유허비는 반곡서원의 역사를 축약한 글이지만, 반곡서원의 연혁과 조선후기 거제 유교문화사의 큰 흐름을 알게 하는 값진 기록이다.

   
▲ 반곡서원전경.

- 오호라! 이 자리는 곧 우암 송 선생의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선생이 이 거친 땅에 유배 오셔서 글을 읽고 도(道)를 강론하심으로써 이에 향풍(鄕風)이 크게 변하였다. 문충공 민진원에 이르러서는 지금 악기로 노래하듯 암송되는 소리가 있다 하였으니 그것은 ‘당시 선생의 불행은 곧 이 땅의 행운이었다.’는 말이었다.

- 향촌의 사람들과 선비들이 선생의 덕을 추모하여 숙종 갑신년(1704)에 서원을 세워 향사하였고, 죽천 김문청공 휘 진규(金鎭圭)와 몽와 김충헌공 휘 창집(金昌集)과 단암 민문충공 휘 진원(閔鎭遠)과, 삼호 이공 휘 중협(李重協)과 계산 김정문공 휘 수근(金洙根)을 추배하였다. 대개 이 5공의 도학(道學) 명절(名節)은 능히 선정(先正)을 좇은 것이나, 때로는 혹 선정을 좇은 흔적이고 때로는 혹 이 땅의 선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 철종 계해년까지도 사액(賜額) 베풀어주기를 희구하였으니, 향촌 사람들과 선비들의 유현을 사모하는 정성이 오랠수록 더욱 새로워진 것을 가히 볼 수 있겠다. 의례가 이미 다 갖추어졌으나, 갑자기 서원의 제향을 그치고 훼철하라는 명이 있어서 담장을 깨부수어 유허가 황폐하게 되니, 지나가는 사람이 처량하게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수년을 지나서 덕수(德水) 이후(李候) 태권(泰權)이 이 땅에 관원(거제부사 이태권)이 되어 옛 기록을 받들어 살피고서, 개연히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석비(石碑)를 세워 표지를 하니 그 의리와 성의가 가히 흠모할 만하다. 비석이 이미 이루어져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가 그 의리를 중하게 여겨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몇 줄의 글을 써서 정성을 표하노라.

숭정 5 기묘(1879년) 후학 진주목사 동양 신석유가 삼가 짓다.

   
▲ 반곡 송유허비
<각주>
이 유허비는 서원 뒤편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번 서원 복원 때 비각을 지어 사당 앞으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유허비의 후면은 보존상태가 불량하여 육안으로는 전문 판독이 어려운 실정이다. 다행히 거제연구가 고영화씨가 그동안 수집한 비문의 글자들을 모아주어 이를 기초로 필자가 오탈자를 바로잡고 문맥을 세워 비문을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원 자료가 분명하지 못한 채로 번역한 것이라 우려가 없지 않다. 자료가 더 보완되어 혹 誤脫字나 誤譯이 발견되면 다음 기회에 보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본문에서 필자가 재구성해 본 <반곡서원 유허비>의 원문은 대개 다음과 같다.

<盤谷書院遺墟碑> 鳴呼 此墟卽尤菴宋先生 妥靈之地. 先生遯荒玆土 讀書講道 鄕風於是乎丕變. 至文忠公諱鎭遠 今有絃誦之聲 然則當時先生之不幸 乃玆土之幸也. 鄕人士追慕德音 在肅廟甲申 建院而享薦之. 追配以竹泉金文淸公諱鎭圭 夢窩金忠獻公諱昌集 丹巖閔(文忠公 諱鎭遠) 三湖李公諱重協 溪山金正文公諱洙根 盖此五公之道學名節 克追先正 而時或克追先正 而時或扶於玆土也. 至哲廟癸亥 覦蒙宣額 可見鄕人士慕賢之誠 兪久而愈新. 儀旣備而旋有停撤之命 破壞垣牆 遺墟荒落 過之者 無不凄然興感矣. 越數年 德水李候泰權 來莅玆土 奉審舊記 慨然有江漢秋陽之思 因竪石以標之 其義誠可欽也. 碑旣成 要余記文 余重其義 不敢辭 略書數行 以誠之. 崇禎五己卯(1879년) 後學 晋州牧使 東陽 申錫遊 謹撰. 看役 幼學 玉相執 尹載源. 有司 幼學 玉大熙 尹炳誼 申錫杓.

󰡔文獻備考󰡕에 의하면 김진규 김창집의 추배는 각각 1718년, 1725년이고, 타 유현의 추배는 청액상소로 보아 1860년 전후(1862년 8월 이전)로 보인다. 東麓堂序는 1881년에 지어졌다.

서원 남설이 가장 심하였던 숙종대에 경상도에 건립된 서원은 76개이고, 이 중 사액서원은 25개로 33%정도 된다. 그러나 이후에는 영조(1), 정조(2), 철종(1) 대의 단 4개만 사액되었을 뿐이고, 충청지역에서도 정조 이후에는 사액을 받은 서원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철종 말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전개된 반곡서원 사액 운동이 실패한 배경은 이로써도 대강 짐작할 수가 있다. (정만조, 「17~18세기의 서원 사우에 대한 시론」, 󰡔한국사󰡕 2집, 1975 참조).

이 말은 ‘스승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즉 孔子 사후에 제자들이 공자의 외모와 인품을 많이 닮은 有子 공자에 준하는 스승으로 모시려 하자, 曾子가 “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강수와 한수로 옷을 빨아 가을햇볕에 말린 듯하다)라 하였으니 ‘어찌 유약을 공자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 했다. 공자는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완전한 인격이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의 대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문에서는 다만 溪山이라 하였으나 󰡔한국인의 족보󰡕(일신각, 1977) 등에 의하면 김수근의 호는 溪山樵老이다.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후에 철종의 묘정에 배향된 인물이다.

󰡔承政院日記󰡕에 의하면 이태권은 1877년(고종 14) 12월 20일에 거제부사가 되었고, 1881년(고종 18) 7월 12일 홍주 영장으로 발령되는 것으로 보아, 만일 이 사이에 변동이 없었다면, 아마도 약 4년간 거제부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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