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연재 고영화의 거제 고전문학
이학규(李學逵) 거제도 문학(文學) 1[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이학규(李學逵 1770∼1835년) 선생의 낙하생집(洛下生集)에 나오는 거제관련 한시들은 경남 김해 유배시절인 1810년과 1821년 거제도 지인인 유한옥의 집을 방문하여 남긴 작품들이다. 당시 거제부(巨濟府)는 김해진관(金海鎭管) 소속이었던 까닭에 김해유배객은 김해진관 소속의 지역에, 유배객을 일시 위탁관리 하기도 했다. [이배(移配)와는 그 의미가 달랐다].

이에 이학규 선생은 고성통영은 물론, 거제시 거제면으로 자주 내왕할 수가 있었다. 또한 유달리 풍류와 시를 좋아했던 이학규선생이었고, 거제 유한옥(兪漢玉) 선비와는 마음이 통하는 지음(知音)사이였다. 유한옥 선생은 거제면 읍치의 상당한 재력가이면서 학식이 풍부했던 선비였다. 아마 현재도 거제면에 그 후손이 많이 살고 있으리라 추측된다.

거제면 외간초등학교 입구 '장군돌'은 이학규 선생의 거제방문 자취로 남아 전한다. 선생이 남긴 거제시들 중에는 '거제 기녀(기생)' '죽림포' '죽림루' '기성표고버섯찬가' '은적암(隱寂庵)' '정수사(淨水寺)'. 등 수십 편의 작품이 있다. 거제도의 모든 형승을 아름답게 읊어준 선생께 삼가 존경의 념(念)을 바친다.

이학규(李學逵)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성수(醒수, 惺수), 호는 낙하생(洛下生) 또는 낙하(洛下)이다. 서울출생이며 세거지는 인천 근교의 소래산이다. 약관의 나이에 문학으로 명성을 얻어 정조의 인정을 받았고, 포의(布衣)로서 《규장전운 奎章全韻》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시 왕명에 의하여 원자궁(元子宮)에 내릴 책을 교수하여 바치고, 또 화성경리시말(華城經理始末)을 번역하는 한편, 〈무이구곡도가 武夷九曲櫂歌〉를 지어 올렸다.

선생의 나이 31세 때인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삼종숙(三從叔) 승훈(承薰)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 조사결과 천주교와는 무관함이 밝혀졌으나, 전라도 능주(綾州:지금의 화순군)로 유배되었다. 이해 10월 내종제(內從弟)인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다시 국문을 받은 뒤, 김해로 이배되었다가 1824년 4월에 아들의 재청에 의하여 방면되었다. 저자는 유복자로 태어나 외가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가문에서 자랐으며,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辛酉邪獄)과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에 연루되어 24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의 유배지 배소는 現 부산시 강서구 가락동 죽도 서낙동강 강창(江滄) 인근 강변에 위치했는데 김해부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이다. 그의 시에서 자주 언급한 김해시 불암동(佛巖津)은 배소에서 북북동 방향 강변 10리쯤에 위치하고 있다. 선생의 귀양살이는 대체로 자유로워서 경남 남해안 곳곳을 여행했다. 유배기간 중, 그는 오직 문필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당시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용(丁若鏞)과는 빈번한 문학적 교류에 의하여 정약용의 현실주의적 문학세계에 공감하고, 그 자신도 유배지 민중들의 생활양상과 감정을 그의 문학창작에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문학은 표현에 사실성이 두드러지고 내용에는 현실성이 부여되었다. 그밖에도 우리의 역사·지리·풍속과 자연과학 등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논술하였는바, 이는 조선 후기의 실학적 지성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방면된 뒤에도 김해지방에 내왕하며 이곳의 문사들 및 중인층과도 계속 우호관계를 가져 이 지역의 문화의식과 그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만년에는 주로 신위(申緯) 및 정약용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실의를 달랬으나, 더욱 가세가 곤궁하여 충주지방에 이주, 여생을 마쳤다. 현재 그 지역 및 후손은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저서로는 친필로 보이는 필사본 《낙하생고 洛下生藁》와 여러 필체의 수사본(手寫本) 등을 합한 20여책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국내외로 흩어져 있었던 것을 1985년에 이를 수합하여 《낙하생전집》 3권으로 영인, 발간하였다.

일찍이 이학규는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일원으로 일찍이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다, 특히 “역사는 독서하는 선비가 몰라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역사를 독서하는 선비의 필수지학(必須之學)으로 인식하였다. 그가 궁벽한 적거지에서 역사적 인물과 사건, 그리고 민간의 풍속과 전설 이야기 등을 자신의 문집 속에 녹여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자각에 힘입은 바 크다. 낙하생의 기사시(紀事詩)는 모두 그의 귀양살이 동안 직접 체험하거나 견문하여 지어진 것들이다. 비록 그가 천주교도로 몰려 억울한 유배생활을 했지만 그로 하여금 조선후기 한문학사의 흐름에서 실학문학의 가치를 생산케 한 의미 있는 삶이었다. 사회현실의 모순과 고통 받는 민중들의 이해와 애정 어린 애민의식이 문학작품으로써 표출하게 만들었다. 낙하생의 이러한 현실인식에 대한 창작정신은 선배이자 지우(知友)였던 다산 정약용과의 문학적 교류에 의하여 더욱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학규가 유배생활을 하던 19세기 초는 조선왕조 세도정치로 국정은 극히 어지러웠고, 지방에서는 수령과 아전, 토호들의 착취가 날로 심해져 삼정(三政)이 문란하였으며, 그에 따라 백성의 생활도 도탄에 빠졌다. 선생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24년 동안 유배 생활을 겪는다. 물론 그 역시 같은 배경 하에서 비참한 양반의 처지로 전락하였으며, 그의 집안 또한 정치적․경제적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봉건 지배계급 내부의 심각한 모순과 갈등이 고질화함에 따라 소수의 문벌 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현상이었다. 이 와중에 억울하게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 생활을 했던 이학규는 유배지에서의 체험에 기초하여 당대 사회 현실의 구조적 병폐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가짐으로써 부패한 관리들의 실정을 낱낱이 포착하고 기록해 나간다. 이는 조선조 비판적 지식인의 현실 체감과 적극적인 문학 의식의 한 표명이었고 궁벽한 유배지에서 부른 ‘역사문화의 노래’였다.

   
 
1) 외기러기(1) [斷鴈]
隻影低飛伴暝雲 낮게 날아가는 그림자 하나 저문 구름 따라가니
長門月落數聲聞 큰 문에 달 떨어지고 몇 마디소리 들린다.
多風多雨瀟湘夜 세찬 비바람 부는 소상강의 밤이여.
吹泊平沙始憶羣 모래펄에 잠시 머물자 비로소 벗들이 생각나네.
隴樹關雲不盡哀 언덕 위 나무, 변방의 구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데
數聲嘹唳過江隈 몇 마디 우는 새는 강굽이 따라 날아간다.
欄頭箏語繁如訴 난간머리 위 풍경소리 호소하듯 바삐 울리니
一一流傳雁柱來 하나하나 널리 퍼진 기러기발이 돌아오네.
[주] 소상(瀟湘) :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에 있는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을 아울러 이르는 말. 그 부근(附近)에는 경치(景致)가 아름다운 소상(瀟湘) 팔경이 있음. 여기서는 거제도 어느 아름다운 해안을 이르는 말. 
 
2) 외기러기(2) [斷鴈]
地入風沙夜 모래바람 날리는 밤에 도착한 곳은
天長雲水鄕 하늘이 아득하고 구름 덮인 물가의 마을이네.
哀鳴眞慕侶 애타게 짝이 그리워 슬피 운다 해도
不獨斷人腸 애간장이 끊어지는 건 아닐진대.

3) 달빛 맑은 밤에[淸夜吟]
羅幔輕隨風卷開 늘어선 장막에 바람 불어 가벼이 책이 펼쳐지고
華燈暫與月徘徊 화려한 등불이 잠시 달과 함께 배회한다.
淸宵脈脈相憐意 달빛 맑은 밤에 계속 떠오르는 그대 그리운 생각뿐,
不待南雲雁影來 남쪽 구름 기다리지 않아도 기러기 그림자 따라오네.

4) 7월 보름날 밤에 회포가 일어[中元夜有褱]
今夜尊歬月 오늘밤 달을 찾아 우러러보며,
相憐兩地同 두 곳에서 한가지로 서로 가엾어 하겠지.
不知君在處 그대 있는 곳 알지 못해
兼有藕花風 연꽃 바람 아우른다.

고독한 나의 잠자리에 어찌해 미인과 희롱했을까? 숱 많은 머리는 미역줄기 같고 맑은 눈동자는 가을 바다 같은데 어찌 은근히 집적거리며 도포 속의 가슴까지 비벼대다, 상아 같은 치아 슬며시 드러내고 살며시 웃어 보이더니 나에게 안기어 온갖 교태 다 부렸어라. 생각하면, 이 세계는 일체가 다 꿈속인데 음녀(淫女)인 마등가(摩登伽)의 유혹에 진정 문수보살(文殊菩薩) 보낼런가?

이백(李白)의 대주(對酒) 시에 “포도주를 황금 술잔에 따라 마실 제, 십오 세 미인은 작은 준마를 타고 달려왔네. 푸른 먹으로 눈썹 그리고 붉은 비단신 신었는데, 문자 발음은 정확치 못하나 창가는 잘도 하네. 대모의 화려한 자리에서 님의 품에 취하여라, 부용장 안에 들거든 그대를 어찌한단 말인가.〔蒲萄酒金叵羅 吳姬十五細馬駄 靑黛畫眉紅錦靴 道字不正嬌唱歌 玳瑁筵中懷裏醉 芙蓉帳裏奈君何〕

   
 

5) 거제기생 도화가 노래하다[咏妓名桃花].  
腸斷棃雲昨夜懽 애타는 새털구름 황홀한 어젯밤 
春風轉入碧欄干 봄바람 타고 옮겨와 난간이 푸르네.
城南當目崔郞意 성 남쪽, 그 이름 고귀한 님 생각에
人面桃花相暎看 고운 얼굴 복숭화 꽃 서로 바라보며 비추었지
 
[주1] 최랑(崔郞) : 옛날 제비를 극진히 보살피던 기녀 요옥경이 죽자 봄에 다시 돌아온 제비가 이 사실을 알고 성 남쪽(城南)에 있던 요옥경의 무덤을 찾아내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
[주2] 인면도화(人面桃花)란 한눈에 반한 뒤, 다시 만나지 못해 그리워하는 여인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 맹계(孟棨)의 정감(情感)이라는 시에 얽힌 이야기.

기생 도화(桃花)의 멋진 시어(詩語)는 거제의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칠언절구이다. "애타는 새털구름" "난간이 푸르다" "인면도화" 등은 듣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서민적인 표어(表語)이며 사랑이 듬뿍 담긴 함축적인 표현이다.

조선시대 기녀의 시가 현재 전하는 양이 적은 것은 창작이 작아서라기보다 사대부나 가객들에 비하여 작품이 전승되고 기록될 여건이 나빴기 때문이다. 기녀들의 작품세계는 기녀라는 특수한 신분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남성들과 맞상대하며 남성들의 풍류를 돕는 그들의 특수한 사회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감성 세계까지도 대 남성적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녀 시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애정시가 대표적이다. 부재하는 임을 그리워한다거나 애타게 화합을 갈구한다. 하지만 거제도의 기녀는 대부분 관기였으며, 상대하는 남자가 대부분 거제관리들과 육지에서 순행하는 관료와 장사꾼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 때에는 거제현령(거제부사), 거제도내 고위관리, 만호, 지배 향반이 주 고객이었다.

거제도의 고위 관리의 임기가 보통 6개월~1년 남짓(길어야 2년)이라 거제 기녀들은 유독 ‘정들자 이별’이라는 심리적 저변이 깔려 있어 현존하는 거제 기녀의 작품은 모두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거제 기녀, 도화(桃花), 가향(可香), 소옥화(小玉花), 이아(?娥), 신월(新月) 등의 이름과 기생관련 작품 10 여 편이 전하고 있다.

6) 거제의 여러 기생을 보내며[送示岐城諸妓]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어여쁜 거제 기생의 ‘아름다운 자태와 고운 목소리’ 그리고 남성의 욕정을 불러 올 요염한 모습, ‘섹시한 미소’에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워 술김에 밤새 운우지정을 나누었다는, 이학규 선생의 솔직한 마음을 시(詩)로서 나타냈다.

夢中雲雨畵中春 꿈속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하니 그림 속의 욕정인데
鸎作歌喉玉作身 꾀꼬리 목청으로 노래하며 옥으로 치장한 고운 자태로다
歡笑滿歬渾不奈 즐거운 미소에 벌써 흡족하여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데
東陽羞殺瘦腰人 동양주에 부끄러움 사라지니 사람 허리가 여위네.
 
[주1] 운우지정(雲雨之情) - 지극한 즐거움, 서로 이야기가 끝나고 이생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지극한 즐거움’은 옛날과 같았다. 운우지락(雲雨之樂) - 남녀가 육체적으로 관계하는 즐거움을 이르는말. 중국 초나라 혜왕이 운몽에 있는 고당에 갔을때 꿈속에서 무산의 신녀를 만나 즐겼는데, 신녀가 헤어지면서 ''저는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이면 비가 됩니다''라고 했다는데서 유래하였다.
[주2] 동양주(東陽酒) : 술맛이 시원하고 향기롭다[淸香]. 예로부터 이름난 술인데 이웃의 여러 가지 술도 다 이것보다 못하다. 16세기 중국에서 유입된 술로 일반 양조법에 약재를 넣어 빚은 술이다. 

7) 거제 표고버섯 찬가 '기성 마고사'   
거제구전민요를 한시로 수용하는데 특히 긴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 있었다. 이학규선생의 "기성마고사(거제표고버섯찬가)"가 대표적인 한시이다. 조선후기에는 사설시조와 민요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서로 넘나드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우리말을 한문으로 옮기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말뜻을 살렸다 해도 흥취가 따르지 않아서 고민이었다. 민요는 형식이 뚜렷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또 한 가지 난점은 의식되지 않았으나, 시조는 석 줄이고 한시는 넉 줄을 기본으로 하는 점부터 판이해서 어느 쪽을 따라야 할 것인가 결정해하는 것이 우선 문제였다. 그 중간형식은 있을 수 없으니, 시조에 가깝도록 하든가 한시 본래의 형식을 유지하든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그 어느 쪽에도 난점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표현에 사실성이 두드러지고 내용에는 현실성이 부여되었다. 거제도 표고버섯은 예로부터 진상품에 빠짐없이 등장했으며, 지금도 특산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자어 명칭으로는 마고(蘑菰), 향심(香蕈), 추이(椎栮), 표고(蔈菰)가 있고, 송이버섯은 '송심[松蕈, 송이(松栮)]' 이라 부른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성질이 평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고, 정신이 좋아지게 하고 음식을 잘 먹게 하며, 구토와 설사를 멎게 하며 , 아주 향기롭고 맛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이 내린 선물이며, 면역력을 높이고 궁중연회에 꼭 나오는 약재이다. 다음 '기성마고사'는 한글로 된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인, "표고버섯 캐는 거제민요"를 19세기 초 거제 거주 時, 이학규선생께서 7언 한시로 번역하여, 오랫동안 보전하고자 남긴 글이다. 

   
 
♫ 기성 마고사(歧城蘑菰詞) ♬ / 이학규(李學逵).
歧城簇簇好磐陀 거제엔 주렁주렁 벼랑엔 너럭바위 (좋~다)♬
千樹蘑菰暎海波 무성한 표고버섯 해파에 참고 견뎌
也似山南榧子島 남쪽 산 바른 양지 얼씨구 비자도라,
搜除榧子更無它 비자 열매 찾아가니 우짜노 뱀이 없네
山雨淋淋山鬼嘑 산비에 방울방울 산귀신 부르짖고 ♬
氣蒸老樹半糢糊 산 안개 늙은 나무 보일 듯 모호하다
三尺筠竿兩緉屨 3척의 대막대기 짝지은 신 한 켤레
遶山秋日打蘑菰 휘돈 산 가을 날에 표고버섯 캐는 소리
歧城蘑菰斗千錢 거제엔 표고버섯 한 자루에 천전(4kg)이요 (좋~다)♬
南海蘑菰肌未全 남해의 표고버섯 살가죽 성치 않네
東瀛只有耽羅好 동녘 바다 오직 한 섬 탐라가 좋아하여
百担聯肩輸巨艑 연이어 어깨 메고 큰 배로 보냈구나 (얼~쑤)
釜山石決剖朙珠 부산엔 전복 껍질 이쁜 진주 캐어내고
菉島車螯腊更腴 녹도(菉島)엔 차오조개 포로 말려 억수로다
生來但憶歧城好 이날까지 생각해도 거제가 제일이라, (좋~다)♬
日食寒山輭玉膚 하루살이 겨울 산에 고운 살갗 보들보들
蕈松箰竹摠無聊 송이버섯 죽순들 모두다 별맛 없다
不可一餐無此燒 밥 한 끼로 모자라 불 지필 수도 없네
乞與人家小木林 남의 집에 빌려 온 작은 잡목 빼까리(무더기)
三朝風霧養新苗 그 해 아침 안개 바람 새싹 돋아 자란다네 (좋~다)♬
釘笠應殊早晩開 갈매나무 못을 찔러 유달리도 빨리 돋네
薑蔥並與作輿儓 생강 파 함께 넣어 너도 나도 짓는구나
東瀛定入華陽洞 제주도 귀양살이 화양동 우암선생(송시열)
直割乖龍左耳來 괴룡(임금)이 버려 놓고 높은 관직 증직한다.
雨後楓香索笑多 비온 뒤 단풍 향기 웃음 찾아 더 좋은데
採山休得錯來過 채산(採山)에서 캐다 쉬다 지나가다 못 본다.
北人到此無分別 북인들도 여기 오면 파당 분별 없어지고
只識桑蛾與柳蛾 상황버섯 버드나무 누에나방 오직 알 뿐.
山柚無花包貢虛 산유자 무화과 상납하니 헛되구나
蘑菰樹死採盈裾 표고버섯 심다 죽네, 벼슬아치 살만 찌고..
那得蘑菰似山柚 표고버섯 어디 갔나? 산유자도 알 길 없네.
無花直到更無餘 무화과도 그러하면 더 이상은 없다 해라.
 
[주1] 동영(東瀛) : 동방의 바다, 동영주[東瀛州] 제주도의 옛 별호, 삼신산 중 영주산(제주도).
[주2] 화양동(華陽洞)은 송시열이 중화(中華)의 화(華)자와 일양내복(一陽來福)의 양(陽)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즉 중화가 밤이 지나면 낮이 다시 오듯이 되살아 날 것이라는 뜻으로, 오랑케인 만주족 淸나라가 멸망한 후 중화인 明나라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담은 표현이니 송시열의 뿌리 깊은 事大主義를 볼 수 있어 꼭 바람직한 이름은 아니다.
[주3] 색소(索笑) : 매화에서 웃음을 찾았다는 말에서 온 말. 중국 시인 陸游의 시에 있음
[주4] 녹도 : 現 소록도, 거제시 둔덕면.

8) 여[與] / 낙하생집 이학규(李學逵)
서둘러 구름다리에 왔는데 미역 잎 같은 게 해상을 따라 빼곡히 서서 자란다. 남풍이 솔솔 불어 훈훈한 향기가 사람에게 맴도니 이는 비올 징후 같다. 다만 전날의 구름이었구나. 오늘은 아닌지라, 저물녘에 해가 나타나 타는 불(짙은 노을빛)과 다름이 없다. 오로지 여기 고을에서 살다보니 당연히 허물을 시험하는 것이리라. 나의 외로운 번민을 낫게 하는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며.. [早來雲腳 如海菜葉 從海上條條植立 且南風習習 薰氣撲人 想是雨候 但前日之雲 不翅今日 而晩間赫日 無異烈火 足下生居此鄕 當有驗過者 望有指敎破我孤悶也]

바다에서 나는 조개의 일종인 '바지락'을 가리키는 말로 '취조(吹潮)', '현합(玄蛤)'이란 이름이 있다. 얼룩덜룩한 무늬 때문에 '잡색합자(雜色蛤子)'니 '화합(花蛤)'이라고도 한다.  ‘花‘는 알록달록한 것을 가리킬 때 곧잘 붙인다. 사합(沙蛤)이나 사리(沙蜊)도 바지락을 가리키는 말. 沙(모래 사)가 들어 있으니 모래펄에 사는 조개임을 알 수 있다. 합리(蛤蜊)는 본디 합리(合蜊)라고 썼다. 껍데기 두 쪽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노오(盧敖)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若士者食合之肉  만약 선비가 바지락 살을 먹는다면  
與庸民同食 보통 사람과 똑같이 먹는 것이라  
無精輕之驗 몸이 순수하고 가볍다는 느낌이 없을 텐데  
安能縱體而升天 어찌 몸을 벗어나 하늘에 오르겠는가?

   
 
여기 선비는 사실 신선술(神仙術), 즉 신선이 되는 방법을 익히는 방사(方士)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늘에 오른다는 말이 적어도 노오(盧敖)에게는 비유가 아니다.노오(盧敖)의 말을 가만히 보면 漢나라 때 사람들도 바지락을 어지간히 즐겼던 모양이다. 당(唐)나라 때 시인 피일휴(皮日休)에게 병주(病酒)라는 시가 있다. 병주(病酒)는 술을 마신 이튿날 숙취(宿醉)를 달리 이르는 말. [何事晩來還欲飮 隔牆聞賣蛤聲]. “만사를 제쳐두고 한잔 하고 싶은데 담 밖에 바지락 사려 소리 들리네."  울고 싶자 매 때린다고 이날 피일휴(皮日休)는 바지락 안주에 한잔 거나하게 취했을 듯하다.

바지락은 백합과에 속하는 이매패류 연체동물로, 남시베리아에서 중국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에 서식하는 소형 어패류이다. '바지라기'라고 불리던 것이 줄어 '바지락'으로 되었다고 한다. 동해안 지역에서는 '빤지락', 경남지역에서는 '반지래기', 인천이나 전라도 지역에서는 '반지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껍데기는 달걀 모양의 타원형으로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표면에는 방사상 무늬가 있으며, 표면은 거칠고 크기나 색깔, 무늬, 형태 등이 서식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조선후기에는, 거제도 지역민에 부가된 가중한 부역과 군역 납세는 물론이고, 또한 권세가의 사리사욕이 극에 달한 상태여서, 삶이 곤궁하기가 비참했다. 특히 보릿고개 시절에는 수십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초가집은 써까래만 앙상하고 문풍지에는 찬바람 구멍이 더 많이 나있었고 이불은 단벌이라 온 식구가 한 이불로 자야하니 목숨만 겨우 이어가는 처지였다. 나오지 않는 어미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기는 면역력을 잃어 생후 몇 년 내의 사망률이 아주 높았다. 그나마 칡뿌리나 나무껍질을 삶아 끼니를 연명하다보니 온 얼굴과 몸이 퉁퉁 붓고 눈동자는 항상 충혈되어 있었다. 19세기 전국적인 민란이 일어났을 때(인근 고성, 진주, 울산, 남해, 등)에도 우리지역민들은 바다라는 또 다른 천연 자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바지락"은 선조들의 목숨을 연명하게 한 주인공이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놈이다. 미역국 된장국 수제비 떡국 등등, 어떤 국물이라도 바지락만 있으면 감칠 나니, "바지락은 하늘이 내려 준 보배다". 바지락의 무늬는 한 놈도 같은 게 없으니 사람을 닮은 듯하다.

9) 달을 보니 생각나네[對月有思]
繡鞍金絡遍相邀 수놓은 안장에 금빛 광안 말을 타고 두루 다녀보았는데
雲雨何曾限暮朝 비구름이 언제 아침저녁 따졌던가?
每度月朙花落夜 매양 달 밝은 밤마다 꽃은 떨어지고
一生腸斷小紅橋 한 평생 애간장 타는 연붉은 다리로세.
院外東風惻惻寒 마을 밖에서 동풍 불어오니 쓸쓸히 처량하여
夜深何處倚空欄 깊은 밤 어느 빈 난간에 기대었다네.
生憎金鏡猜人意 마침 금빛 달이 밉살스러운데 시샘하는 마음이런가.
不照雙鴛照隻鸞 한 쌍의 원앙새에 비추지 말고 외로운 난새에다 밝히어라.
낙하생은 24년간의 긴 유배기간동안 그도 궁핍하고 외로운 귀양살이를 영위하고 있었다. 봄날 따뜻한 바람 불어와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으면 좋을텐데.... 괜히 밝은 달에게 자신의 정한을 하소연하고 있다. 그의 유배 4년째 어린자식이 죽고 15년째 실인(室人)이, 19년차에는 노모가 잇달아 죽었다. 집안 노비 서너 명도 죽거나 다른 집으로 옮겨가매, 속수무책 가세는 기울어, 처절의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다음은 칠월칠석날, 거제면 농업개발원 간덕천 바닷가 모래톱에서 일 년에 한번 만난다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떠올리며, 쓸쓸한 귀양살이 정한(情恨)을 비유해 읊고 있다.

10) 칠석[七夕]
織女佳人雙淚流 아름다운 직녀의 두 줄기 눈물 흐르고
楡花風落絳河秋 해질녘 바람에 요동치는 짙붉은 가을 은하수,
誰將一夕逢迎喜 누가 하루저녁 반가이 만난다고 기쁘다 하리오.
抵得空洲一歲愁 빈 물가에서 얻은 근심, 한 해 동안의 수심이라네.
 

뉴스앤거제  nng@daum.net

<저작권자 © 뉴스앤거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앤거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 뉴스
  • 1
  • 2
  • 3
  • 4
  • 5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