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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2)[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 고영화
8) 거제도를 경유한 통신사들의 시편(詩篇)
조선통신사 일행들은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두려운 항해 길과 낯선 왜국의 상황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신들이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향수(鄕愁)와 풍광 그리고 여정의 즐거움, 해상의 상황을 나타내는 작품 등 다양했다. 여기에서 사절단의 향수는 당시 불안한 한일관계에 비추어보자면 사행(使行)의 부담에서 나온 심리적 요인이 더욱 컸다고 여겨진다.

조선전기 사신(使臣)들은 왜국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이 그 바탕에 깔려 있어 의연한 태도를 가지고자 노력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대마도로 출발하기 前의 국토의 남단 거제도에서 읊은 작품은 한가함에 이어 여유로움까지 느껴진다. 이들이 거제도의 아름다운 해상에서 천혜의 절경과 당시 사절단의 풍류를 기록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작은 시구 하나하나에서 어렴풋이, 옛 거제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니 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다. 일본으로 향하는 사절단은 기본적으로 평화교린을 목적으로 하는 바, 조국을 대표하여 떠나는 자부심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1) 조선초기 학자인 이범(李範) 선생이 통신사 수행원으로 대마도를 가던 중에 거제도에서 읊은 한시(漢詩)이다.

① 거제도 가을풍경[右岐城詠]
烟花開千戶 연화(煙火)는 온 마을에 피어나고,
桑麻蓋四鄰 상마(桑麻)는 사방을 덮었네.
海山秋色秀 바다와 산에 가을 색이 빼어나고,
洲橘晩香新 물가에 열린 귤(유자)은 늦게까지 향기 새롭네.

[주1] 연화(煙火) : 사람의 집에서 불 때는 연기(煙氣)
[주2] 상마(桑麻) : 뽕나무와 삼.

집집마다 군불 때는 연기(煙氣)인 ‘연화(煙火)‘는 곧, 의식주 중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의미하고, ’뽕나무와 삼’을 뜻하는 상마(桑麻)는 옷가지를 뜻한다. 거제도 늦가을 자연과 풍광을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여기에다 유자(귤)는 거제 토산물로써 그 향기 속에, 오감의 풍류와 문화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제도의 한시 중에 이 시편을 가장 좋아한다.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한 고향 거제도 모습을 가장 멋지게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시의 배경은 늦가을 저녁나절, 집집마다 아궁이에 군불을 넣을 때인가 보다. 거제도 초가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올라가고, 뽕나무와 삼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물가마다 노란 유자가 열려, 그 향기가 온 마을을 덮었으리라. 시편 3구까지는 온통 시각적인 그림을 펼쳐 놓더니 마지막 구에는 시각에서 후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범 선생의 문학적 천재성을 엿보게 한다.

② 거제도 해상[巨濟海上] / 이범(李範)
群山揷海淺還深 여러 산이 바다에 꽂힌 듯 얕았다가 깊었다가
頃刻能晴又易陰 잠깐 사이 개였다가 또 쉽게 그늘지네.
誰倚船窓夜吹笛 누군가 밤에 선창(船窓)에 기대어 피리 부는지,
滿船風雨老龍吟 배에 가득한 비바람에 늙은 용이 읊조리는 듯.

(2) 거제해상에서[巨濟海上] 송처검(宋處儉)과 이근(李覲) 1459년 일본통신사.
① 조접부상만리회(潮接扶桑萬里回) / 송처검(宋處儉, 세종 세조 문신).
山從見乃千峯斷 “산은 견내량(見乃梁)를 따라 천 봉우리가 솟아났고,
潮接扶桑萬里回 파도는 부상(동쪽바다)에 닿았다가 만 리 길 돌아온다.”
 
② 연분도구만조회(煙分島口晩潮回) / 이근(李覲, 세조때 문신).
天接海門秋水遠 “하늘은 해문(海門)에 닿은 듯 가을 물결이 멀고,
煙分島口晩潮回 연기는 섬 어귀를 가르고 늦은 파도 돌아오네.”

이근(李覲)선생은 세조5년 1월에 왕명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를 편찬했다. 세조5년 1459년 8월 대사성을 지낸 송처검(宋處儉)이 일본국 통신사로 임명되었을 때, 당시 서장관은 이근(李覲)이었다. 예물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우리나라에 없는 서적 등 물건을 사오게 하였다. 이 분들이 대마도로 출항할 때 거제도 견내량을 거쳐 지세포에서 대기했다가, 대마도로 건너갔다가 일본본토로 갔다. 1460년 10월6일 새벽에 100여명이 세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일본국왕선2척 대마도왜선2척과 함께 출항하였으나, 큰 풍랑을 만나 두 분 다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3) 조선초기 1479년 김흔(金訢,1448년∼미상) 선생은 일본통신사 일행인 백부[伯符 조지서(趙之瑞)]가 심히 사랑한, 거제 기생 '신월(新月)'이 있었는데, 그녀는 흥이 일면 미친 듯이 노래하고 어깨가 산처럼 솟듯이 춤을 추었다. 죽간을 던지듯 붓을 놀리면 멋진 문장이 저절로 짝을 이루었다한다.[岐城妓名新月 伯符甚寵 脫㥽狂吟肩聳山 文章曺植富波瀾 搖毫擲簡]. 아래 시는 가무가 출중하고 미색인 기생 "신월"을 백부(伯符)가 사모하긴 하나, 모든 기방 손님을 접대해야하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운 심정을 읊었다. / 다음 시(詩) 몇 편은 대마도로 출발하기 전에 거제시 지세포에서 여러 날을 대기하다가 지은 시편이다.

① 거제기생신월[岐城妓名新月] 자준[이계동(李季仝)1450~1506]에 차운하여 백부[伯符 조지서(趙之瑞)]에게 희롱삼아 지어 바치다.(次子俊韻 戲呈伯符) / 김흔(金訢 1448∼1492)
筆掃千人孰敢當 뭇 사람들이여~ 붓글씨로 누가 감히 맞서리오.
飄飄逸氣蓋蠻鄕 표표히 나부끼는 빼어난 기운이 변방(거제)을 뒤엎었네.
枉將大手裁長句 왕청스레 큰 재주로 긴 글귀 짓고
寄與佳人空自傷 가버린 절세미인 생각에 공염불만 태운다.
愁來一夕不禁當 내 얼굴이 바뀐, 하룻밤을 견딜 수가 없도다.
新月唯應照兩鄕 초승달이여~ 오직 두 마을만 비춰주소서.
歌舞千場供俠少 가무로써 숱한 소리판에 기방고객 모시니
任他羈客自悲傷 어쩔 수 없는 나그네, 절로 가슴이 아파온다. 

脫㥽狂吟肩聳山 흥이 일면 미친 듯 노래하며 어깨가 덩실 산처럼 솟아났고
文章曺植富波瀾 문장은 저절로 짝을 이루어 파도의 물결같이 풍부하였으니
搖毫擲簡誰能供 죽간을 던지듯 붓을 놀리면 누가 감탄하지 않으랴.
百賦千篇不澁艱 천편의 온갖 시문이 어렵고 까다롭지 않았다네.
世途險巇千仞山 인생길이 험난하여 천 길 높은 산과 같고
宦海狂奔萬丈瀾 파도 이는 바다가 광분하듯 파란만장하다네.
回首東溟平似拭 돌아 본 동쪽 바다가 씻은 듯 평평하지만
憑君莫賦行路難 그대여~ 세상일이 험난하니 시편을 읊지 마시게.

② 자준의 시에 차운하여[次子俊韻]. 자준은 이계동(李季仝 1450~1506)이다.
鯨海千層浪 고래바다에는 수많은 겹겹의 물결 일고
龍驤萬斛船 용이 달리며 수많은 배들이 다닌다.
共看天遠大 모두 보는 건, 원대한 하늘 위
幾見月遶娟 아름답게 에워싼 달을 몇 번이나 바라본다.
 
揮麈瀾翻口 주미를 휘두르듯 물결이 어귀에 나부끼고
垂珠山聳肩 구슬 같은 산이 솟은 어깨를 드리운 듯하네.
知君棟梁具 그대가 쓸만한 동량임을 아는데,
構廈豈容捐 큰 집을 지어야지, 어찌하여 속내를 내비치려 하는가?   
 
③ 밤비는 배를 적시고[舟中夜雨] 숙도 시에 차운하여(次叔度韻)
蕭蕭淅淅夜深聽 솔솔 부는 쓸쓸한 바람소리, 깊은 밤에 들려오고
亂打蓬窓點滴聲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 봉창을 두들기네.
獨掩塵編愁不寐 먼지 앉은 책 홀로 엿보며 시름겨워 잠 못 이룰 제,
孤燈影裏旅魂驚 외로운 등불 그림자 속에서 잠 못 드는 나그네.
獨倚孤蓬歷歷聽 홀로 의지한 외로운 쑥(떠도는 몸), 또렷이 들리는
和風蕭颯作秋聲 건들바람 스르르, 가을소리로다.
遙知今夜空閨裏 멀리서도 오늘 밤 텅 빈 규방임을 알지만
滴破佳人夢自驚 꿈속에 가인(佳人)이 물방울 흩어지듯 사라져 놀라 깼다네.   

④ 김흔(金訢)이 1479년 조지서趙之瑞)와 이계동(李季仝)과 함께 사신으로 일본 대마도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거제도 해상에서 지은 시들이다. 칠언율시(七言律詩)
◯ 구일(九日) 배에 내려 전봉에 올라 서쪽으로 바라보니 동래ㆍ웅천ㆍ거제의 모든 봉우리를  낱낱이 셀 듯하였다[九日 舍舟前峯 西望東萊 態川 巨濟諸峯 歷歷可數]  
愁邊無奈菊花枝 시름 끝에 국화 가지를 어찌할 수 없어서
三嗅淸春當一巵 맑은 향기 세 번 맡아 한 잔 술 마시는 것을 대신했네
作客不堪逢令節 나그네 되었으매 좋은 때 만난 것을 견디지 못하겠고
憑高逾覺在遐陲 높은 곳 의지하매 먼 변방에 있음을 깨닫겠다
蕭蕭草木窮秋後 소소한 풀과 나무는 늦가을 뒤요
渺渺煙波薄暯時 묘묘한 연기와 물결은 해가 지는 때 일세.
迢遞故山登眺處 멀고멀다 내 고향을 산에 올라 바라보니
遙知欠我醉吟詩 술에 취하고 시를 읊음에도 내게 없는 것을 비로소 알겠구나.
試登絶頂作重陽 시험 삼아 산마루에 오르매 중양절이 되어
旋買前村濁酒觴 급히 앞마을의 탁주를 사서 잔질해 보니
佳節偏驚孤客意 좋은 절후는 치우치게 외로운 손의 뜻을 놀라게 하는데
寒花只作故園香 차가운 꽃은 다만 고향 동산의 향기를 가졌구나.
明年何處逢今夕 명년에는 어느 곳에서 오늘 밤 만나리오.
此日扁舟滯異鄕 이날에는 조각배로 타향에 머물거니
不見長安渾欲老 장안을 보지 못하고 완전히 늙으려 하는데
孤雲落照共蒼茫 외로운 구름과 떨어지는 해가 함께 아득하여라.

   
 
(4) ‘문절공이 이장군에게 드린다’ 차운하여[次文節公贈李將軍韻] 이예(李藝)는 울산군(울주군)의 아전이다. 조선 태조 병자년(1396년) 울산군수 이은(李殷)이 왜인에게 사로잡혀 대마도로 끌러갔다. 이예가 대마도로 건너가 포로로 수년간 잡혀있는 군수 이은을 관리의 예로써 섬기었다. 왜 장수가 그 의리에 감동하여 특별히 이은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그 재주를 특별히 중용하고자 벼슬을 내리니 마침내 중군총제에 이르렀다.(李藝 蔚山鄕吏也 洪武丙子 郡事李殷 爲倭所虜 藝卽出隨 殷在虜中數歲 恒執吏禮 倭帥感其義 特幷殷還國 藝擢用 至中軍摠制終) / 김수온(金守溫, 1410~1481)
主辱臣當死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州危吏必行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관리는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一朝能抗節 하루아침에 절조(節操)를 굽히지 말아야하니
千載永垂名 천년 동안 그 이름 영원히 드리우소서.
絶域艱難遍 먼 지역에서 괴롭고 어려움을 두루 겪고
蒼波頃刻生 만경창파에서 겨우 살아 난
此心終不變 이 마음, 끝내 변하지 않으니
利義兩途明 이익과 정의(正義)의 두 길을 밝히셨다.

◯ <지세포만(知世浦灣)>  고영화(高永和)  
처녀옥녀(玉女) 신선되어  연지 찾아 상봉할 때
지세만에 비친 달빛 교태로다 살랑살랑

푸른 쪽빛 바다위로   섬의 별이 내려와서
자궁벽에 착상되면 경사로다 덩실덩실 
 
억만년 생리통을  쏟아내던 포말(泡沫)도 
씻은 듯이 사라지네    놀라와라 어귀둥실

[주] 처녀옥녀 : 옥녀봉(玉女峰 554.7m). 연지 : 연지봉(지세포 봉수대 산봉우리)

○ 거제시 지세포에 출발한 조선사절 선단(船團)은 대마도 서북편 해안에 대부분 도착하였고 이후 15세기 대마도주(관청)가 거주하던, 대마도 북섬 사카(佐賀) 항구로 이동하였다(15세기 말엽부터 대마도 남섬 이즈하라로 옮김). 조선시대 공식적인 일본 파견 외교사절 횟수가 약30회에 달하는데 그 중에 18회가 조선전기에 이루어졌다. 사카(佐賀) 항구에 있는 원통사(圓通寺)는 당시 대마도주가 집무를 보던 관청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일본으로 가는 외교관으로서 최대의 업적을 남긴, 통신사 이예(李藝 1373~ 1445)의 공적비가 여기에 있다.

   
 
9) 조선전기 지세포를 거쳐 간 일본사절단 인물 소개.
① 조신(曺伸 1454~1528) :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지은 조위(曺偉)의 서형(庶兄)이다. 문장에 뛰어났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가 문명을 떨쳤고, 돌아와 사역원 정(司譯院正)으로 발탁되었다. 중종(中宗)의 명으로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역관으로 명나라에 7번, 일본에 3번 다녀왔다. 명나라에 갔을 때에는 안남국(安南國) 사신과 시로 수창하여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만년에는 금산(金山)에 은거하면서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저서에 《적암시고(適庵詩稿)》ㆍ《소문쇄록(謏聞瑣錄)》ㆍ《백년록(百年錄)》 등이 있다. 조숙도(曺叔度) : 숙도는 조신(曺伸)의 자인 듯하다.

② 이형원(李亨元 1440∼1479) : 조선전기 문신으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이르렀다. 성종 10년 1479년 10월에 부제학 이형원과 서장관 김흔(金訢)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통신사 이형원은 대마도에 이르러 해로가 험난하고 풍파에 놀라 병이 되어 글을 올려 이 사정을 말하였다. 성종은 국서와 폐백만 대마도주에게 전하고 돌아오게 명하여, 대마도에서 돌아오는 중에 이형원(李亨元)이 병을 얻어 거제도 지세포 전사(傳舍 객사)에서 죽었다. 이로부터는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고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예로써 접대할 뿐이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③ 김흔(金訢, 1448∼1492) :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군절(君節)이고 호는 안락당(顔樂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김전(金詮)의 형이고 김종직의 문인이다. 1471년(성종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묘에 배알하러 억지로 들어갔다가 폐출되었다. 1473년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이 되었다. 1475년 승문원 교검을 거쳐, 1478년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통신사 서장관으로 대마도에 갔다가 병으로 인해 돌아왔다. 1480년 문관 중시에서 율시로 장원했다. 이듬해 명나라에 다녀와 예문관 응교가 되었다. 1483년 전한을 지내고 이듬해 직제학에 승진하여 천안지방 수령의 불법행위를 사찰하였다. 1486년 공조참의에 이르렀으나 풍질(風疾)로 여러 차례 사직을 원해 1487년 상호군에 임명되어 요양했다.

[주] 안락당집 권지3[顔樂堂集卷之三] 연보(年譜) : 1479년 4월 일본 국가통신사로 부제학 이형원과 함께 사신으로 갔다. 부사 대호군 이계동(李季仝)과 더불어 사신을 보좌하는 서장관(기록 담당)으로 파견되었다. 6월7일 새벽에 거제현 지세포에서 배가 출발하여 해가 저물어 대마도 사수라포에 정박했다. 6월18일 고우에 다다랐는데 고우는 대마도주가 거주하는 곳이다. 이전에 병을 얻어 걸을 수가 없었다. 글을 써서 조정에 전하고 왕명을 얻어 돌아왔다. 9월17일 동래현 부산포로 돌아와 정박했다[成化十五年己亥四月 國家通信日本 以副提學李亨元爲使 行大護軍李季仝爲副 差公書狀官以遣 六月初七日黎明 發船于巨濟縣知世浦 日昃 泊對馬州沙愁羅浦 十八日 抵古于 古于 卽島主所居也 上个疾作 不能行 書聞 命還 九月十七日 還泊東萊縣釜山浦]

④ 고득종(高得宗 1388∼1452) :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전(子傳), 호는 영곡(靈谷) 순원(順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걸(臣傑)이며, 아버지는 상장군 봉지(鳳智)이다. 1413년(태종 13) 효행으로 천거받아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대호군(大護軍)·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37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의로서 종마진공사(種馬進貢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9년 통신사가 되어 부사 윤인보(尹仁甫), 서장관 김몽례(金夢禮)와 함께 일본에 가서 아시카가(足利義敎)와 오우치(大內持世)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왔다. 1441년 예조참의로 다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그때 함부로 약재를 청하고, 또 이만주(李滿柱)와 동범찰(童凡察)의 처치를 요구한 일로 귀국 즉시 강음현(江陰縣)에 유배되었다. 2년 후 풀려나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448년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술이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⑤ 이계동(李季仝 1450~1506) :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준(子俊), 1470년(성종 1)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훈련원판관에 임명되었다. 1476년 무과 중시에 급제해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이 되었다가 창성부사로 나갔다. 이 해 10월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정사 이형원(李亨元)이 병으로 죽자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황해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으나 경력이 없어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가,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돌아와 형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479년 선전관이 되었다. 1480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중국으로 떠나기 전의 사연(賜宴 : 베풀어준 향연)에서 불경한 행동으로 전라도 해남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성종의 명으로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1482년 여진어에 능통하고 그들의 사정을 잘 안다는 점이 인정되어 함경도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 여진을 성심으로 대해 재임 중 그 지역이 안정되었으며, 뒷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에는 모련위(毛憐衛)의 여진인들이 늘어서서 인사를 할 정도로 신망을 받았다. 1486년 좌윤이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도상중원교사지법 圖上中原敎射之法≫을 필사해 왕에게 바쳤다.

1487년 형조참판을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489년 황해도에 김경의(金京儀)·김막동(金莫同)의 도적이 일어났을 때 금제사(擒制使)로 파견되어, 구질포지산(仇叱浦只山)을 공격해 우두머리를 체포하는 등 적을 소탕하고 돌아와 포백(布帛)과 무기를 상으로 받았다. 1490년 무과 출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야인(野人) 이마거(尼麻車)가 조산(造山)에 침입했을 때 윤필상의 추천으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허종(許琮)을 보좌해 토벌에 나섰다. 이 때 큰 성과는 없었으나 돌아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149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계속된 흉년으로 도둑이 들끓자 연로수직법(沿路守直法)을 만들어 검색을 강화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494년 지중추부사로서 성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중국의 무기 통제나 조선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보고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 왕명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 西北諸藩記≫와 ≪서북지도 西北地圖≫를 편찬해 올렸다. 1500년 병으로 병조판서에서 물러났다. 병조판서 재임 시에 특히 북방에 관한 여러 시책에 관심을 기울였고 용의주도한 대비를 하였다. 1504년 우찬성이 되었다가 이듬 해 좌찬성과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무신으로 크게 활약했으며 독서에도 힘써 당시 문무를 겸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한다. 시호는 헌무(憲武)이다.

⑥ 이예(李藝 1373~ 1445) : 본관이 학성(鶴城) 호는 학파(鶴坡), 원래 울산군의 기관(記官) 출신인데, 1396년(태조 5) 왜적에게 잡혀간 지울산군사 이은(李殷) 등을 시종한 공으로 아전의 역에서 면제되고 벼슬을 받았다. 1400년(정종 2) 어린 나이로 왜적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청해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을 따라 일본의 삼도(三島)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1401년(태종 1) 처음으로 이키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 포로 50명을 데려온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제수되었다. 그 뒤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 찾아오고, 벼슬도 여러 번 승진해 호군이 되었다. 1416년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1419년(세종 1) 중군병마부수사(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이예는 거제도 지세포를 경유해서 대마도를 다녀왔다.

1422·1424·1428년에는 각각 회례부사(回禮副使)·통신부사 등으로, 1432년에는 회례정사(回禮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런데 당시 부사였던 김구경(金久冏)이 세종에게 사무역(私貿易)을 했다고 상계(上啓)해 한 때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으나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한 뒤 대마도경차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다. 1443년에는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해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가 되어 다녀온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승진하였다. 조선 초기에 사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것이 모두 40여 차례, 총667명 포로를 구출했다고 한다[조선실록 기록 上].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⑦ 박서생(朴瑞生 ?~?) : 조선의 문신. 자는 여상(汝祥), 본관은 비안(比安),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조부는 판도사 판서(版圖司 判書)를 지낸 박계오(朴繼五)이고, 증조부는 직장(直長) 박종주(朴宗柱)이고, 조부는 예부 낭중(禮部 郎中) 박윤보(朴允甫)이고, 부(父)는 박점(朴漸)이다. 손자 박효원(朴孝元)은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에 참여하였고, 장령(掌令),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박서생은 1401년(태종1)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좌정언에 제수될 정도로 학문이 뛰어 났다. 이후 1419년(세종1) 사헌부 집의, 1426년 대사성, 대사헌, 1429년 우군첨총제(右軍簽摠制),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 1430) 공조ㆍ병조의 참의(參議), 판안동 부사(判安東府事 ; 1432) 역임. 이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대에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특히 1428년(세종 10) 조선 최초의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제도와 풍습을 소개하면서 좋은 점을 차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수차와 화폐사용, 교량과 역원(驛院)의 정비, 상가의 진열장 및 간판 정비, 사탕수수 재배, 각종 염색이나 은박지 제조법 소개 등 매우 실용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건의 내용이 있다. 박서생의 관력이나 시무책 건의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⑧ 변효문(卞孝文 1396∼?)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초명은 계문(季文), 자는 일민(一敏). 경(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빈(贇)이고, 아버지는 판윤(判尹) 남룡(南龍)이며, 어머니는 영문하부사 염제신(廉悌臣)의 딸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 내외직을 지낸 뒤 직제학을 거쳐 1428년(세종 10)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을 지냈다. 1439년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를 거쳐 그 이듬해 첨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이전에 회령대후(會寧待候)로 재직시에 귀화한 여진인들의 의복지급사건에서 죄를 지은 사실로 의금부·사헌부 등의 탄핵을 받아 1441년 파직되었다. 1443년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나, 태종 때의 죄인이었던 이속(李續)의 손자인 인휴(仁畦)를 통신사 수행시 대동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1446년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이전에 훈련제조(訓鍊提調) 재직 때에 아들 이흠(李欽)의 무과시험에서 감찰(監察)에게 청탁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직산(稷山)으로 장류(杖流 장형을 받고 유배당함)되었다. 1454년(단종2) 다시 중추원부사를 거쳐 경주부윤·전주부윤을 역임하였으나, 1458년(세조4) 전주부윤 재직 중 축재한 죄로 파직되었다. 1444년『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였고, 앞서 최치운(崔致雲)·이세형(李世衡)·김황(金滉) 등과 함께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하였다.

⑨ 윤인보(尹仁甫 생몰년 미상) : 조선전기 무신, 1414년(태종 14) 왜관통사(倭官通事)를 지내고 1420년(세종 2) 일본국회례사통사(日本國回禮使通事)를 거쳐 1424년 왜통사(倭通事)·호군(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430년 통신사통사(通信使通事)를 거쳐 1440년 통신부사상호군(通信副使上護軍)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450년(문종 즉위년) 상호군으로 대마도 상인들이 많이 오는 것을 엄하게 경계하도록 상소하였다. 1455년(세조 1) 상호군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⑩ 김자정(金自貞 생몰년 미상) : 조선전기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진사시를 거쳐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집현전권지정자(集賢殿權知正字)에 제수되었다. 1455년 세조 즉위에 협조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뒤 승문원박사를 거쳐, 1470년(성종 1) 예조정랑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장령(掌令)·참교(參校)를 지내며 한어(漢語)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1474년 선위사(宣慰使)로서 대마도에 건너가 왜인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와, 1481년노사신(盧思愼) 등과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이어 대사간을 역임하고, 148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대왜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그 뒤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85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전라도관찰사·대사헌·개성유수를 지내고, 1492년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뇌물수뢰 혐의로 탄핵을 받고 곧 동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491년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연산군이 즉위하자 하정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97년(연산군 3) 지의금부사로 무오사화를 처리하여 논공행상되었고, 그 뒤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어학, 특히 한어에 능하여 외교업무에 공이 많았다. 시호는 정명(精明)이다.

⑪ 정성근(鄭誠謹 ?~1504) : 조선전기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이신(而信)·겸부(兼夫). 자순(子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설(舌)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척(陟)이다. 어머니는 이양몽(李養蒙)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79년 수찬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1481년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추천되었고, 경차관(敬差官)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교동현의 유민(流民)을 진휼하였다. 이듬해에는 홍문관부응교로서 구황적간(救荒摘奸)하기 위해 전라도에 파견되었으며, 148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전한을 거쳐 대마도선위사(對馬島宣慰使)로 파견되었다. 1487년에는 시강관으로 경연에서 용인(用人)의 법도를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 해 직제학이 되었다. 그가 선위사로 대마도에 갔을 때, 대마도주가 주는 화선·호초(胡椒) 등을 모두 되돌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에 도주가 그 물건을 또 특별히 보내와서 나눠주게 했으나, 그가 완강히 사양하여 왕은 그 물건을 도로 대마도에 돌려보냈다.
그 뒤 해주목사를 거쳐 1490년반우형(潘佑亨)·표연말(表沿沫)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기도경차관·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이 때 해주목사로 재직할 때의 부정으로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1494년 성종이 죽자 3년 동안 수묘했으며, 1495년(연산군 1) 행호군으로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다시 정계에서 축출되었으나, 1497년에 다시 서용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되었으나, 중종 즉위 후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 되고, 그의 충효로 아들이 녹용(錄用)되었다. 1507년(중종 2)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내려졌다. 또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광주(廣州)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⑫ 신숙주(申叔舟) : 조선 세종세조 때의 문신(1417~1475). 본관은 고령으로 자는 범옹(泛翁)이며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와 보급에 공을 세웠다. 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 겸 종사관(書狀官兼從事官)으로 9개월간 다녀왔다. 계해조약에도 참여했다. 1464년 7월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7월 19일 일본 국왕 고나하조노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일본 측의 대접은 소홀하였고 그해 12월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10) 맺음말
거제도(巨濟島)는 크고 아름답다.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으로 해안선만 900리에 달하며 60여개 섬을 알처럼 품고 있다. 사면이 바다인 환해천험(環海天險)의 거제섬은 왜구가 눈앞에 놓여 있었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요해처(要害處), 즉 적을 막기에 긴요한 용반호거(龍蟠虎踞)의 땅이었다. 거제도는 한반도의 동남쪽 대한해협의 끝자락에서 궁벽하고 고독한 곳에 머물지 않고 대양을 향해 나래를 펴는 산명수수(山明水秀)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거제도는 고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써 교역에 의존해 살아왔다. 우리나라 남부해안 지역과 제주도 대마도 이끼섬 큐우슈우 등지로 왕래하여 재정이 풍부하였고 여러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다양성과 역동성이 넘쳐난 곳이었다.

1550년경 거제도 유헌(游軒) 정황(丁熿)은 그의 문집에서 거제도를 서술하길, “산하는 일본과 통하고 성곽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조수를 이용하여 백제국이 통상하고 장사를 했으며 나라가 태평하여 물품과 재화가 서로 옮겨가며 무역을 했었다. 생각해보니, 대마도를 마주보는 땅의 경계에서 동쪽으로 갔었고, 맑은 날에 한번 훑어보아도 또렷이 국토의 끝(대마도)이 보인다.[山河通日本 城郭自新羅 潮通商賈百濟國 昇平物貨相貿遷 惟東案對是對馬 晴日分明一眸邊]”라고 적고 있다.

거제도는 고려말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남동해안의 수군진영의 구축으로 바닷길이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계해조약이 발효되고 거제7목장이 설치되면서 마침내 조선초 15세기에는 대부분 일본으로 가는 조선사절단(일본통신사)이 거제시 지세포에서 머물다가, 대마도로 가는 해로(海路)의 기착지 및 출발지가 되었다. 이로써 국제 무역항으로 세관이 들어서고 통신사 행렬이 이어지면서, 통신사(通信使)를 영접∙호위하는 영빙선(迎聘船)과 어업왜선의 출입이 빈번해져 아름다운 거제도의 풍광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풍요로운 고장으로 변할 수 있었다. 비록 16세기로 접어들면서 통신사의 유숙지(留宿地) 및 출발지로 쇠퇴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해양문화의 역사에서, 언제나 커나 큰 비중을 차지했던 자부심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또한 거제시 지세포(知世浦) 해상공원[해양문화관, 어촌박물관]에 여말선초, 통신사 사절단이 이 항구에서 머물다 출발했음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라도 설치해야 하며 그들이 남긴 기록을 이용해 역사가 있는, 옛 통신사 문화를 덧붙여야 한다. 여기에 조선통신사 선박 한척을 복원해서 전시할 필요도 있다.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 되어왔으니 이에 옛 항해 길을 복원하는 대마도 직통 여객선을 개설할 필요가 있으며, 거제문화예술단체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재현이나 무대행사(해신제, 음악, 무용, 연극 등) 하나 정도는 적어도 새로 제작해, 지세포 해양공원에서 연중행사로 기획해 내야한다. 특히 지세포만 일대는 대명콘도 요트학교 해양문화관 어촌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이러한 시설들과 연계해 통신사 문화를 덧붙여 관광해양도시의 발판으로 삼아야한다.

비록 부산광역시가 2002년부터 심포지움을 통해, 2003년 조선통신사 재단을 만들고 현재 통신사 문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더라도, 부산시가 주도하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12회, 약200 년간의 조선통신사 문화이다. 거제시는 조선전기 통신사 문화를 따로 일구고 창출해내면 된다. 이후 부산시와 연계해 ‘광역지역 문화축제‘로 협력하면 될 것이다.

생각건대, 과거 통신사 일행의 역사문화는 지나간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이 있듯이, 현재의 시점에서 옛 역사문화를 되돌아보고, 변화와 혁신을 통해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야 한다. 역사는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 옛날 동아시아 해상교통로였던 사실을 똑바로 직시해야하며, 다시금 문화가 오고가고 문명이 전해지는, 통로의 핵심요지(核心要地)로 되살려내야 하겠다. 이에 일운면은 대마도 작은 도시[북섬 사카(佐賀) 15세기 대마관청]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은 물론, 유구한 거제도와 대마도의 역사문화를 다시금 교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옛날 같은 섬 문화를 공유했던 대마도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거제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를 냉정히 통찰하여, 서로를 인정하고, 거제도와 대마도가 ‘성신교린(誠信交隣)‘ 즉 성실과 신의의 정신으로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해 나가야한다. 현대(現代)에 접어들어, 거제도에서 세계 최고의 조선소가 세워진 것도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온, 자랑스러운 거제도 역사의 오랜 맥락에 그 뿌리가 있음이니, 지금부터 지역의 미래를 위해, 한걸음씩 초석(礎石)을 다져 놓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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