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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예술인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 차례 : 1) 생애 및 머리말 2) 성파의 제자들 3) 추사체 전수 경로  4) 서예작품 및 평가 5) 서예(書藝) 그리고 맺음말
   
▲ 고영화 선생
1) 생애 및 머리말
서예(書藝)란 붓으로 글씨를 쓰는 예술을 말한다. 중국에서 발생한 예술형식의 하나로서 한국 및 일본에 전래되어 한자뿐만 아니라 해당 나라의 글씨체를 예술적으로 종이 위에 표현하는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도(書道)라고도 불린다. 서예는 붓끝의 서선(書線) 즉, 내용 있는 선, 미의 선, 인간의 생명이 통하는 선이다. 물체의 형태 또는 대상의 연관성을 그리는 선이 아니고, 인간성과 연관성이 깊은 선(線)의 예술이다.

◯ 영남(嶺南)의 서예대가이며, 현재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서예인들의 큰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던, 거제도 출신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9~1943) 선생이 계셨다. 근대서예사의 실질적 개창자로 이름을 남긴 분들의 실제 스승으로서, 1910년대 이후 다채로운 활약을 보였다. 비록 근대적 표현방법이나 서법의 독자성을 뚜렷이 빛내지는 못하였으나, 전통서체로서 한 시대를 대표하며, 근대 서예계 형성에 큰 기여를 하신 분이다.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 서화계의 움직임은 암울하기만 하였으나, 차차 새로운 양상의 개막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서예계가 따로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글씨로 명성을 얻고 있던 인사들 중에서 근대적 서화운동에 스스로 혹은 추대되어 참여하는 일이 있게 되고, 나아가서 전문적 서예가로서 사회적 존중을 받게 되는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중심에 경남의 성파(星坡)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출신으로, 호(號)가 성파(星坡)이다. 1869년 2월1일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437번지 진양인(晋陽人) 하지호(河志灝 1827~188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성파(星坡)는, 경남 마산 진주 등으로 나가서 명성을 떨쳤고 1943년 11월5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결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 온 동양의 명필로, 거제도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예술인이다. 그의 나이 60세를 넘긴 때부터 전국적인 서예가로써 그 명성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고 성파(星坡) 하동주의 아버지인 하지호(河志灝)는 진양(晋陽) 하씨로 자(字)는 성장(聖章), 호(號)는 송곡(松谷)이다. 조선말기와 구한말에는 대부분 실제 출생년도보다 늦게 호적에 올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성파 선생의 호적상 출생연도는 1869년이다. 거제면사무소에 현재 기재되어있는, 제적부(除籍簿) 기록인 1869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19년 11월 18일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내용을 언급하면, “원래 하동주(河東洲) 선생은 통영군 거제면 하씨 성을 가진 분으로 호(號)가 성파(星坡)이고, 조선의 명필 前 참판 김정희(金正喜) 추사공(秋史公)의 제자인 하지호(河志灝)는 호(號)가 송곡공(松谷公)으로, 성파의 아버지이다. 성파는 1874년 6살부터 그의 선고(先考) 하지호(河志灝)의 전문으로 성과 한 추사공 서법을 배워 우금 40여년에 손에 붓을 놓지 않아서 필정(筆精)이 귀신이 드러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성파(星坡)는 추사선생으로부터 직접 필법을 사사한, 선고(先考) 하지호(河志灝) 공이 돌아가신, 18세 때인 1886년 유지를 받들어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하였고, 63세 때 영남루(嶺南樓) 편액을 쓰셨다한다. 선생은 선고(先考)의 유훈을 소중히 가슴에 담아, “시와 글씨로써 선조의 업으로 삼는다[詩書遺業]”는 신념을 굳게 지키며, “담박해야 뜻을 밝힐 수 있다[澹泊明志]”는 정신으로 평생을 종이와 붓, 벼루와 함께 하셨다.

[주1] 위 기사 내용 中, 하지호 선생이 추사에게 직접 추사체를 배웠다거나 또는 군관으로 추사를 호위했다는 사실은 추사의 연보 및 행적, 사망일과 하지호의 나이로 볼 때 연결하기가 어렵고, 또한 어떠한 역사적 기록에도 추사 김정희와 하지호, 그리고 김정희와 거제도는 인연은 없었다.
[주2] 거제군과 용남군이 1914년 통영군으로 병합하였다가 1953년 거제군은 통영군에서 복군하였다.

그리고 성파 선생은 서예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43세 때인 1911년 12월19일, 거제군 거제공립보통학교(巨濟公立普通學校, 現거제초등학교) 학무위원(學務委員)으로써, 유공환(兪公煥) 조석근(曹錫瑾) 김경식(金敬植) 옥유환(玉有煥) 등과 함께 임기2년 명예직을 역임하였다. 거제공립보통학교(現거제초등학교)는 대한제국 광무(光武) 11년(고종 44년, 1907년) 2월10일 당시 고희준 거제군수가 주창해 김경식, 유공환, 염상수 등이 협력해 모은 기금 3800환으로 사립 거제보통학교가 설립된다. 4년제 사립 거제보통학교로 출발한 거제초등학교는 학교 명칭도 시대에 따라 사립 거제보통학교(1907년), 공립 거제보통학교(1911년), 거제성내심상소학교(1938년), 거제성내공립초등학교(1941년), 거제공립초등학교(1945년), 거제초등학교(1949년) 순으로 변했다.

학무위원을 역임하던 이 당시, 거제시 거제면 ‘반곡서원 동록당’과 학교건물 ‘거제 기성관’ 편액문도 그가 쓴 글씨였다. 우리나라 관공립학교 학무위원은 1911년 처음 임명되었는데 지역사회의 덕망 있는 유지(有志)들로 구성하였다. 1910년경부터 선생은 이미 전국적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마침내 서울에는 소당 김석준(小堂 金奭準), 안동에는 소우 강벽원(小愚 姜璧元), 진주에는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洲), 대구에는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등의 서체(書體)가, 국외의 중국 일본에서 칭찬을 받기에 이르렀다.

성파선생의 옛 신문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11년 1919년 1920년 모두 주소지가 現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437번지로 되어있다. 선생이 50 여세를 넘긴 그때까지도, 거제시에 주소지를 두고 있으면서 경남 여러 지역으로 다니시며 활발한 활동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후 60세가 지난 후부터 전라도 순천 해남 전주, 경남의 밀양 진주 마산 통영 양산 함양 합천 사천 고성은 물론, 부산∙서울까지 선생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1930년대 신문기사를 보면, ‘원당 하성파선생의 유서전람회 개최’, 조선중앙일보사 전주지국 후원으로 “제2의 완당이라 칭하는 성파 하동주 선생”의 전람회를 개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2년 9월16일 전남 순천(順天) 서화전람회(書畵展覽會), 1933년 7월4일 전주 서예전람회개최(書道展覽會開催) 등, 대부분 경남과 호남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선생은 1940년대 초까지 이어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양산(梁山)의 통도사, 고성(固城)의 옥천사, 부산(釜山)의 범어사, 통영(統營)의 안정사, 용화사 그리고 진주(晋州)의 촉석루, 밀양(密陽)의 영남루에 걸어 놓은 큰 글씨의 현판(懸板)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족자와 병풍 등이 있다.

거제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예술인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김정희에게 직접 추사체를 배웠다거나 직접 동록 정혼성 선생께 전예서(篆隸書)를 전수 받았다는 전언은 사실과 다르다. 1851년 북청으로 유배 간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다음해 풀려나 1856년 과천에서 사망할 때까지 평생 거제도에 온 적이 없었으며,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선생은 1843년 3월에 사망하여 하동주의 출생년도 1869년과 시대적 상황이 일치하지 않는다. 성파의 부친 하지호(河志灝)는 1827년생이니 어린 시절 거제면 지역에서, 거제도 최고의 학자였던 동록 선생의 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배웠음이 틀림없다. 동록 선생은 당시 거제통영고성 인근 최고의 학자이자 명필가(名筆家)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 성파(星坡)선생의 묘는 거제면 서정리 들판의 작은 독뫼산 양지바른 곳에 있다. 추사체를 전승한 성파는 추사의 분신이라 할 만큼 서법이 같았다. 성파의 인물에 대해 그의 제자들이 전하길, “5척 단구에 음성이 쩌렁쩌렁하고 성질이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그의 활동무대는 영호남지역이었는데 사천 다솔사와 진주 의곡사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고성군 개천면 박부잣집(朴進士)에서 식객 노릇을 하기도 했다.

   
 
◯ 다솔사(多率寺)’는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鳳鳴山) 자락에 터를 잡고 앉은 1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다. 여기 다솔사 안심료(安心寮)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저술된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다솔사에 있을 때에는 주지 최범술(崔凡述) 제헌국회의원과 김범부(金凡父) 전 동래 국회의원, 김법린(金法麟) 문교부 장관 등과 교류하였다. 이러한 교우관계의 영향으로 성파선생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권세와 문화에 기대지 않고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추사서체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진주 의곡사는 진주시 상봉동 비봉산(飛鳳山)에 있는 천년고찰로, 성파가 있을 때는 의재 허백련(許百鍊), 풍곡 성재휴(成在烋), 예전 허민(許珉), 산강 변영만(卞榮晩), 소곡 변관식(卞寬植), 벽산 정대기(鄭大基), 계남 김영배(金永培), 야동 오복근(吳福根) 등과 문인으로는 파성 설창수(薛昌洙), 구상(具常), 조지훈(趙芝薰), 장덕조(張德祚), 박화성(朴花城),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등과 교우를 맺었다.

   
 
◯ 성파의 제자로는 청남 오제봉(吳濟峰), 우강 김병욱(金秉旭), 도연 김정(金正), 은초 정명수(鄭明壽), 김우동(金雨東), 우종완(禹鍾浣) 등 국내 유명한 서예가를 탄생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성파의 글씨는 합천 해인사와 함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등지를 비롯하여. 사찰의 현판과 주련에 남아있고, 고성 개천면 청광리 박부잣집(朴進士) 객실에는 그의 작품이 사방에 걸려있다. 시서유업(詩書遺業 시와 글씨로 조상의 업으로 삼는다), 담박명지(澹泊明志 담박해야 뜻을 밝힐 수 있다), 영정치원(寧靜致遠 편안하고 정숙해야 원대함을 이룬다), 근급시보(勤給是寶 근면하고 베풂이 곧 보배이다)의 글씨는 전성기에 썼던 가장 힘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제시 사곡 삼거리에 성파 선생의 묵적비(墨蹟碑)를 묵적비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성금을 받아 1989년 11월18일 건립 제막하였다. 비문은 이가원(李家源)선생이, 글씨는 김진희(金鎭禧), 조각은 박윤석(朴允奭)이 각각 담당하였다.

   
 
◯ 하동주(河東洲) 선생이 남긴 만장(輓章) 중에 유일하게 전하는 7언절구 한편이 남아있다. 전통적 상례에서 만장은 생전에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 죽은 이의 애도의 문장을 짓고 써서 바치는 글을 만사(輓詞)·만시(輓詩)라고도 한다. 형식은 대개 5언절구와 5언율시 또는 7언절구와 7언율시이다. 때로는 장문시의 글이나 4자체로 쓴 경우도 있으며, 고인의 일대기 중에서 뽑은 행장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글이 모이면 종이에 쓴 뒤 대나무 장대에 매달아 고인의 초상집에 비를 맞지 않게 세워둔다. 글을 쓴 사람이 직접 비단 등에 써서 가져오기도 한다. 학문이나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의 초상 행렬에는 으레 수많은 만장이 뒤따르므로 그 숫자로 고인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기도 한다. 이름난 선비가 죽으면 각지에서 추도객들이 만장의 글을 써서 들고 와서 곡을 하며 상여 뒤를 따른다. 묘지에 도착하여 산역(山役, 무덤을 만드는 일)을 끝내고 나면 만장을 태운다. 그러나 만장의 글들을 모두 모아 뒷날 문집이나 일대기를 담은 행장록을 만들 때 부록으로 싣기도 한다. 또는 사당을 만들 때 글들을 목판에 새겨 사당에 현판으로 걸어두기도 한다. 때론 고인과 관계없는 이도 존경과 흠모로 만장을 바치기도 하였다. 조상들은 초상이 나면 만장을 써서 보내는 것을 큰 부의로 여겼고, 만장이 들어오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고인의 덕망과 학식을 논하기도 하였으니 상여에 앞세워 나가는 만장 행렬의 규모는 곧 고인의 사회적 지명도를 알려주는 척도였다. 다음은 성파 선생이 쓴 독립운동가 장지연의 만장이다.

① <장지연(張志淵) 만장(輓章)> 하동주(河東洲) 1921년作, 위암문고(韋庵文稿).
一夜長鯨徙窟宅 하룻밤사이 큰고래가 소굴로 옮겨와
五江風雨不時昏 다섯 강에 비바람부니 시절이 암담하지 아니하랴.
可憐民地終難醒 가련한 백성의 국토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는데
葉葉新聞總淚痕 종이마다 새로운 소식오니 언제나 눈물흔적 뿐.

[주] 오강(五江) : 지난날, 서울 근처의 한강(漢江)·용산(龍山)·마포(麻浦)·현호(玄湖)·서강(西江) 등 주요 나루가 있던 다섯 군데의 강마을을 이르던 말.

장지연(張志淵,1864년~1921년) 선생은 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렸고,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었다. 1909년 진주의 경남일보사 주필로 계신 동안 하동주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위 한시는 1921년 사망 時 많은 분들의 만장(輓章) 중에 하동주 선생의 7언절구 만장 詩이다. 위 한시 내용을 들여다보면, 1909년 장지연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일본을 큰고래로 비유했다. 당시 풍전등화 같은 우리나라의 상황을 훌륭히 묘사했고, 끝내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안타까운 울분도 읽을 수 있다.

② 성파(星波)의 편액 글을 본 감흥[扁額書觀有感] / 고영화(高永和)
筆蹤猶似秋史門 붓 자취가 마치 추사의 문체 같은데
筆意所到皆精魂 붓놀림이 가는 곳마다 정령이 담겼네.
散入樓閣作扁額 누각마다 흘러 들어가 편액을 이루니
奇才妙翰今古翻 기묘한 재주와 서법이 고금에 나부껴라.

③ 1919년 11월 18일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를 살펴보자. 경상남도 마산부 석정(石町)의 두 유소년 10세 박성찬(朴性瓚), 9세 정종수(鄭鍾秀)의 서예 명필에 관한 기사내용이다. 통영의 성파(星坡) 서백(書伯)의 제자[兩 幼年名筆, 統營의 星坡書伯의 弟子, 10歲 9歲兒의 어린 名筆]

“경남 마산부 석정(石町) 박종필(朴鍾弼)씨가 자녀에게 글씨를 가르치기 위해 선생을 초빙해서 동부 뇌주산정 추산정(趨山亭)에서 글씨를 교수하였는데 학습하는 아이가 6명이었다. 원래 선생은 통영군 거제면 하씨 성을 가진 분으로 호(號)가 성파(星坡)이고 조선의 명필 前 참판 김정희(金正喜) 호는 추사공(秋史公)의 제자 하지호(河志灝) 호(號)는 송곡공(松谷公)의 아들이다. 6살부터 그 선고(河志灝)의 전문으로 성과 한 추사공 서법을 배워 우금 40여년에 손에 붓을 놓지 않아서 필정(筆精)이 귀신이 드러났다. 옛 추사공(秋史公)과 송곡공(松谷公)과 지금 성파공(星坡公)의 글씨가 같아, 금고(今古 옛 것과 현재 것)를 구별하기가 서로 어려우니 과연 근대의 명필이다. 제자 중에 10살된 아이 박성찬(朴性瓚)과 9살 아이 정종수(鄭鍾秀)는 지예가 초월하여 습작한지 겨우 4달 만에 필법이 귀신같아 보는 자 마다 눈을 의심하니 미래에 명필가가 되리란 소문이 자자하다.”

   
 
④ 다음은 위 기사와 연관된 글이다. 일제강점기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원으로서 서화미술회가 발족할 때 이완용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비록 그가 민족반역자이긴 하지만, 그는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의 각 체 글씨에서 자유로운 필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1918년 민족미술가들의 모임이던 서화협회(書畫協會)가 결성되었을 때도 서예가로서의 평가와 당시의 현실적 상황이 고려되어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다음은 대정(大正) 9년 1920년경 이완용(李完用 1856~1926)이 서화미술회 회장 자격으로 하동주 선생에게 보낸 편지 내용인데, 박성찬(朴性瓚)과 정종수(鄭鍾秀) 두 아이의 어린 서예 명필을 기특하게 여기며, 이전(以前)에 하동주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 형식의 글이다.

[옛말에, “뜻이 맞으면 만나보지 않아도 서로 친하게 될 수 있다”하였는데 오늘날 그대와 나 두 사람을 두고 한 말과 같습니다. 비록 전날에 서로 만난 일은 없으나 이번에 먼저 선생의 편지에 반가워 황망(慌忙)할 따름입니다. 손수 받들어 읽어보니 마치 편히 합석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오늘 새벽같이 고요한 정신과 건강한 옥채와 온갖 복(福)을 받잡고 살아가시길 바라며, 저 이완용이 멀리서 우러러 기쁨과 함께 축하드립니다. 저는 쇠약한 몸이 날로 더하여 언제 진토가 될 런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박성찬(朴性瓚)과 정종수(鄭鍾秀) 두 아이의 글씨를 신문보도에서 본 것만으로도 매우 기특하게 여겨지는 터입니다. 진주 정운영(鄭雲暎)군이 죽고 그 아들 정종수가 상경하여 저희 집에 찾아와 다녀갔습니다. 면전에서 글씨를 시험하여 본즉, 그 운필하는 법이 멋을 부려 흥청거려 쓴 글씨가 비록 타고난 재능이라 할 수도 있지만 선생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미 여기에 이르렀고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 붓글씨가 한 문맥을 이루게 되리라 여겨지며 조금만 더 노력하면 크게 성공할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시작만 해놓고 끝맺음에 매번 어려움이 더러 있어 예측하기가 그러하여, 정군에게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해,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두세 번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선생의 글씨를 지금까지 몇 편 얻은 것이 있는데 앞으로도 우리 가문의 진귀한 보물로 남을 것입니다. 이에 다른 고마운 예(禮)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 1920년 11월16일 경성부 옥인동 19번지 이완용 배사. 경상남도 통영군 거제면 동상리 437번지 하동주 전].

[古語云意合則不見而相親果爲今日君我兩人而準備語也 雖無前日之相晤今承先施惠書忙 手奉覽恨如合席弟 謹審此辰靜體連 護萬禧遠用仰喜且賀 弟衰相日侵無定仰塵者也 朴鄭兩童之筆 俱從新聞上見之心甚奇之矣 晉州鄭雲暎君卒其允鐘秀而上京來訪鄙所故使之試筆於面前則其弄筆之法 雖是天賦之才若非先生之敎術何以至此 卽有此方則來頭成家謂事 半功倍而世上萬事有始而有終 每是難定故 再三勤勉於鄭君耳 先生之揮豪今有所得在幾片將作傳家之珍寶耳 餘不備謝禮.
/ 大正 九年 十一月十六日 京城府玉仁洞十九李完用拜謝 / 慶尙南道 統營郡巨濟面東上里四三七番地 河東洲 殿]

2) 성파의 제자들

(1)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1909~2001) : 경상남도 진주에서 활동한 서예가. 1909년에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아버지 정상진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부친이 건립한 비봉루의 현판을 쓰기 위해 서예에 입문하여 서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평생을 서예에 매진하면서 진주시를 벗어나지 않고 작품 활동과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였으며, 부친이 건립한 비봉루에서 활동하다가 1999년에 별세하였다.

진주의 비봉산 비봉루 건립 당시 청남 오제봉 스님(1908~1991)이 30년 동안 주지로 계신 의곡사에서 기거하던, 성파 하동주 선생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서예를 배웠다. 그것은 비봉루를 짓고 난 후 현판을 쓰기 위해서였다. 타고난 예술성으로 인해 곧 남다른 성취가 있었고, 그 때 쓴 경필이 아름다운 현판은 지금도 걸려있다.

은초 선생 문하에는 많은 후학들이 서예를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다. 정초에는 선생께서 직접 휘호를 쓰기도 하고, 시창 등을 하면서 신년의 흥취를 지인들과 나누었다.  70년대 후반에는 효당 최범술 선생과 더불어 진주 차인회를 결성하고 빈번한 차회를 가졌으며, 우리 차를 보급하고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많은 수행자들도 출입했는데, 그렇게 많은 묵객과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던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후덕한 은초 선생의 인품 때문이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입선하였고 수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950년대에 내고 박생광, 풍곡 성재휴, 운전 허민, 유당 정현복, 청남 오제봉 등과 교유하면서 진주미술협회와 영남예술제 창립에 기여하였다.

만년에는 추사체 특유의 강건함과 자신의 부드러움을 잘 융화시킨 독창적인 서체를 개발하여 튼실하면서도 부드러움을 드러낸 서체를 구사하였다. 작품으로는 해인사 「해탈문」, 촉석루 「남장대」, 「서장대」, 「진남루」 등이 있으며, 그 외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향년 91세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진주지역의 원로예술인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은 진주시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그의 서체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그래서 은초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고향의 강과 산을 대하는 느낌이다.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1909~2001)선생이 진주 의곡사에서 기거하던, 성파 하동주 선생 문하에서 서예를 배울 당시에, 현판 글씨를 쓰기 위해 해인사로 함께 간적이 있었다. 해인사 사찰에 걸려 있는 현판 글을 보고 성파선생이 감탄하며, “에이, 그 글씨 참 더럽게도 잘 썼네.” 하시며 멍청히 바라보다가 그만 넘어져 안경을 깨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 길로 “해인사는 나와 인연이 없다.”하시며 평생토록 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2) 김우동(金雨東 1931~1980) :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활동한 서예가로 자는 신원(信元), 호는 석천(石泉)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내당에서 아버지 김진영(金璡永)과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6세 때 유학자인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1978)으로부터 한자를,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로부터 서예를 사사받아 신동으로 불릴 만큼 글씨를 잘 썼다. 진주미협 부지부장, 서예분과위원장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동양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서법(書法) 연구에 노력하여 40대에 추사체(秋史體)와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융합한 독창적인 서법을 개발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경향 각지의 초대전과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가져 서예계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1980년 제30회 개천예술제 행사 중 과로로 타계했다.

(3) 춘포(春圃) 우종완(禹鍾浣) : 경상대와 동국대(東國大)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던 우종완(禹鍾浣) 교수는 추사(秋史)선생의 제자였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선생에게서 서예(書藝)를 익혔다. 추사서체(秋史書體)보존연구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4) 도연(陶然) 김정(金正 1906~1999) : 조선말 국권이 침탈당하고 일본의 총독부가 설치되어 초대 총독이 착임하는 해인 대한 광무 10년에 곤양면 성내리 128번지에서 출생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한학에 심취되어 다솔사에서 성파로부터 5년 정도 서예를 배우다가 북경유학을 떠나, 어학과 서도에 정진하여 15년 동안을 외유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성파(星坡)로부터 배운 추사체(秋史體)를 연구하여 대가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 후 향리에 은거하면서 김정산방(金正山房)을 차려 후진을 기르고 작품 활동을 했다. 

약력으로는 경남 미전 서예 심사위원과 경남도전 서예분과 위원장을 역임했고, 경남도전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만년까지도 사단법인 추사체연구회(秋史體硏究會)의 고문으로 일했으며 94세까지도 산방(山房)을 지키면서 역필(力筆)을 보여주었다. 도연의 서체는 은초와는 지극히 대조적이다. 서체는 활달하고 경쾌하고 파격적이다. 성격도 그의 글만큼 괴팍스럽고 직설적이었다.

(5) 청남(菁南) 오재봉(吳齋峯 1908∼1991) : 오제봉은 1908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일찍이 인생무상을 느껴 출가하여 승문에 입문한 이래 서예에 정진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415번지에 있는 의곡사의 주지로서 시인·묵객·화가·서예인 등 예술가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등, 향토예술인 양성과 후원에 남다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성파 선생에게 추사체를 배웠다. 오제봉은 향토문화위원으로서 진주지역의 서예문화를 중흥하는 데 앞장섰으며, 만년에는 부산으로 이거하여 서예실을 운영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946년 서울에서 조선미술동맹 창립과 더불어 조선미술동맹 진주지부도 설립되었다.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반발한 오제봉은 조선미술동맹 진주지부를 탈퇴하고 박생광(朴生光) 등과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216번지 청동다방을 사무실로 하는 문화건설대를 조직하였다. 특히 오제봉은 진주지역 문인과 묵객 등을 의곡사로 초청하여 무료 숙식을 제공하는 등 향토예술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49년 11월에는 설창수·박생광·이경순 등과 함께 전국적인 규모인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오제봉은 정대기·정현복·정명수·강주식·김창국 등과 함께 서예부문 행사를 주관하였다. 1963년에는 허백련·김은호·이상범·김기창·임호·배길기 등과 유명작가 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예향도시 진주 건설에 앞장섰다. 이후에도 개인전과 초대전을 개최하는 등 작품 활동과 전시회를 통한 시민의 정서함양에 열성적으로 노력하였다.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 개최나 시인과 묵객 등 예술인에 대한 오제봉의 지원은 진주를 예향의 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제봉은 설창수·박생광·조영제·정현복 등과 이러한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진주를 예술문화의 도시로 건설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청남선생은 원래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말년 부산으로 이거하여 서예중흥에 앞장서신 영남의 대표적 서예가이다.

   
 
3) 추사체 전수 경로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1856)의 추사체(秋史體)는 "흉중(胸中)에 고아청고(高雅淸高)함이 없으면 예법(隷法)을 쓸 수 없고 흉중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흉중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아니하면 나타낼 수 없다"하여 예서를 서(書)의 조가(祖家)로 보았다. 이처럼 모든 대가들의 장점과 다양한 서체를 집성하여 스스로 독자의 서법을 이룬 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박규수(朴珪壽)는 추사체의 독특함에 대해 "신기(神氣)가 내왕하여 마치 바다와 같고 조수처럼 보인다"라고 언급했다.

 성파와 추사의 필적이 웬만한 감식안(鑑識眼)으로는 구별조차 못할 정도로 비슷하다는 점과 20 여년 전에 작고한 성파의 제자 청남 오재봉 선생이 9년 동안 성파공을 모실 때에 공은 항상 추사서첩 위에, 유리를 덮어 놓고 흠모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남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성파는 어떤 경로이든 ‘추사서첩’을 얻어서 이를 바탕으로 해서 추사체를 공부하였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인다. 성파선생의 필적이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이루지 못한 점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서예역사상 신필(神筆)이라고까지 존경하던 신라시대 김생과 쌍벽을 이루는 추사 김정희 글씨를 공부한, 제 일인자라는 점에서 국내 서단(書檀)에서 언제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은초와 도연, 청남 오재봉은 거제출신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1869∼1944) 선생의 문하생이었다. 성파는 평생 추사서첩을 소매 자락에 넣고 다니면서 스스로 추사체를 익힌 서예가이다. 제자들이 한결같이 추사서첩은 그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전하니 성파의 아버지 하지호가 어떤 경로인지는 몰라도 서첩을 입수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 <거제시 진양 하씨 하광열 세무사가 확인한 증언>
거제면 사무소에 보관된 제적부(除籍簿)에 성파선생의 출생연도는 조선개국 478년 2월1일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개국 원년이 1392년이니 이때부터 한산하면 고종 6년 1869년이 된다. 또한 성파 하동주 유묵집에 수록된 수많은 병풍, 비문, 주련, 족자 등을 살펴보면 대부분 그 글씨를 쓴 해의 나이 다음에 바로 성파 하동주라고 쓰고 낙관(落款)을 하였는데 다행히 쓴 해의 간지(干支)와 나이를 함께 표시한 2점의 작품에는 “임오 74작” “경진72성파”라고 해놓아 간지를 계산하면 경진년 1940년 72세 임오년 1942년에 74세가 되려면 1869년 기사년 생이라야 한다. 또 성파선생의 아들 정략의 요절(夭折)로 선생이 손수 키우고 공부시킨 손자 하형모씨가 1983년 세운 할아버지 상파의 묘지석에도 1969년 생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출생년도는 1869년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 그렇다면 추사서첩의 입수 경로를 추정해 보도록 하자. 그 당시 당대 인물들, 김정희 정혼성 하지호 하동주의 연보를 고려한다면, 서로 간에 시대적(연령 직위 거처 등) 상황이 맞지 않아 어떠한 연결고리도 찾기 어렵다. 단지 진양 하씨(晉陽 河氏) 세보에 기록된 하지호(河志灝 1827~1886)의 관직이 장사랑(將仕郞 종9품 문관)인 점을 고려해, 지호공의 나이 36세 때인, 1862년 추사의 수제자이자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1810~1888)에게서 입수 받았을 확률이 가장 크다. 이 당시 한산도 제승당과 통영의 세병관에 현판을 남겼고, 경남 고성군 옥천사의 <자방루(滋芳樓)>와 자방루 마루에 걸려있는 <연화옥천(蓮華玉泉)>이라는 편액도 썼다. ①이때 선천적인 서예의 기질을 타고났고 글씨에 조예가 깊었던 문관9품 하지호가, 상관인 통제사 신관호를 만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② 또 한편으론 추사 김정희 선생이 거제학자 동록 정혼성 선생의 문집을 읽고 감동하여 쓴, ‘정동록 혼성문집 뒷면에 쓰다[題鄭東麓渾性文集後]’, ”자고의 시격에다 채진의 놀음이라 열 자의 황진 속엔 두각(頭角)을 내지 않아 후파(侯芭)를 힘입어서 일판향(一瓣香)을 전수하니 옛날의 기주에는 현정이 적적하이.[鷓鴣詩格采眞遊 十尺黃塵不出頭 賴有侯芭傳一瓣 玄亭寂寂古岐州]“ 7언절구가 전하는 바, 이때 거제도로 추사서첩을 보내주었고 이를 제자 하지호에게, 다시 성파 하동주 선생에게 전해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③ 그리고 마지막으로 1881년 거제도로 유배 왔던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1814~1888)에게서 추사서첩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2002년 거제시지에서 언급하길, “일찍이 추사 김정희의 휘하에서 십가장(百家長) 또는 백가장(百家長) 벼슬을 하면서 글씨를 잘 써서 추사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 때 추사의 서첩을 입수해 가져와서 아들 하동주에게 추사체를 전수케 하였고 이후 추사체를 이어받게 되었다. 해서체(楷書)에 뛰어났고 선천적인 필체는 성파보다 더 나았다고 한다.”

거제시지 내용은 추사 선생께서 병조나 형조참판을 지낼 때, 또는 제주 유배 시절에 지호공이 “군관으로서 추사를 모신 적이 있었다”는 가설(假說)에서 기초한다. 추사가 형조 병조 등 참판을 지낸 시기는 1836년에서 1839년으로, 父하지호가 9살에서 12살 때에 해당되며, 제주 유배시절인 1840년에서 1848년은 13세와 21살 때로서, 전자의 경우 연령상, 후자의 경우는 지리적으로나 연령상으로 연결고리를 찾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바, 이는 구전(口傳)에 따라 기록한 글로 보인다. 십가장(百家長)∙백가장(百家長)이란 명칭도 이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일제강점기 만주 독립운동 때 널리 사용한 단어이다.

어찌되었건 현재까지 추사서첩의 입수경로는 어떠한 문헌과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아 뚜렷이 밝히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나, 추사의 수제자 위당 신관호를 통해 하지호가 입수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어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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