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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포 만호(萬戶) 차좌일(車佐一)의 거제도 한시(漢詩)[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거제도 지세포 만호를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항시인(閭巷詩人)의 한사람인 차좌일(車佐一 1753∼1809)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숙장(叔章), 호는 사명자(四名子)이다. 조선중기 시성(詩聖)으로 불리었던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차윤태(車潤泰)인데 그 역시 그림‚ 음률‚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 백씨(白氏)가 그를 잉태하였을 때 하지장(賀知章 659~744, 당나라의 시인)을 꿈에 보아 그의 자와 호를 따라 지으니 자연히 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고 술과 시문으로 소일했다. 또한 소식(蘇軾)과 유종원(柳宗元)의 흔적도 시편에서 자주 보인다.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서화나 음률·사예(射藝)에도 뛰어났다. 특히 시를 잘하여 당대의 문장가였던 홍양호(洪良浩)·윤행임(尹行恁)·윤사국(尹師國)·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함께 하여 시를 지을 정도였다.

재주는 뛰어나지만 관직이 한미하여, 만년에야 마지막으로 변방의 만호(萬戶)라는 무관말직(武官末職)에 머물렀던 만큼 세상에 대한 불평의 뜻이 많았다. “살아서는 취향백(醉鄕伯), 죽어서는 수문랑(修文郎).” 즉, “살아서는 몽롱한 취중(醉中)에 여생을 보내고, 죽어서는 학문이나 문학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그의 시(詩)에서, 시와 술에 경도되었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또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이 나라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世世生生 不願爲本方人)”는 하소연은 조선의 제도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는 40세를 지나서야 노계(老計)를 위해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1795년 9월부터 수어청 소속 교련관(守禦廳分屬敎鍊官)으로 근무하다가 1799년 1월 47세에 경남 거제시 지세포 만호(知世浦萬戶 종4품)로 제수(除授)받고, 지세포(知世浦) 및(兼) 두 포구(二浦)를 관장하게 되었다. 1799년 2월 18일 수군통제사 임률(任嵂)이 차좌일이 기일 내에 지세포 만호로 부임하지 않았다는 장계를 보내와, 파면하고 충군하자고 건의 했으나, 2년 전에 이조참의를 제수 받고 기일 내 부임하지 못해, 금성현(金城縣)에 유배된 적이 있었던 승지 이면긍(李勉兢)이, “이전부터 앓고 있던 병으로 지체되었으니 선처해야한다”고 건의해 무사히 부임할 수 있었다. 또한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그는 동생과 두 아들이 죽은 뒤 더욱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당시 변방 거제시 지세포 만호의 직책으로 1년 이상 근무하면 서울에 집을 한 채씩 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출세를 위해 윗사람에게 상납하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의 신념에 따른 삶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선생은 무관으로 출사하기 전인 1786년 한양에서 천수경(千壽慶)·장혼(張混)·왕태(王太)·최북(崔北) 등과 더불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옥계시사)’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관직을 사직한 1800년경부터 다시 이 모임의 主회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처지는 물론,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대한 비분과 고뇌를 시(詩)로 풀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809년 오랜 지병으로 인해 57세로 사망했다.

시집으로는 『사명자시집(四名子詩集)』이 전한다. 그의 시는 유재건(柳在建)이 편찬한 『풍요삼선(風謠三選)』과 일본인 아오야마[靑山好惠]가 편찬한 『명가시집(名家詩集)』에도 실려 있다. 그의 ≪사명자시집(四名子詩集)≫ 문집 본문에는 五言絶句 9수‚ 五言律 111수‚ 五言排律 14수‚ 五言古詩 23수‚ 六言絶句 2수‚ 六言律 6수‚ 七言絶句 30수‚ 七言律 154수 七言排律 2수‚ 七言古詩 4수‚ 古賦辭 1수 등, 356수의 시가 실려 있다. 그러나 행장(行狀)에서 "공은 평생 동안 책을 지었는데 수레에 실어 운반하면 소가 땀을 흘리게 되고, 쌓아올리면 들보에 닿을 정도의 양이었으나 내버려두어 없어졌다.(公平生著作幾可以汗牛充棟而棄擲散佚)"라 한 것으로 보아 『사명자시집(四名子詩集)』은 그의 저서 일부분임을 알 수 있다.

   
 
1) <충군에 앞서 되는대로 짓다.[充軍日漫成]> 지세포 만호 부임이 지체되어.
七百咸陽四日强 칠 백리 함양 길을 나흘에 빨리 걸어
如期莅任入商量 기약된 날짜에 들어서려 했건만,
無端暴疾來爲祟 뜻밖에 만난 병이 빌미가 되어
有限嚴程去來遑 나라에서 정한 날까지 닿지를 못했네.
自犯大罪惟分死 내 지은 죄가 커서 죽어 마땅하니
豈料寬典止投荒 어찌 용서를 바라랴만 험한 부역 치르라네.
南方不可留人些 남쪽 땅 이곳은 사람 살 곳이 못되어
蠻雨蜑雲摠斷腸 눅눅한 비구름이 창자를 끊는구나.

◯ 1799년 2월 18일, 수군통제사 임률(任嵂)의 장계에, 지세포 만호 차좌일(車佐一), 구소비포 별장 정홍철, 부임이 지체되어 파면 후에 충군하자는 내용을 보내왔다. 이면긍(李勉兢)이 전교(傳敎)하기를, “이전의 병으로 지체된 것이니 용납하고 용서해 주소서. 장계를 다시 돌려보내시고 그 죄를 가려 선처하소서.”(以統制使任嵂狀啓 知世浦萬戶車佐一 舊所非浦別將鄭弘喆 赴任遲滯 罷黜後充軍事 傳于李勉兢曰 旣云因病滯 容有可恕 狀啓則還下送 勘罪分揀)하였다. 차좌일은 족종(足腫) 즉, 발이 자주 붓고 통증이 심한 지병이 있었다. 이에 부임이 며칠 지체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2년 전에 이조참의를 제수 받고 기일 내 부임하지 못해 금성현(金城縣)에 유배된 적이 있었던 승지 이면긍(李勉兢)이, “이전부터 앓고 있던 병으로 지체되었으니 선처해야한다”고 건의해 결국 무사히 부임할 수 있었다. 차좌일(車佐一)은 최소 1여년 이상 지세포 만호로 근무하다가 술로 인한 지병이 끊이질 않아 사직하고 한양으로 돌아갔다.

 2) <지세포[知世浦]> 차좌일(車佐一 1753∼1809)
一日難居知世浦 지세포에서 하루하루 지내기가 힘들어
更將何事可消憂 장차 무슨 일로 시름을 달래야 할까?
印文生綠塵留硯 인문에 쓰는 벼루엔 생긴 먼지만 차곡 쌓이는데,
不獨當年柳柳州 올해는 유유주처럼 외롭지는 않아 다행이다.

이 한시는 먼 변방 지세포에서 공무를 수행하면서, 외로움과 울적한 심사를 나타낸 글이다. 당(唐)나라의 문호(文豪) 유종원(柳宗元)이 변경으로 좌천되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한 고독한 시인이었다. 차좌일은 자신의 처지와 닮은, 소식(蘇軾)과 유종원(柳宗元)을 사랑하여, 그들과 닮고자 노력한 흔적이 그의 저서 곳곳에 나타난다.

[주1] 인문(印文) : 찍어 놓은 도장의 흔적.
[주2] 유유주(柳柳州) : 중국 당나라 시인, 혁신적 진보분자로 변경지방으로 좌천됨.

◯ 조선후기 경상우수영자료에 따르면, 차좌일이 만호로써 거제시 지세포진영(知世浦鎭營)을 관장하던 1800년경, 소속 수사교졸(수군인원) 진하(水師校卒 鎭下) 즉, 진영에 상주하는 수군 223명이 있었고, 관할지역에 파견 경계 근무하는 각색교졸(各色校卒)인 별봉수(別烽燧)망장(望將)3명, 봉수군(烽燧軍)10명, 눌일곶망(訥逸串望)20명 등, 총33명이었다. 그 외 지금의 예비군에 해당하면서 군포를 부담하는 방군(防軍)1200명, 무학(武學)212명, 첨격무학(添格武學)24명, 기타 진하(鎭下)13명이 있었다. 당시 지세포 만호(萬戶)가 관리한 지역은 현재 거제시 일운면 전 지역이었다.

   
 
3) <지세포를 지키면서 [知世浦雜詩] 3首> 1799년作.
倭船來日日 왜놈들의 배는 날마다 드나들어
迎送卽乘潮 밀물을 타고서 왔다 간다.
幸則楊洲近 다행이도 양주가 가까운 것은
不然多浦遙 다대포가 멀리 있지 않아서겠지.
營關吾膽落 수영을 지키는 내 간담이 서늘하니
鎭棍吏魂消 진영을 지키는 관리들의 혼도 녹아나리라.
所愧爲人役 부끄러워라! 남들에게 부림 받으며
低頭更折腰 고개를 숙인 데다 허리까지 굽혀야 했으니.

採採蛤蔘蝮 조개 인삼 큰 뱀을 채집하여
輕舟趁退潮 가벼운 큰 배에 조류를 따라 싣고 나간다.
帶瓢還泛泛 장식이 있는 바가지도  범범히 돌아오는데
沉水更遙遙 침수(침향)약으로 언제 내 병이 났겠는가?
果腹醪常煖 과한 술로 배에 열이 계속 이어지고
煨身火未消 몸에 난 열이 사라지지 않는구나.
終年勤苦甚 과한 공무로 한해가 지나가니
猶不飽長腰 긴 허리만 잘록해 졌다네.
吾有百强弩 나에게 큰활과 백 개의 화살이 있는데도
朝來欲射潮 아침부터 조수가 활처럼 밀려온다.
殺湍陻水去 죽일듯한 급류가 가는 물도 막고
濬澮距川遙 깊은 봇도랑 먼 하천도 가로 막네.
萬頃良田起 아주 넓은 비옥한 땅을 일구면
千年大害消 천년의 큰 근심이 사라질 것이다.
經營而已矣 다만 경영만이 있을 뿐이니,
弧矢謾橫腰 활과 화살을 허리에 찬지도 까마득하다네.

4) <하늘을 향한 만사[于天輓辭]>
晩歲襟期在卜鄰 만년에 품은 회포, 이웃을 헤아리며
酒杯詩卷送餘春 술잔과 시집으로 남은 봄을 보낸다.
寰中樂事難如意 세상의 좋은 일이 내 마음 같지 않는데
峽裏翻驚夢裏人 깜짝 놀란 바다 골짜기, 꿈 속 사람이어라.

5) <타향에서 노닐며[出遊]>
扶風縣北路逶迆 고을 북쪽 세찬바람에 길은 구불구불 굽이지는데
淅瀝秋容遠客悲 가을철 비바람 소리가 먼 길 나그네의 슬픔을 울린다.
野稻經霜田父集 들판의 벼에 서리 내리니 농부가 모여들어
陂塘過雨釣徒嬉 저수지에 비 그치니 낚시꾼이 기뻐하네.
酒因酩酊盃頻討 곤드레 취한 술에 술잔만 자주 찾으면서
詩爲推敲字屢移 시문의 자구(字句)를 여러 번 다듬는다.
萍水相逢須盡興 우연히 서로 만나 모쪼록 흥이 다할지니
異鄕何必淚長垂 하필 타향에서 눈물 흘릴 것이 뭐람!

6) <우음[偶吟]> 五言律
平生癖於酒 평생 동안 술버릇,
浮拍任顚冥 비몽사몽간에 덩실덩실.
輾轉無何飮 일없이 뒤척이니 마시고 싶을 뿐,
須臾不願醒 부디 잠시라도 깨지 말기를.
鴨頭千頃綠 오리 머리 같은 강물 천이랑 푸르고
竹葉四時靑 대나무 잎은 사시장청 푸르네.
鯨飮眞吾事 술고래가 바로 나의 일상이니
聊令後世聽 애오라지 후세까지 듣게 되리라.

7) 족종(足腫)이 있으니 술을 끊으라고 당부하기에 장난삼아 답하다.[有足腫或戒止酒 戲答] 二首 五言律.
曾讀軒岐術 일찍이 헌기(軒岐)의 의학책을 읽었는데
元無禁酒方 본디부터 술 끊는 처방은 없었다.
生爲醉鄕伯 살아서는 몽롱한 취중(醉中)에 여생을 보내고
死作修文郞 죽어서는 학문이나 문학에만 전념하고 싶다.
足病今何有 발병이 요즘 어디에 있나뇨.
身名久已忘 건강과 명예 이미 잊은 지 오래이니
對君須痛飮 그대와 진탕 술이나 마셔볼까
內耗外應良 속은 썩어도 밖으로는 어질어야지.
對症要投劑 병의 증세에 따라 긴히 약을 처방해야 하는데
醫言不可聽 의원이 말하길, 살필 수가 없다네.
須先治厥本 모름지기 그 근본을 다스린다면
然後養其形 그러한 뒤에 그 형태가 치료되리라.
始乃狂爲祟 그래서 빌미를 제공해 덧나다가
終焉醉未醒 완쾌되었는데도 술은 아직 깨지 않네.
世間無別法 세상에 특별한 법은 없다지만
盥手讀黃庭 손을 씻고 황정경(黃庭經)을 읽는다.

[주1] 족종(足腫) : 오래 걷거나 하여 뼈 또는 근육이 피로해서 일으키는 척골(蹠骨)의 외상성 질환. 발붓기  
[주2] 헌기술(軒岐術) : 고대 중국에 뛰어난 의술을 가진, 황제헌원(黃帝軒轅)씨와 기백(岐伯)이 기록한 의학책.
[주3] 황정경(黃庭經) : 도교(道敎)에서 쓰는 경문이나 경전.  위부인(魏夫人)이 전한 《황제내경경(黃帝內景經)》, 왕희지(王羲之)가 베껴서 거위와 바꾸었다는 《황제외경경(黃帝外景經)》, 《황정둔갑연신경(黃庭遁甲緣身經)》, 《황정옥축경(玉軸經)》의 네 가지가 있다.

8) <박경로(朴景老)가 방문하여 당인의 운자를 뽑아 읊는다.[景老來訪拈唐人韻]>
偶然爲客落南州 우연히 남쪽 고을에 떨어진 나그네 되어
豈意萍鄕學子遊 시골 부평초로 떠도는 학자가 될 줄 어찌 알았으랴.
酒外那知錢入手 술 외에 돈 버는 것 어찌 알랴마는
世間堪恨雪盈頭 세상의 한(恨)을 견디니 머리에 흰 눈만 가득하네.
斜陽客至情如水 해질녘에 손님이 왔는데 정(情)이 깊은 물 같고
海國冬來歲似流 섬나라에 겨울이 오는데 세월이 유수와 같고나.
健筆雄詞吾不及 웅건한 문장과 필적에 나는 따라갈 수 없으니
空慚四十一春秋 공연한 사십년의 또 한해가 부끄럽구나.

그의 친구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박경로(朴景老 文養)가 찾아오니, 당(唐)나라의 문호(文豪) 유종원(柳宗元)의 ‘우(尤)’[州遊頭流秋] 운자(韻字)를 선택하여 7언 율시를 지었다. 변방인 경남 거제도 지세포만호로 발령받고 외로운 남쪽 나그네 되어 지은 시인데, 당인의 문장(유종원柳宗元)에 못 미치니 40년 공부가 부끄럽다고 적고 있다. 당시 조선후기 거제도에서 수군만호를 1년 하면 서울에 집을 한 채 살 정도로, 만호 관할 內에서, 각종 이권을 챙기는 무관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세를 위해 윗사람에게 상납하고 잇속을 챙기는 현실에 탄식하고 이를 온 몸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차좌일은 평생 그의 삶속엔 술과 시문만 있을 뿐, 세속의 권력•명예•돈은 관심 밖이었으니 그의 일생이 어떠하였는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 특히 차좌일(車佐一)은 유종원(柳宗元)과 소식(蘇軾)의 시문을 좋아했다. 그러한 이유는 그들과 자신이 시대는 달라도 시문(詩文) 속에 내포하고 있는 삶의 의미와 철학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시(詩), 사(詞), 서예(書藝)에도 능했으며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정치적으로 수많은 고난과 영광을 겪었다. 시골에서 자신이 경작하던 땅을 '동파(東坡)'라 부르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했다. 정치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고, 유배생활과 은거생활을 반복하며 자신의 울분과 한탄을 〈적벽부(赤壁賦)〉라는 탁월한 시로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유종원(柳宗元)은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 능했는데,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다.
차좌일(車佐一) 또한 몰락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서화나 음률·사예(射藝)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왔으나, 빈번히 정계 진출이 어려웠다. 그나마 40세가 넘어서야 무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중앙정부 요직에 나아가기에는 사회현실과 자신의 한계가 있어 결국 사직하고 만다. 가난에 못 이겨 동생과 두 아들을 잃고 난 후에는 조선의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울분과 한탄을 토해내며 일생을 마쳤다.

   
 
9) <천수경(千壽慶 善韻)에 차운하여[次君善韻]> 七言律
春風此日共登臨 봄바람 부는 오늘 함께 올라 바라보니
松石名園箇裏深 이름난 송석원 깊고도 그윽하네.
已喜坐中無俗客 좌중에 속객이 없음을 기뻐하노니
誰知境外有詞林 경외에 시단이 있는 줄 뉘가 알랴.
淋灕可愛盃樽趣 풍성한 술자리 정취는 사랑할만하고
跌宕自成山水音 질탕한 산수의 소리 절로 생겨나네.
物誘年來忘亦久 재물의 대화는 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秋毫何足動吾心 어찌 털끝이라도 내 마음이 동요되리오.

‘천수경(千壽慶 善韻)에 차운하여[次君善韻]‘ 위 시를 살펴보면, 시사의 좌장 천수경과 여러 문인들이 함께 인왕산을 올랐던 모양이다. 자신들은 권력 재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고 속물적 근성을 가진 속객과 구별된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소외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심정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은 다른 계층의 문단과 구별되는 시단(詩壇)임을 밝히며, 선생은 세속의 물욕에서 초탈하려는 다짐으로 시를 마무리 하였다.

천수경과 특히 가까운 사이였던 차좌일은 사대부 사이에서 시문으로 널리 인정을 받았는데, 40세가 넘어서도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고 무과에 급제한 것을 보면, 집안이 몰락해서 신분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명승지를 찾아 두루 유람을 하며 술과 시 노래를 즐기다가도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이 나라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世世生生 不願爲本方人)”고 읊은 것은, 그의 불행했던 가족사에 줄곧 비관하였고 또한 몰락한 사대부의 후손으로, 더 이상 출세가 어려운 조선의 사회제도를 냉소했기 때문이었다.

◯ 차좌일(車佐一)이 창립 회원이었던 유명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는, 위항(委巷)문인들의 문학단체로, 1786년 7월에 천수경(千壽慶)이 인왕산 기슭의 시냇물 송석원(松石園)이 있는 옥계(玉溪), 즉 옥류동에서 몰락한 사대부와 중인(中人)계층인 차좌일(車佐一), 장혼(張混), 조수삼(趙秀二), 박윤묵(朴允默), 김낙서(金洛瑞) 등 13명의 시인들과 함께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이 시사는 장안의 화제가 되어 문인들이 초청받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겼으며,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큰 백일장도 열었다 한다. 이 시사 이름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또는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이 모인 곳이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에 있음으로 서사(西社),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도 불렸다. 또한 차좌일은 송석원시사(宋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여항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다. 1786년 시사(詩社)의 창립 회원으로써 적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이후 약6년 간 관직생활 동안 잠시 소원(疏遠)해 있기도 했다. 지세포 만호 관직을 마지막으로, 1800년경부터 1809년 사망할 때까지 명승지를 찾아 여행을 하다가도 시사(詩社) 때에는 매번 참석하여 시단(詩壇)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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