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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우리문화 석전(石箭)놀이[거제향토사] 거제향토사연구소 이승철

   
 
석전(石箭) 놀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편을 갈라 돌맹이를 던져 싸우는 투석(投石)전을 말 하는데, 이것을 돌싸움 혹은 편싸움이라고도 한다.

거제지방의 석전은 이런 것과는 전연 다른 놀이로 돌을 던져서 과녁을 맞히는 놀이다. 그래서 석전(石箭)이라 하기도 하고 척사(擲射)라 하기도 한다.

이 놀이는 남자아이들이 돌팔매질로 과녁을 맞히는 놀이가 발전된 것이라 하나, 거제지방에 이 놀이가 성행하게 된 것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전쟁에서 돌팔매질로 과녁 맞히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전쟁에서 돌팔매질은 중요한 곡격수단의 하나였다.

상고의 역사를 볼 때 삼국시대에 투석놀이에 임금이 직접 참여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도 돌팔매질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투석군(投石軍) 혹은 투석반(投石班)이라 하였다고 하여 군대조직으로 편성되었다.

ㅇ거제의 석전(石箭)놀이 원류
거제의 석전 놀이는 서기 1170년 고려 제18대 의종왕이 상장군 정중부의 숭문주의에 반란을 일으켜 거제군 둔덕면 거림리에 유배(流配)되어 거림리 기성현에 거주하였다. 여기 살면서 변란이 두려워 하둔 마을 입구에 방어성지를 축조 하였다. 그 곳을 여관(麗關)이라 한다.

기성현 뒤에 신라 때 축성한 성이 있다. 이 성을 기성(岐城)이라 한다. 의종왕이 기성현에 피난 와서 살았다고 폐왕성(廢王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때 의종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안에 바닷가 몽돌을 가져와서 적을 방어 하는 석전의 무기가 되었다고 한다. 2015년 기성 발굴 조사에서 많은 몽돌이 나왔다.

서기 677년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17년 축성하였다는 아양(鵝陽) 당등산성(堂嶝山城)과 그리고 1873년 이조 제26대 고종(高宗) 10년에 축성한 옥산금성(玉山金城)은 몽둘이 쌓여 있는 대표적인 성이다.

거제의 석전은 전술을 연마하고 방어를 위하여 1592년의 임진란 후부터 군병 놀이를 한 것이 오늘까지 전승(傳承)된 석전의 민속놀이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1963년 당등산 정상에 그 당시 거제교육감이 였던 신용균 교육감이 옥포대승첩 기념탑을 건립하여 매년 5월 7일에 옥포대승첩 기념제를 군민의 문화 행사로 해 오고 있었다. 그때부터 석전놀이가 재연되어 아주 해변과 아주 들판에서 해오고 있었다.

석전 놀이는 20m거리에 길이 2m, 직경 6㎝의 철봉(鐵棒)을 매달아 돌을 던져 맞히는 경기이다. 예전에는 대나무 통을 매달아 놓고 그 통을 맞히는 경기를 하였다. 개인 또는 5인 단체전으로 1인 10개씩의 돌을 준비하여 1회에 5개씩 궁도 방식으로 순번 따라 돌을 던진다.

이 석전 대회는 반드시 기생의 춤과 노래로 흥을 돋구며 명중하면 다음과 같이 기생이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었다.

전반전 5개의 석전으로 첫 번째 돌이 명중하면 「하모(何某) 1시(화살矢)초에 관중(貫中)이요」
두번 명중하면 「하모 2시에 지화자, 지화자」
3중하면 「하모 하시(何矢)에 꽃바라, 꽃바라」
4중하면 「돈바라, 돈바라」
5시가 모두 명중하면 「하모 5시 5중이요……」라 기생이 노래를 부르며 주효(酒肴)를 권배(勸盃)한다.

이조 말엽의 태평성시는 1등에 황소(黃牛) 한 마리를 주는 큰 상이 있었다. 그 만큼 큰 행사 였다. 석전놀이는 각 읍면 단위로 널리 보급되어 왔으며, 1990년 초 까지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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