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끝
박춘광
칼끝이 사람을 향하면 필연적으로 피를 부른다. 용도에 따라 그 사용이 다르기도 하지만
생사여탈을 좌우하기도 한다. 지금 칼끝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심정은 형언하기 어렵다. 마치 살아 온 역사의 심판대에 선 그런 참담함만 있다.
호젓한 마을 뒤쪽으로 난 숲길을 걷는다. 발아래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가 오늘 따라 정겹다. 능선의 아름다운 자태 위로 아직 넘어가기에는 아쉬움이 많은지 석양이 붉게 하늘을 물들이며 미적거린다. 고요한 저수지에 아파트촌의 그림자가 길게 드러누웠고, 수면 위에 뜬 나뭇잎들도 빨갛게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새로 들어선 전원주택의 정원엔 멋스러운 나무와 탐스러운 국화가 만발해 보는 이의 정취를 한층 더 높여준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껴가는 가을이다. 이 가을은 나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준다. 심호흡을 크게 하며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얼마나 좋은가. 올해처럼 무더웠던 여름이 또 있었을까. 잊고 싶었던 악몽의 시간들이 지난 여름이었다. 돌아보면 어느 인생인들 후회 없는 삶이 있을까만, 아쉬움에 유독 눈물 흘리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가, 무슨 일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말할 기회가 온다면 기쁘게 털어놓을 수 있어야 겠다. 사람은 살아가는 유기체지만 언젠가는 종말을 고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지금부터는 한 순간도, 단 하루도 의미 없이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기고 또 되새긴다. 다리에 힘을 준다. 아직은 몸 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오지 않아 힘에 부치는 산책이지만 숲길을 따라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걸으며 몸을 단련시킨다. “위암세포의 위치가 상부인 기저부에 있어 전 절제가 불가피 합니다.수술준비 잘 하세요.” 의사의 선언에 좌절했다. 아니 절망했다. 초기 상태라 너무 염려할 게 없다 하지 않았는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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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청면 성동마을 산책 숲길 |
어떻게 해야 하나. 위를 전부 절제해야 한다는데,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병원을 나와서도 내내 머릿속이 복잡해 괴로움은 더했다.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의사는 냉정히 답한다. 조금 살리려다 재발해서 위험지경에 이르면 되겠는가. 더 할 말이 없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전부 매정하고 낯설어 보였다.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나를 매몰차게 외면하는 것 같았다. 거리의 찬란한 불빛도 슬프게 느껴졌다. 철저히 홀로 황야에 내팽개쳐진 듯 고독감이 나를 휘감았다. 비가 내릴 듯 하늘이 잔뜩 흐렸다. 저 산도, 저 언덕도, 저 들판도, 무성한 녹파도,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물이 다 야속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슬픔을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건강검진을 한 후 의사가 나를 불렀다. 위에 궤양이 있으니 조직검사를 해봐야겠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 일파만파였다. 설마했던 일이 큰 병원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치 영화 속 이야기 같은 사실에 전율했다. 집에 도착해선 잠든 아내가 알까봐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초라한 얼굴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우는 것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얼마나 묻고 또 물었는지 모른다. 치료과정에서의 전이나 합병증이 나를 더 자극한 탓이었다. 암이라는 불치병으로 몸이 무너지고 있어도 희망을 가져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것은 가능성의 기대라기보다 목적과 의미를 채워야 하는 시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저 하늘을 한번이라도 더 바라보자. 아름다운 세상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자는 생각에 이르자 떠오르는 태양도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호젓한 이 산길도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수술 잘 받고 관리 잘하면 큰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위로들을 했다. 그러나 허전한 마음은 한동안 공허로 가득했다. 이젠 암과의 전쟁이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독함이 생겼다. 수술을 받는 날, 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수술실로 향했다.19번 수술실. 어쩌면 복도의 끝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긴 다리가 아닌지. 방정맞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복도를 밝힌 형광등 도열이,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소 달구지 형틀에 매달아 형장으로 가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망나니가 막걸리 한 사발 들이마신 후 장도에 내뿜던 영상이 떠오른다. 생명을 앗아가기 위한 무자비한 장도와 나쁜 암세포를 도려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메스가 겹친다. 나라를 구하고도 마녀 재판의 희생양이 되어 단두대에서 결국 화형을 당해야 했던 잔 다르크가 느낀 전율과 처절함도 이랬으리라. 휠체어와 소달구지와 단두대만 다를 뿐 칼끝 앞에 있는 운명은 다 같이 비참했다.
수술대에 눕는다. 환한 불빛이 부셔 눈을 감았다. 한껏 들여 마시란 말을 끝으로 기억이 없다.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의료진의 노력 덕분으로 여섯 시간이란 집도 끝에 평소 건강관리를 잘 못해온 한 인간이 구제된 것이다. 더벅머리 망나니는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귀한 생명을 앗아갔지만 인술로 승화된 현대의학은 꺼져가는 생명을 지켜주었다. 대면했던 실존적 문제를 마주 하고 난 후 안도감이 평온을 유지시켰다. 기로에 서서 앞에 보이는 거라곤 끝도 없는 사막뿐이었는데, 일순간 모래폭풍의 흔적을 남기긴 했으나 구출되었다. 상처는 아무리 태연하려 해도 흔적이 남겠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리라. 생명을 구한 칼끝의 이념처럼. <전 거제타임즈 대표/ 현 본사 편집인 겸 사장/수필가> |
박춘광 nngpar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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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하는 여학생을 남학생이 도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