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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1128년 거제 3속현의 항쟁[연재]고영화의 거제산책

   
 
거제의 유구한 역사는 한마디로 "주변부(변방), 해양성(섬과 바다)"인 '주변적 인식'이나 '변방적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고려중기 1128년, 개경정부에서 고대로부터 한·일 해상교류의 거점이자 교통로인, 거제도 남동부해안 명진현(거제면)·송변현(남부면동부면)·아주현(일운면, 장승포읍)에 거주하던 거제해상민족을 해적으로 단정하여 투항케 만들어, 약 820명을 합천 진주 등지로 분산, 강제 이주케 한 안타까운 역사가 있었다.

거제 남동부는 중앙정부에 예속되지 않은 해상민족이 고대로부터 이어오다, 이 사건을 계기로 거제해상민족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대마도, 일본과의 유대관계가 소멸하기 시작하였고, 소위 '왜구'라 불리는 해적이 보복성 약탈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700년대까지 거제도에는, 해상민족의 풍속을 버리지 못해 선박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부 '해상족'이 있었다고 사료에 전한다. 거제의 정체성(Geoje's identity) 확립에는 이러한 점을 눈여겨 고찰해야하며,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먼저 정사(正史)로 알려진 고려사(高麗史)15권 인종(仁宗)6년 1128년 4월, [“남쪽 경계에 해적(海賊)이 많이 일어남으로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응문(鄭應文)으로 선문사를 삼아 가서 효유(曉諭)하게 하였다.”라는 내용]과 함께, 그해 10월 임자에는 ["임자 초하루에 동남해 안찰사(東南海按察使) 정응문이 ‘명진(溟珍)·송변(松邊)·아주(鵝州) 세 현(縣)의 해적인 좌성(佐成) 등 820명이 투항하여 복속하였음으로 이에 합주(陜州)의 삼기현(三岐縣)에 귀순(歸厚)·취안(就安)의 두 장(場)을 설치하고 진주(晋州)의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두어 거처하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인종 6년에 활동한 남쪽 경계의 해적이라 칭한 '좌성(佐成,佐城)'은 고려시대 주현의 '속현 관리'를 일컫는 말이다. 거제3속현의 우두머리를 해적이라 불린 것이다. 1128년4월 왕명으로 개경 정부에서 선문사를 파견하고, 10월 보고를 받았으니, 약 5개월 정도 거제3현이 정부군에 항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적의 투항에 여러 신하가 의종에게 하례하였던 사실은 곧 거제 남동부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해상세력이 개경의 귀족 관료층에게 큰 영향을 줄만큼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이나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지 않고, 5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정부에 항전한 점과 이 후 투항 한 점은 이들이 거제지역의 사회·경제적 모순에 목숨을 걸고 싸운 거제현민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거제지역은 기원전부터 중국 일본 백제 가야지역을 잇는 해상교통의 경유지로써,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제자유무역항의 역할을 해왔었다. 그러나 신라 문무왕 때 상군이 설치되면서 사실상 중앙정부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 고려건국으로 개경이 수도가 되자, 거제지역은 그 역할과 기능이 약화되어 변방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 대외 교류에서도 중부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국(對中國) 교류가 부각되고 대일(對日) 교섭이 극히 미미함에 따라 대일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역할을 해왔던 거제지역의 위상은 더욱 위축되었다.

육지와 가까운 사등면과 둔덕면 지역은 남해연안 지역에 위치한 조창과 세곡 해상운송로에 위치한 관계로, 정부에서 거제현령을 파견하여, 정부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러나 거제 남동부 해안지역, '명진현(거제면)·송변현(남부면동부면)·아주현(일운면, 장승포읍)' 3속현은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해상민족의 문화권이 면면히 이어오던 지역이라, 지역유력자가 현을 다스리고 있었고, 관리를 '좌성(佐成)'이라 불렀으니, 지방색이 뚜렷한 토호세력의 수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정부에서 3속현의 토착인 모두를 잡아, 정부통제를 굳건히 하고자 육지로 강제소개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예로부터 동일한 해상문화권인, 일본큐슈 대마도 남해안 연안지역의 관계가 단절되기 시작하였고 바다의 국경이 뚜렷하게 경계 짓게 되었다. 당시 1128년 3속현의 해상 활동은 남해연안의 해상조운을 방해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이들을 해적(海賊)으로 취급했겠지만, 이로 인해 대마도 이끼 큐슈북부 지역의 해상족이 왜구로써 우리나라를 적극적으로 침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문호를 개방하고 개방적 정책을 지향하여, 1128년 당시 5개월간 항전한 거제민을 정부에서 해상무역 발전을 고려해 이들을 대우하고 폐쇄적 정책을 지양했더라면, 몽고의 침략에도 굳건히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며,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이어온 해양국가의 명맥을 유지하여, 지금쯤 대마도 이끼섬 등지는 우리나라 역사 지역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고려사 고려 인종6년 1128년 3월의 기록을 보면, "지금 수령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이익으로 삼는 자가 많고 근면과 검소함으로 무민하는 자가 적어 창고는 비고 백성은 궁핍하다. 여기에 역역이 더해지니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어 일어나 함께 도적이 되는 자가 많다"한다. 이 당시에는 왜구의 침입사실이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 해적 항쟁세력의 실체는 자신의 생계를 잇기 위하여 저항한 거제3속현의 백성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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