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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촌 죽지사(烏飛村竹枝詞)[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죽지사(竹枝詞)는 한국고유음악으로 조선후기부터 현재까지 가창(歌唱)되는 12가사 중의 하나이며 '건곤가(乾坤歌)'라고도 한다. 가을바람처럼 시원하고 산뜻한 맛이 있다. 그 지방 민요풍의 가사만을 지칭하는데 그치지 않고 7언절구로서 지방 특유의 자연이나 인사를, 향토색 짙게 읊은 시가를 모두 〈죽지사〉라 일컬었다. 보통 죽지사의 후렴은 ["어히요 이히요 이히요 이히야 어 일심정념(一心情念)은 극락나무아미상(極樂南無阿彌像)이로구나 야루 너니나야루나"] 이다. 거제에 전하는 죽지사는 '오비촌죽지사'와 '기성(거제)죽지사'가 있다.

오죽재(烏竹齋)는 예전, 연초면 오비리에 위치했었다. 임진왜란 선무원공신 칠원 제(諸)씨 형제들의 후손인 제경직(諸景直)이 장수지소(藏修之所, 학문을 통한 수양한 곳)하던 곳이다. 이 마을 이름이 오비촌(烏飛村)인데 마침 대숲 속에 거주하고 있어 검은 대숲 집을 일컫는 '오죽재(烏竹齋)'라 호칭하니 의아해 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후기, 진사 소금산인(小琴散人) 이용근(李容根)의 글에 따르면, 어느 때 남으로 바다를 건너 기성(거제) 오비촌(연초면)에 왔더니 산은 빼어나게 아름답고, 물은 한결 맑아 고운 것이 내 마음에 흡족했다. 더구나 사람들이 모두 순하고 마음에 맞아 더욱 기뻤다. 어느 날 제경직(諸景直)이 소매 속에서 종이 조각을 끄집어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길, "내 일찍이 내가 사는 이 좁고 조그마한 집을 이름하여 '오죽재'라하고, 한 문인의 글을 빌려 자(字)로 하였으니, 자네 또한 여기에서 살지 않겠는가?" 하며 묻기에, 내 이르기를 "이상하다?" "자네 집 이름 '오죽(검은 대나무)'이란? 옛 중국 소상(潚湘)의 대를 반죽이라 하는 것과 기오(淇澳)의 대(竹)가 연죽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푸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직장(劉直長)이란 자는, 누워서 대를 보니 희게 보여 백죽(白竹)이라 하였고, 문여가(文與歌)는 먹으로써 대를 그려 묵죽(墨竹)이라 하였으며, 그 밖의 풍죽(風竹), 우죽(雨竹), 형죽(炯竹), 수죽(水竹)이란 말은 있으나, 모두 그 이름만 있고 그 실은 없는 것이다. 지금 자네 집을 둘러싼 몇 천개의 정정한 푸른 대(竹)를 검은 대나무 오죽(烏竹)이라 부르며, 그 편액에 써 놨다.

제경직(諸景直)이 이르기를, "자네 잘 못 보았노라. 내 집이 오비촌(烏飛村) 마을의 죽림(대 숲)속에 있기 때문에 '오죽재(烏竹齋)'라 하였을 뿐이네. 오오지(烏吾誌)에다 '오촌죽(烏村竹)'이라 하였으니 내 집을 이름 함에 그 이름과 실이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내 웃으면서 "자네 말이 옳다." 하며, 내어놓은 술을 '오오(烏烏)'라 하고 즐거이 '죽지사(竹枝詞)를 읊었다.

오비촌 죽지사(烏飛村竹枝詞) / 이용근(李容根)
岐東秋事慾蒼茫 기성(거제) 동쪽엔 가을추수가 창망하여
徒倚篁欄愛晩凉 대숲난간에 기대어 늦가을 즐기누나. (후렴)
任敎金烏飛入定 금 까마귀 들어와 선경(仙境)에 의탁하는데
海山幽夢落魚梁 바다 산, 고요한 꿈속 어량에 떨어지네. (후렴)

속운(續韻)
摩修楣顔愛及烏 얼굴을 문미에 문지르며 까마귀까지 사랑하니
主人幽事竹同孤 주인의 한가한 일에 대(竹)도 함께 외롭다네. (후렴)
枝迎爽____鳴瑟 가지는 바람맞아 비파를 울리고
曄漏園輪活展圖 잎 사이에 햇빛 새어 그림을 그리누나. (후렴)

不可此君無一日 대나무 없이 하루라도 아니 볼 수 없으니
能令韻士責千__ 시인들로 하여금 수많은 술잔을 비운다네. (후렴)
明春我有重來約 내년 봄에 다시 올 기약하니
留待淸陰曲檻隅 대(竹)그늘 굽은 난간의 구석이 기다려진다. (후렴)

칠원 제(諸)씨는 임진왜란 때 경남과 거제도에서 맹활약을 떨친 '거제 명가(名家)' 집안이다. 특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제조겸(諸祖謙)의 아들인, 제괵(諸__), 제억(諸億), 제진(諸璡), 제말(諸沫) 형제와 제괵(諸__)의 아들 제홍록(諸弘祿)은 거제 고현성 전투, 연초 다공전투, 진주성 방어는 물론 이순신 휘하에서 당포 노량 벽파정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충무공 이순신은 "어찌 이토록 제씨 집안에 충의가 많은고?"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경남의 칠원 제씨는 대부분 무관을 지냈으며, 제말(諸沫)의 6,7대손 제경욱(諸景彧, 추증(追贈) 통제사), 제안국(諸安國)은 조선 정조 순조 때 큰 공을 세운 무관이었다. 정조 16년 1792년 진주성에 '제씨쌍충비명(제말장군, 조카 제홍록)'의 비각이 건립되어 현재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뒤 거제 후손들이 장목면 송진포리 후룡산 자좌에 장의하였고, 1793년 하청면 중리에 '경충사(景忠祠)'를 건립, 제씨 충신들을 매년 음력 10월 첫 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거창부 가조현에 따르면, "고려 원종12년(1272년)에서 조선 세종14년(1432년)까지 160년간을 이곳에 "반씨(潘氏), 제씨(諸氏), 신씨(申氏), 옥씨(玉氏)" 같은 성씨들이 이곳에 옮겨 살았는데 환도(還島)하지 않고 남아 산 사람도 있었으며 또 오랫동안 맺어진 인연으로 함께 거제 본도(巨濟 本島)로 옮겨간 성씨들도 있었다."하니 제씨 등의 거제도 처음 입도시기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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