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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유구인 장목포 표착[연재]고영화의 거제산책

   
▲ 고영화 선생
우리나라 '홍길동전' 소설에 따르면, 조선에서 의적활동을 하다가 바다건너 일본 유구국(오키나와), 이상향 율도국에서 새 세상을 건설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유구국은 조선시대 우리나라와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다음은 거제도에 표류한 유구국 선박에 관한 기록이다.

변례집요(邊例集要)에 따르면, 기사년 1809년 5월 유구국(琉球國, 일본 오키나와) 선박이 표류하다 장목포에 이르렀다. 유구국 중산왕 백성이다. 동래부사 윤노동(尹魯東) 재임 때, 유구국인 10명이 배 한척에 함께 타고 표류하다 장목포에 이르렀다. 전라좌수영 한학, 거제부사 허승(許乘), 통영 무관 우후 및 친비(비장), 옥포왜학이 회동하여 문정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표류한 사정을 물어볼 길이 없었다. 문자로써 글을 써 보이며 그들에게 몇 번이나 표시나 특징을 나타내보였다. 유구국 중산왕인으로 삼월 이하 모든 글자가 어찌나 어지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표류 선박 전례에 따라) 선박의 파손된 곳을 쇠못으로 수리하였으며, 즙물(생활 도구)과 돛을 수리 공급하고, 웃옷과 바지를 염색하여 옷을 만들어 재봉하여 갖추도록 하였다. 매일 모든 사람에게 양식 쌀을 3되씩, 합계 40일 어치를 지급했다. 그 달 바람에 돛을 걸고 곧장 동북쪽을 향하다 동쪽방향으로 떠나갔다(가덕도 방향).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했다.

[琉球國船漂到長木浦 琉球國中山王人 己巳 (一八○九) 五月 府使 尹魯東時 琉球國人十名 同騎一船 漂抵長木浦 全羅左營漢學·巨濟府使·統營虞候及親裨玉浦倭學 會同問情 而言語不通 漂到事情 無路問知 以文字書示 則渠亦以數行記出 而 琉球國中山王人 三月以下諸字 胡亂未解 船隻破傷處 鐵釘着給 汁物風席改備以給 衣袴染色 依倣所着裁縫以給 每名每日粮米三升式 并計四十日支給 同月因風掛帆 直向寅·卯方事 啓].

   
 

다음은 조선후기 유구국 표착인(漂着人)에 대한 우리나라 상황을 살펴보자. 조선 광해군 1613년 유구국(琉球國, 일본 오키나와)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하려 하는데, 배가 표류하다 제주 바닷가 구석에 정박하였다. 제주목사 이기빈(李灤이란, 李箕賓)이 수군을 출동시켜 세자가 붙잡고 배 안의 물건을 모두 약탈하고 마침내 세자를 죽였다. 제주목사 이란이 세자를 죽이고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속여 조정에 아뢰었다가 뒤에 일이 탄로 나자 이란은 연좌되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유구국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야담집 『동야휘집』에 수록된 바 유구국 공주와 결혼한 신희복(愼希復) 이야기에서 보듯 유구는 조선의 민간사회에서 신비롭고 풍요로운 낙토의 이미지로 상상되고 있었다. 따라서 유구 상선이 조선의 제주에서 제주 목사에게 재난을 당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조선후기 상당히 충격적인 일로 기억되었고,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 같은 연대기는 물론 이중환의 『택리지』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박지원의 『열하일기』, 기타 야담집에서 곧잘 언급되었다.

1795년 을묘년(정조19) 겨울 유구국 3명이 제주에 왔다. 임금께서 특명으로 서울에 부르는데 연로(沿路)에서는 말을 주고 경기 감영에서는 음식을 주었다. 동지사(冬至使) 상국(相國) 김희(金熹)가 사행을 가서 청(淸)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으로 갖추어 말하고 육로로 보내 자기 나라에 가도록 하였다. 그 나라 임금의 성씨를 물으니 성은 정(正)이라 하였는데 유구 세자 때에 이미 왕조가 바뀌었다 한다.

17세기 제주도에는 네덜란드 우베르케르크 호의 선원 웰트후레이(박연)가 1627년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고 드 스페르버르 호의 선원 하멜이 1653년 역시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하멜은 운이 좋아 13년 만에 극적으로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대개는 한번 조선에 표류되었다 하면 평생 동안 조선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서양인을 처음 만난 조선 사람들의 두려움도 컸겠지만 그 이상으로 제주도는 외국 상인에게는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17세기 조선의 제주도에 명나라 사람들이 표류하면 조선은 해외 반청운동을 의심하는 청의 강압 때문에 돌아가면 그들이 죽을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청에 보내야 했다. 그래서 제주도는 명나라 유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제도는 이 당시 명나라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임시 거주지(거제면 간덕촌, 외간리)를 제공했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후손과 진린의 후손은 물론, 일반 백성도 받아들여, 임진왜란의 보은을 갚는데 적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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