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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림(儒林) 신수오(辛受五) 상소문[연재]고영화의 거제산책

   
 
1. 신수오(辛受五)선생의 기록.

1). 먼저 거제선비 신수오(辛受五)선생의 옛 사료를 살펴보면, ① 승정원일기 상소기록(1707년), ② 경상도 유학 성명 기록(1748년), ③ 거제반곡서원 창건 기록으로 나눌 수가 있다.
송시열(宋時烈)선생이 그의 나이 73세 때인 1679년 3월 25일에서 1680년 5월15일까지 거제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때 그의 거제제자 중에 한분인 신수오선생의 나이가 10대 초반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죽천 김진규 선생이 1689년에서 1694년까지 거제에서 유학을 강학하셨는데 반곡서원을 창건한 윤도원(尹道元), 옥삼헌(玉三獻), 김일채(金一彩), 윤명한(尹命翰), 허유일(許愈一), 신수오(辛受五)가 그의 제자이다. 그러므로 신수오 선생은 1670년 전후에 태어나서 적어도 1748년까지는 생존하여 장수하신 것으로 판단된다.

2). 거제의 신씨는 1500년 전부터 이어온 거제토착 '아주 신씨(鵝洲 申氏)'와 이 후에 입도한 '영산·영월 신씨'(莘氏)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중에 '영산·영월 신씨'(莘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인종(仁宗,재위1122년~1146년)때 재상(宰相)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신경(辛鏡)이다. 1952년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거제의장(巨濟義將) 영산 신씨 신응수(靈山 辛應壽)는 고현성 주장(主將)으로써 전투에 임하였고 신응수는 국사봉 굴속에 숨어서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왜병을 습격하였다. 하청(河淸)장터에서 분탕질하던 왜군을 습격하여 섬멸하였으니 이를 설욕전이라 전하며 이 당시 넘던 고개가 연초면 덕치(德峙)고개라 전한다. [주] 거제3장사는 신응수(辛應壽), 윤영상(尹榮祥), 김희진(金希璡)이다.

3). 임진왜란 후, 거제도는 해안 방위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해 숙종30년 1704년 2월19일~ 1705년 12월까지 거제현령을 역임한 변진영 부사를 승진 파견한다. 1711년 5월25일 거제에 도착한 변진영은 거제 초대 부사를 맡게 된다. 그러나 거제도호부로 승격된 일은 관찰사의 장계 이전, 1707년 거제 유학 신수오(辛受五)의 상소에 의해, 조정에서 오랜 검토 후에 내린 일이며, 당시 우리 거제민의 희망이 이루어진 역사적 결과였다. 아래 글은 거제유학 신수오의 상소문과 숙종의 하명을 소개한다. 당시 거제현에서 거제부로 승격되는 과정과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4).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거제부 승격' 사유 '신수오' 상소문 기록이 2건 전해온다. ① 숙종 33년 5월 26일, 1707년, "거제현(巨濟縣)은 동래(東萊)와 한산(閑山)의 사이에 있고 내양(內洋)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므로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8진(八鎭)을 통괄하게 해야 한다는 신수오(辛受五)의 상소". ② 숙종 34년(1708) 2월 3일 승정원일기에 "거제(巨濟) 유학(幼學) 신수오(辛受五)가 상소하여 동남 해상 방어 형편을 논하고, 거제현을 방어사(防禦使)로 승격하여 주도록 청하였다. 이곳을 승격시켜 방어사 병영을 두는 일은 중란(重難)하므로 지금 가볍게 의론하기 어렵다."하였다.

   
 
2. 신수오(辛受五) 상소문

거제 유학 신수오(幼學辛受五)가 상소를 올려 말하길, "엎드려 아룁니다. 신은 바다 섬의 마을 백성입니다. 세상에 고루하고 식견이 없어 촌스러우나, 물리치지 마시고 이에 임금님의 현명한 판단 있으시길 기대하옵니다. 비록 시골 농부가 드리는 글이지만 물리치지 마시길 바라며,, 정성을 다해 올립니다. 재주와 지혜가 용렬하며 듣고 본 경험이 단지 궁벽하나 진실로 보고들은 것을 빠뜨릴 수 없어 소신의 마음속의 뜻을 (헤아려) 정성으로 아룁니다. 이에 목격한 것을 마음깊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정확히 부족한 부분을 준비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한 부분을 보태어, 국토방어에 이로움이 있사옵니다. 곧 마음속에서, 나의 어리석고 주제넘음을 참기 어렵더라도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한 말씀 구별하여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님의 밝은 지혜로 헤아려 결정해 주소서. 신이 삼가 생각하니, 우리나라 남쪽 변방에는 왜구와 서로 상접해 있어 돛단배가 갑자기 나타나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을 따라 향해 나아가며, 연해가 수천여리나 됩니다. 아닌게아니라, 병사가 지키는 곳인 부산과 동래는 대마도와 서로 마주하고 있어 육지로 상륙하는 요처의 길목이라, 적의 세력을 뒤쫓게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해로 그 배가 달아나면 호남으로 침노하여 들어가게 되어 서쪽 바다로 달려가야 합니다. 즉 거제는 그 입구를 올가미로 묶게 하는 요해처입니다. 한산도와 통영은 그 다음이며, 동래는 (그 길목을) 지킬 수 없습니다. 천리가 산만하여 육지를 방어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거제를 지키지 않으면 곧, 양 호남에 출몰하여 바다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임진의 난 때, 적은 육지 동래를 점령하고 바다섬 거제를 노략질했으며, 저돌적으로 마음대로 농락했습니다. 다시 바로잡기가 불가했습니다. 다행이 버틴 충무공신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한번 적을 누르고 재차 명량에서 적을 제압했습니다. 적으로 하여금 수군과 육군이 아울러 만나지 못하여 중흥의 업적이 되었고 이에 그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명량대첩은 다행이도 이순신의 성공적인 작전이었습니다. 적이 이미 깊이 들어와 여러 진영이 산산이 흩어지고 고립된 군사가 혈전을 벌이여 아무리 하여도 목숨을 건질 수 없을 때, 가까스로 승리했습니다. 범과 같이 호령하며 북을 치며 나아감이 이미 한산도대첩과 같지 않았으며 침착하고 조용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곤경에 빠진 적군은 끝내 죽음을 맞이했으며 화살과 돌팔매에 생명이 다하였습니다. 이는 지혜의 힘뿐만 아니라 전후가 다른 사실입니다. 참으로 어렵고도 쉬운 일입니다. 깊고 얕음에도 구별이 있으니 고로 당연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김여물(임진난 때 전사)이 옥사에 있을 때, 적을 막기 위한 계책을 말하길, "우리나라는 외양에서 적을 막아 능히 방어할 수 있다. 설령 적이 한번 들어와도 죽음의 땅이 된다는, 어찌할 수 없는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세하고 시급한 일을 말함이며, 선비의 오랜 생각입니다. 그런즉, 적으로 하여금 움직일 수 없는 법칙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래 거제를 지키는 방어에는 이것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명백한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수륙의 성패를 거울삼아 그 행운을 소홀이 말아야 하며, 요행은 없다는 이유입니다. 미리 위험한 일을 방비하고 오로지 동래부에서 주의 경계해야합니다. 그리고 거제를 이같이 예사롭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특히 적의 장기를 알지 못하니 여러 전선을 최고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맞이한 적은 수로가 가장 중요하고 긴요할 것입니다. 대략 거제 한 섬은 동래와 한산도 사이에 끼여 있어, 적이 수로를 통하여 내해로 들어온다고 해도 필히 그 전에 앞서 옛 길로 지나가야하니 단지 거제에 우뚝 솟은 주진으로 하여금 망루에서 지켜보며 충분히 스스로 지킬 수 있으며 전함들을 충분히 요격할 수 있습니다. 적은 반드시 화살을 쏠 수도 없고 돌볼 수도 없어 바로 내지를 침범한다면 한산도 통영의 수비군이 진압합니다. 그러하여 적으로 하여금 이미 움직일 수 없게 만듭니다. 거제의 방어 역할은, 더욱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거제는 하나의 현령 관직일 뿐, 섬 하나를 빙 둘러 배치된 8진에 한가한 벼슬이 많아 권력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주객이 바뀌어 체통이 어지러워 온갖 실마리로 백성의 여러 물건을 빼앗고 여러 갈래로 명령을 호령하니 섬 백성은 평상시에 더욱이 그 삶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위태로움에 이르게 되었으며 당연히 어지럽고, 또한 그 희망을 우두머리들이 막아 버리니 아비와 형이 (가족을)지키겠습니까? 신이 청컨대, 조목조목 그 부족함을 진술하였으며 또한 그 폐단이 작은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신이 진실로 세세히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큰일이기도 합니다. 곧 이제, 소위 한가한 벼슬이 많아 앞서 지나가지도 못하니 권력을 구별하여 주소서. 주객이 바뀌어 체통이 어지럽습니다. 온갖 실마리로 백성의 여러 물건을 빼앗고 여러 갈래 명령으로 호령하니, 이는 여러 가지 어지러운 일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권력을 나누면 공격과 수비가 마음대로 안 되고 체통이 서질 않습니다. 한가한 벼슬이 많으면 이지러지는 이치입니다. 온갖 실마리로 백성의 여러 물건을 빼앗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傳曰, 一國三公, 임금이 전교하기를, 한 나라에 삼공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구구한 의견을 제시하여 누구의 말을 좇아야 할지 모른다 하는구나. 이에 누가 나의 명령을 오로지 따르겠느냐. 형편상, 관할(통솔)하는 곳이 없다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 매우 급하니, 변진영(거제 초대부사)에게 2번째로 거제 관직을 맡아 이익과 손해를 속 깊게 헤아려라. 일반 여론을 잘 듣고 모아서 돌아가 하나로 된 상소를 올려라.

[ 巨濟幼學辛受五疏曰, 伏以臣海外鄙氓也。當此聖明不棄芻蕘之世, 縱有野夫獻芹曝背之誠, 才智庸下, 聞見單陋, 固不能缺人視聽, 自效愚衷, 而玆其目擊而心營, 的知其有所裨益於備缺謀 國之一端者, 則竊不勝其狂僭, 玆敢冒死出分一陳之, 伏惟聖明裁擇焉, 臣謹按我國南陲, 與倭相接, 帆楫倏忽, 隨風所向, 則沿海數千餘里, 莫非受兵之所, 而釜山·東萊, 與馬島相對, 爲賊順勢登陸之首路, 而若其放船內洋, 侵越湖南, 仍趨海西, 則巨濟實爲綰轂其口, 閑山·統營, 次之, 東萊不守, 則散漫千里, 陸難禦矣。巨濟不守, 則出沒兩湖, 水難禦矣。壬辰之亂, 賊, 陸陷東萊, 水掠巨濟, 豕突鯨呑, 不可復制, 幸賴忠武公臣李舜臣, 一扼之於閑山, 再扼之於鳴梁, 使賊不得水陸竝力, 而中興之績, 基於此矣。雖然, 鳴梁之役, 舜臣之成功者, 幸也。賊已深入, 列鎭瓦解, 孤軍血戰, 出萬[死]而僅勝之, 已不如閑山之鼓行虎視, 從容收勝者矣。卒之邀死窮寇, 畢命矢石, 則此非智力, 異於前後, 誠以難易, 別於深淺也。故當其時, 金汝岉在獄策賊曰, 我國苟能禦之外洋則已, 縱賊一入, 置之死地, 則無可及矣, 此誠識務之言, 而長慮之士也。然則使賊, 不動則已, 東萊·巨濟之守, 其不可忽也, 明矣。朝家鑑壬辰水陸之成敗, 不使其幸不幸之故, 陰雨之備, 專注意於萊府, 而巨濟則視若尋常, 不爲之所, 殊不知賊之長技, 舟楫爲最, 而我之受賊, 水路爲最緊也。蓋巨濟一島, 介在東萊·閑山之間, 賊之由水路入內洋者, 必先經其前, 苟使巨濟屹爲主鎭, 樓櫓足以自守, 戰艦足以邀擊, 則賊必不敢舍此不顧, 直犯內地, 而閑山·統營之守備固矣。然則使賊不動則已, 巨濟之守, 尤不可忽也, 明矣。然而巨濟一縣令官耳, 環一島而置八鎭, 閑官多而權力分, 主客易而體統亂, 誅求百瑞, 號令多門, 島民平日, 尙不能聊其生矣。臨危當亂, 其可望捍頭目, 而衛父兄哉? 臣請條陳缺而其弊之小者, 臣固不敢縷縷, 而其大者, 則卽不過前所謂閑官多, 而權力分, 主客易而體統亂, 誅求百端, 號令多門, 此數者而已。權力分, 則攻守不專, 體統亂, 則缺閑官多, 故誅求百端, 缺, / 傳曰, 一國三公, 吾誰適從, 況缺無所管轄, 民安所措其缺邊震英, 二載居官, 深知利害, 采聽輿情, 歸上一疏。]

   
 
3. 변진영(邊震英) 거제 초대부사 보고서

간략하고 상세히 설명하며 말하길, "본 읍은 동쪽으로 대마도와 접해있고 서로는 통영을 숨겨놓고 있습니다. 한산도 또한 그 사이에 있고 적선이 와서 거제현에 노략질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후방 통영을 범하고자하면 한산도가 그 목구멍이 됨으로 대부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거제관직을 두 번째 하니 (거제현령, 거제부사) 친히 늙은이(옛 경험한 분들)가 전하는 말의 사유를 들어보면, 임진왜란 시, 왜구가 처음 바다를 넘어 올 때 본 현의 큰 선박과 그리고 본 현의 실수를 감당하지 못했다 합니다. 이런 사유로, 남은 병사는 10여일 만에 배 멀미가 멈추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으나 적은 누차 현의 백성을 도륙하여 그 나머지는 급히 도망갔습니다. 왜적에게 쫓기게 되어 견내량에 모조리 들어 왔으나 하늘은 흐리고 야밤에 비로인한 습기는 가득차고 원혼의 슬픈 곡소리가 지금도 끊임없이... "아~아 참혹하도다"하고 퍼지고 있습니다. 본 현에는 구 읍성(고현성)이 있는데 그러나 가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중간에 읍을 옮긴 후, 읍치(거제면)에 성이 없으나 거리낌이 없습니다. 또한 산성이 없으나 험준한 지세에 읍치를 설치하여 병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그 약간의 수군을 실은 배가 읍치 바깥에 있게 되어 살아있는 백성이 매우 많게 될 것입니다. 무릇 모두 죽음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뿐입니다. 또한 본 현의 모든 경계에는 8진이 빙 둘러 줄지어 있으나 서로 일정한 통제아래 속하지 않으니, 이로써 거제현령의 그 품계를 높이어 평시에도 중히 여겨 업신여김을 끝내게 해야 합니다. 변방이 어지러운 때 다른 관직도 겸하게 하여 익숙토록 해야 합니다. 이젠 호령하니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러 진영을 진실로 상급 관청으로써 모두 거느리게 되었고, 통영의 수로를 방어하게 되었습니다. 멀리 거의 백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역풍을 맞이하면 배가 느리다가도 빠르게 다니니 기약하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어찌할 겨를이 없이 아주 급한 때라도 가령 기다림이 지체되더라도 그 오고 감을 지휘해야만 합니다. 본보기로써, 반드시 일이 되어가는 중요한 기틀을 그르치더라도 거제현을 이와 같이 힘써 한 섬이 하나로 뭉치도록 하였답니다. 서로 통하여 변통이 있게 하고 급할 때에는 서로 구하고 옳은 것은 죄다 마음먹기에 달렸답니다. 또한 왜선이 오면 필히 동남풍을 타고 오니 본 현의 열진 중에 옥포 조라포 지세포 선소는 모두 동남쪽을 향해 있어 역풍에 부딪치는 바, 결단코 배를 띄워 나아감이 불가합니다. 임진난 때 가덕도의 여러 진영이 그 역풍 때문에 속수무책이라, 우리 배들이 스스로 침몰했습니다. 이는 어찌 오늘날 경계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대개 8진영에는 전선이 한척씩 있으며 본 현도 역시 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합이 10척이며 능로군 사포수 등 그 수가 1500 여명 되옵니다. 이미 한방면의 (방어는)보장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본 현의 민호가 5900호이며 인구가 25000여명이나 되옵니다. 능로군 사포수 외, 젊은 장정의 남은 수는 다만 많지는 않습니다. 이에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하를 거느리는 바가 없어 마음대로 도망쳐버렸습니다. 물고기 밥의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심히 애석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우둔하였는데도 이제 이와 같이 방어사로 본 현이 승차하게 되었고 8진으로 하여금 그 소관을 맡아 적선이 (거제에) 도달하면 방어사가 10척의 전함을 모아 그때그때 처한 사태에 맞추어 즉각 그 자리에서 결정하거나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옥포 등 3진의 선소를 서북방향으로 배치하여 옮겨 놓으니 더하여 역풍에 어렵게 움직이는 근심을 덜게 되었습니다. 험준한 곳에 산성을 쌓아 곡식 창고를 옮기고 방어 중군을 별도로 두었습니다. 백성을 다스려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 지키며 수륙 양 길에 거제 방어를 위해 은연중에 스스로 맡아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적선이 어찌 감히 본 현을 깨뜨리겠습니까? 통영을 침범한다면 내해로 들어오는 지름길에 있으니 현민이 또한 어찌 도륙을 막았겠습니까? 전일 같은 재난(임진난)을 말함입니다".

[備陳缺略曰, 本邑東接馬島, 西遮統營, 閑山島又在其間, 賊船之來寇缺本縣, 而後方可犯統營, 而閑山之爲其咽喉, 蓋可見矣。臣兩載居官, 親聽故老之言, 壬辰之亂, 倭初越海, 泊船本縣, 而本縣失守, 故留兵十餘日, 調養水疾者, 仍屠戮縣民, 其餘奔避, 爲賊所逐, 盡入於見乃梁, 天陰雨濕之夜, 啾啾冤魂, 至今不絶, 噫嘻, 慘矣。本縣舊有邑城, 而猶不能守, 中間移邑之後, 不但邑治無城, 亦無山城據險設置者, 脫有兵亂, 則其若干水軍之載船者外, 許多生民, 將不免盡劉矣。且以本縣一境, 八鎭環列, 不相統屬, 又以其品秩之高於縣令, 平時陵侮旣多, 邊亂之際, 孰爲管攝, 從其號令乎? 列鎭固仰屬於統帥, 而其抵統營水路, 遠者幾至百里, 若値逆風, 則船行遲速, 又未可期, 蒼黃急遽之間, 如欲遲待其往復指揮, 則必失事機, 而至若本縣, 則同處一島, 有變相通, 有急相救, 直是斯須間耳。且倭船之來, 必乘東南風, 而本縣列鎭中, 玉浦·助羅浦·知世浦船所, 皆向東南, 逆風所衝, 決不可運船也。壬辰之亂, 加德諸鎭, 以其逆風之故, 束手無策, 自沈其船, 此豈非今日之所可戒哉? 蓋八鎭, 各有一戰船, 本縣亦有兩戰船, 合爲十隻, 能櫓軍射砲手, 其麗一千五百餘名, 旣可爲一面之保障, 且本縣民戶五千九百, 口二萬五千餘, 則能櫓軍射砲手外, 男丁之餘數, 不翅多矣。使此多人, 無所領率, 而任其奔避, 不免魚肉之患, 豈非可惜之甚乎? 臣愚以爲, 今若陞差本縣爲防禦使, 而使八鎭, 爲其所管, 賊船若至, 防禦使聚十船之軍, 臨機應變, 又移置玉浦等三鎭船所於西北向, 俾無逆風難動之患, 又據險築山城, 移倉穀, 別差防禦中軍, 領率居民, 而入城以守之, 則水陸兩路, 自當爲隱然巨防, 賊船安敢破本縣, 犯統營, 而徑入內洋, 縣民亦豈抵屠戮, 如前日哉云?]

답신 : 이런 지당한 문제의 논의는 폐단을 바로잡는 계책이로다. 조정에서는 통영에다 논의한 바를 알려라. 통제사가 그 이익과 손해를 살피지 않았구나. 그 말을 받아들이며, 그 사실을 분간하지 말라. 지세포는 첨사로 승격하는 것을 반대한다. 방어사가 본 읍과 여러 진영을 모두 거느려 통솔해라. 그런즉, 보병이 아니니 무익하여 더욱 해롭게 되었다. 땅 주인으로서 진영의 성주들을 살피나 그 권세가 반드시 아래 직급이 모시는 자리가 아니니 마음대로 간섭하지는 말라. 난리를 맞았을 때, 어찌 협력한 계책을 기대하겠는가? 사리명백한 일이며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결정하게 되었다. 조정은 어찌 섬 주민이 크게 우러러, 바라는 좋은 방책을 베풀어 시행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此誠切至之論, 救弊之策也。朝家使統營論報, 而統帥不審其利害, 取其言而不採其實, 反以知世浦陞僉使, 使之統轄本邑及諸鎭, 然則非徒無益, 而又害之也。以土主而隷鎭將, 其勢必不相下, 缺已多掣肘, 臨亂何望協策乎? 事理明白, 有不難知缺而決之, 廟堂缺豈島民顒望之缺朝家施措之善策也]  

그 상소에 의거하여, "본 현을 방어사로 승격하고 10 전선 사이에 책임지고 물품을 내어 줘라." "마음을 모은 계책으로 적을 방어하라" "한가한 관리가 비록 힘써 돌보지 아니했다하더라도 주객은 한 방향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 체통이 어지럽지 아니해도 여러 진영들이 돌보는 것을 꺼리며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아 진력을 하지 못하니, 오로지 모두 거느려 관할하라". "호령(명령)은 하나에서만 나오는 법이다. 이에 그 알맞음을 얻어 첫째로 시작하라. 곧 모든 폐단이 절로 없어지리라. 거제부는 일이 잘되도록 보장하는 책임을 맡아 남쪽의 적은 전에 알려진 명성을 잃게 하도록 하라. 나라 국경의 안정을 위해 중히 이루어라."

[缺依其疏, 陞本縣爲防禦使, 缺十戰船居中責應, 專策守禦, 則閑官雖不能盡去, 缺主客一定, 而體統不亂, 諸鎭有所畏顧, 則誅求不能肆缺專統轄, 則號令出於一矣。此一着得其宜, 則諸弊自祛, 巨濟缺以任保障之責, 南賊有先聲之奪矣, 此國家固圉之大助也]

신이 외람되게도, 지체가 낮고 천하며 어려움에 놓여 있으나 걱정 근심으로 이에 이르러 이는 비록 한조각 어리석고 고지식한 충성심에서 나왔다하더라도 주제넘고 경솔한 죄 잘 알고 있어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臣猥以卑微寒蹤, 煩慁至此, 此雖出於一片愚忠, 而狂僭之罪, 自知難免云云]
답하길, 자세히 모두 살피도록 하고 상소한 글을 조정에 아뢰고 처리하라 명했다.
[答曰, 省疏具悉。疏辭, 令廟堂稟處焉]

4. 경상도 유학 명단.

영조 24년 10월 10일 (신묘) 1748년 승정원일기. [慶尙道生員鄭相垕·許輻, 進士鄭墪, 幼學 鄭濟臣·趙錫珣...... 李世章·玉瓚獻·玉處和·裵九齡 玉振和·辛受五·潘錫海 姜世·鄭觀河·姜信垕·鄭道河...] 경상도 생원 정상후 허복, 진사 정돈, 유학 정제신 조석순...(중략).. 옥찬헌 옥진화 신수오 반석해 강세 정관하 ...

5. 거제 반곡서원 신수오 기록

거제의 반곡서원은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상 뒤편에 소재하며, 1704년 숙종 30년 갑신년에 송시열과 죽천 김진규의 제자이자 거제 유림인, 윤도원(尹道元), 옥삼헌(玉三獻), 김일채(金一彩), 윤명한(尹命翰), 허유일(許愈一), 신수오(辛受五) 등이 창건하여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을 주벽으로 죽천 김진규(金鎭圭) 몽와 김창집(金昌集) 선생을 배향으로 봉안하고 있다. 그 후 1863년 철종 제해에 단암 민진원(閨鎭遠), 삼호 이중협(李重協), 계산 김수근(金洙根) 선생을 추배하고 석다례를 일관 통행하고 있었으며 1868턴 고종 5년 무진에 대원군 서원 폐지령에 의하여 본원이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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