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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芭蕉)를 사랑한 이행(李荇)[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옛 시인들의 시(詩) 주제였던 남국의 식물, 파초(芭蕉)는 다년생 식물로 잎이 넓고 선인의 풍취가 있어 도교의 팔선(八仙)이 지니고 다녔다는 8가지 물건 가운데 하나이다. 주로 남부 해안지방에서 자라며, ‘감초(甘草)’라고도 한다. 옛 사람들은 파초의 잎 모양으로 만든 파초선(芭蕉扇)이라는 부채를 즐겨 사용하였고, 조정의 삼정승이 출행할 때 머리 위를 가렸던 식물로도 유명하다. 파초는 겨울에 죽은 것 같다가도 이듬해 봄이 되면 새순이 나오고 불에 타고도 다시 살아 나온다하여 장구(長久)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상징으로 여겼다. 폭염 아래 파초는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로 초록 하늘을 만들어 눈을 씻어준다. 그래서 파초의 별명이 녹천(綠天)이다.

이행(李荇)은 1506년 거제도 여름동안, 태풍 속에 찢겨지는 파초의 이파리 소리와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유배지의 아픔을 느끼고 고독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일본의 중세 시인 바쇼는 "태풍 속 비바람에 쉬이 찢기는 연약함" 때문에 파초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파초는 청아하고 한가한 시인에게 최고의 시재(詩材)꺼리였다.

군미(君美) 홍언방(洪彦邦)은 홍귀달(洪貴達)의 셋째 아들로, 홍언충 홍언승 홍언국 형제들과 장평동에서 함께 귀양살이를 했다. 군미(君美)가 봄부터 장평에서 키우던 파초를, 이행(李荇)이 와서 보니 큰 잎이 지붕 위로 높이 솟아 9척(2.7m)이나 되었다. 파초 포기를 얻은 이행은 집에다 파초를 심고는, 한여름 파초 그늘아래에서 파초 잎에다 시를 쓰기를 기대하며 시구(詩句)를 늘어놓는다.

1). 파초를 심으며(種芭蕉)

爲覓芭蕉種 파초 심으려 포기 구했더니
欣然九尺長 헌걸차게 구척 높이로 우뚝해라
汲泉澆近土 샘물 길어다 가까운 땅에 붓고
掛席背斜陽 거적자리 걸어 비낀 햇살 막는다
休道光陰晩 한 해가 저물었다 말하지 말라
寧無雨露香 어찌 향기로운 우로가 없으리요
會修名卉譜 명훼보를 모름지기 지어야 하리
此物足升堂 이 식물도 승당하기에 충분할 테니

[주] 명훼보(名卉譜) : 명훼보란 이름난 화훼(花卉)를 적은 책이란 뜻.

송나라 학자 장재(張載)는 파초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파초의 심이 다하여 새 가지를 펼치거든, 새로 말린 새 심이 은연중 뒤를 따르나니, 원컨대 새 심으로 새 덕 기르는 걸 배우고, 이내 새 잎으로 새 지식 넓힘을 따르련다.〔芭蕉心盡展新枝 新卷新心暗已隨 願學新心養新德 旋隨新葉起新知〕” 그리고 끊임없이 새 잎을 밀고 올라오는 파초의 자강불식(自彊不息)은 거제의 정신이기도 하다.

2). 군미가 정자를 지을 대나무와 파초를 보낸 데 사례로 주다(贈君美 乞作亭竹材及芭蕉 二首).

君居柚島竹林邊 그대가 유자도의 대숲 가에 살면서
斫得琅玕滿一船 대를 베어 배 한 척에 가득 실어서
遣乞故人能不惜 조금도 아낌없이 벗에게 보내 주니
結茅還擬俯淸泉 띳집을 지어 맑은 시내를 굽어볼거나
昨夜溪村小雨餘 어젯밤 가랑비 내린 시냇가 마을에
芭蕉消息定何如 파초의 소식은 어떠한지 궁금하구려
一叢儻助山中興 한 떨기가 혹여 산중의 흥을 돋우고
七字猶堪葉上書 칠언시를 잎새 위에 적을 수도 있으리.

3). 재차 파초 포기를 달라고 청하고자, 군미에게 주다(再乞芭蕉栽 呈君美).

人固不知足 사람은 진실로 만족할 줄 몰라
得隴又望蜀 농을 얻으면 또 촉을 바라게 마련
趨向縱殊塗 취향은 비록 서로 길이 다르지만
畢竟等爲慾 필경 욕심인 바에야 다 마찬가지
平生泉石癖 평소 천석을 유난히 좋아했으니
政爾天所屬 그야말로 하늘이 준 천성인가 봐
峨峨高節嶺 높고 높이 솟은 저 고절령
其下有空谷 그 아래에 빈 골짜기가 있는데
白頭憔悴歸 백발의 몸 초췌하게 귀양 오니
自可愜幽獨 한적한 환경 절로 마음에 맞았지
靑靑水中蒲 푸릇푸릇한 물속의 창포하며
摵摵巖邊竹 서걱서걱 우는 바윗가의 대나무
竹以賞耿介 대나무에서는 곧은 성품을 보고
蒲以翫芬馥 창포에서는 짙은 향기를 맡노니
旁人拍手笑 남들은 날 보고 손뼉 치고 웃으며
笑我未實腹 내가 배 채우지 못한다 비웃누나
誰能抱長飢 뉘라서 늘 굶주림 참을 수 있으랴
隱忍待秋菊 눌러 참으며 가을 국화 기다린다
芭蕉故人草 파초는 우리 벗님이 기른 풀이니
此物亦非俗 이 식물 또한 범속하지 않느니
昨者款柴扉 어저께 그대 집을 찾아갔더니만
大葉高出屋 큰 잎이 지붕 위로 높이 솟았더군
宿諾君豈怯 약속 미루길 그대 어이 겁내랴만
一陰我未卜 한 그늘을 나는 아직도 못 얻었네
朝來雲氣佳 아침나절에 구름 기운이 좋더니
雨點映山木 후두둑 빗줄기가 산 숲을 가린다.
天時不可後 묘목 심을 시기 늦춰선 안 되겠기에
折趾走羸僕 부리나케 여윈 하인을 달려 보내오
所愁非故土 그러나 걱정은 제 살던 땅이 아니라
沙石自少肉 모래자갈이 많고 흙이 적은 것일세
緩斸莫侵根 뿌리 다치지 않도록 천천히 캐어야지
侵根元氣蹙 뿌리가 다치면 원기가 움츠러드나니
援手莫傷葉 잎 상하지 않도록 손으로 당겨야지
葉傷無舊綠 잎이 상하면 예전 푸른빛을 잃나니
半年未安着 반 년도 채 한 자리에 안착 못하니
汝生已云毒 너의 삶도 몹시 고달프다 하겠구나
-이 파초는 군미가 올봄에 옮겨 심은 것이다(君美今春所移植者).
雖離君子堂 비록 군자의 집을 떠나긴 했어도
庶近幽士躅 은자의 발자취에 거의 가까우련만
相迎闕新語 너를 맞이하매 참신한 시구 없으니
更恐秖見辱 다만 욕을 볼까 봐 다시금 걱정일세.

[주] 가을 국화 : 국화 꽃잎을 먹겠다는 것이다. 〈이소경(離騷經)〉에 “아침에는 목란에서 떨어지는 이슬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지는 꽃잎을 먹는다.[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 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많은 정치인과 학자가 거제도로 유배 왔다. 당시에는 거제 치소가 고현성에 있어, 대부분이 구(舊)신현읍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행(李荇)은 상문동, 김세필은 수월리, 홍언충(洪彦忠)형제는 장평동 바닷가(삼성호텔)에 배소가 있었다. / 이 땅 거제에서 예로부터 선조들의 다정한 연인인 파초는 중국이 원산지로, 고려시대에 씌어진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파초를 뜻하는 초(蕉)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1200년경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4). 군미에게 주어, 재차 파초 포기를 달라고 청하다(呈君美 再乞芭蕉栽).

托在騷人宅 시인의 집에 뿌리내린 너를
移須細雨晨 가랑비 오는 새벽 옮겨 심을지니
莫嫌玆地僻 이곳이 외지다고 싫어하지 말라
堪與此君隣 대나무와 더불어 이웃이 되는 것을..
小徑因吾有 작은 오솔길은 나로 인해 생겼고
幽懷待爾新 그윽한 회포는 널 기다려 새로우리라.
靜求元化妙 고요히 오묘한 조화를 찾으니
不必更觀身 다시 몸을 관찰할 필요는 없어라

[주] 이신관신(以身觀身) : “몸으로써 몸을 살펴라" 자신의 도덕 수양의 정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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