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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풍속과 근현대 미신기사[연재]고영화의 거제산책

   
 
1. [둔덕면 콜레라 접종 반대 기사] 일제강점기 1920년 7월28일, 경남고등경찰관계적록(慶南高等警察關係摘錄). 경상남도 통영군 둔덕면 거림리 지방의 흠치교(吽哆敎, 증산교甑山敎) 신자 15명 검거되다. 이들은 사자(死者) 875명을 발생시킨 이 지방의 「코레라」방역에 대한 관리(官吏)의 조치에 반대하여 수백 명을 선동 야기(煽動 惹起)시킨 혐의이다.

2. [지세포 미신참극 기사내용] 민주신보 1953년 4월 29일. 미신이 빚어낸 이 땅의 참극이 거제도에서 발생하였다. 본적을 홍원에 두고 군내 일운면 지세포에 거주하는 무직 홍은위(45)는 둘째아들이 오래전부터 폐병으로 누워있는데 ‘사람 뼈물’이 가장 좋다는 말을 듣고 이를 구하기 위해 동면 거주 동향인 정명화(鄭明和)(49)과 공모하고 지난 4월 중순 부락뒷산 공동묘지에서 5개 처의 묘를 발굴했다.

다른 한편으로 역시 동리 거주 신흥남(申興南, 위명녀僞名女 28)도 군에 복무하고 있는 자기 남편이 폐가 약하니 돌아오면 쓰겠다고 무지가 낳은 순정으로 역시 동 공동묘지 3개 처의 묘를 발굴하여 뼈를 긁어모은 사실이 이와 같이 거제서에 탐지되어 수일 전 전기 일당들을 구속하여 엄중한 문초를 받고 있다.

   
 
3. 한편 한센병(문둥병) 환자들은 아기를 먹어야 병을 고칠 수 있다하여 갓난아기를 잡아먹는다는 소문뿐만 아니라, 다 죽어가는 병에는 아기 탯줄을 먹으면 된다는 미신 등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거제도에도 아주 옛날부터 나병환자가 있었다. 전해들은 바로는 주로 깊은 산골짜기(옥녀봉 아양 아주 골짜기, 가라산, 계룡산 골짜기)에서 움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모두가 꺼리고 멸시했으며, 혹여라도 아이를 죽이지 않을까? 마을에 오면 돌을 던졌다고 한다. 불과 60년 전의 일이었다.

● 문둥병.. / 미당 서정주.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4. 조선시대에는 문둥병이 불치의 병이었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 이와 관련된 미신과 잘못된 치료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기도 하였다. 몇 가지 예를 소개한다.

(1) 옥종손(玉從孫)은 동래현(東萊縣)의 아전인 석근(石根)의 아들이다. 나이 11살에 아버지가 문둥병을 앓았는데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은 곧 나았다. 일이 알려져 정표를 하고 세금이 면제되었다.

(2) 조선중기 정득춘(鄭得春)은 아비가 죽어 매장한 지 30여 년이 지난 뒤에 자기 형제가 연달아 문둥병을 앓다가 죽었으므로 장례한 묏자리가 불길한가 의심해서 묘를 파내어 불태웠는바, 이 사실은 이미 스스로 자복했다. 시역(弑逆)의 형률을 받았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허벅지살을 끓어 먹이면 문둥병이 낫는다고 하여, 자신의 살을 먹여 문둥병이 나았다는 설화가 전국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5. 해금강 유래와 미풍양속 / 거제도 1928년 7월14일 동아일보

1) 저구리에서 15리쯤 떨어진 갈도가 있으니 거제도 사람들이 해금강이라 부른다. 찬란한 석양빛을 전신에 바른 적발흑면(赤髮黑面,붉은 머리칼에 검은 얼굴)의 부인 한사람이 하염없이 바위 위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어인가 생각하였더니 기실은 남쪽 바다를 향해 자기 고향을 바라보고 울고 있는 제주해녀이더이다. 해금강이란 이름은 조선중엽 무명의 화가가 그린 거제해금강과 1934년 통영군지에 거제 해금강 절경이라 칭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2) 상존한 미풍양속 1928년 7월15일 동아일보
거제도에는 30여년 전에 다른 곳에서 보던 풍속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홍수나 화재등 불의의 재변으로 주택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동리 사람들이 혹은 기둥 혹은 문짝 혹은 장판 혹은 돌적이까지 힘닷는대로 가지고 가서 품삯 한푼 받지 않고 새집을 지어 준답니다. 강너머 강시(강屍)를 두고도 가진 향락(享樂)을 홀로만 하면 족한 줄 아는 다른 곳 사람이 들으면 별천지라 하겠지요. 소나 말 같은 가축도 농번기 외에는 모두들 다 내어 놓고 찾는 일이 없다 합니다. 물론 각기 소유권은 있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야생을 시켜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하니 백주시장에 소도둑이 횡행하는 다른 곳 사람들이 꿈이나 꿀일입니까?

   
 
6. 1690년대 거제도의 무속신앙 / "가라곡(加羅曲)" 김진규(金鎭圭)

거제 풍속은 귀신을 숭상한다. 또한 거제는 바닷가인지라, 귀신을 많이 숭상한다. 마을마다 무당이 있으며, 음력2월이 효과가 좋다고 더욱 심하게 두려워한다(영등신). 그리고 대지(땅)를 위해 무당이 제사를 지낸다. 매양 큰 대나무를 가지고 다니며 낚싯대로 춤을 춘다. 신의(신에 의지)라 말하며 사람들이 신과 함께 생활한다. 어부는 배 젖는 장대로 두 번 흔들어 빌고는 술잔을 들이키며, "신령한 바다뱀이 있어, 무사항해를 빌고, 또한 돛대로도 점칠 수 있다"한다. 신에 의지해 낚싯대를 손에 쥐고 신을 부른다. 무당과 박수(남자무당)가 떠들썩하게 잡가를 부르고 신당이 집집마다 관계하지 않는 곳이 없다. 비록 질병에 대해 말을 하더라도 모두 귀신에 씌었다고 한다. 운반선은 물가를 굽이쳐 흘러 가야하니 배 젖는 장대로 두 번 빌고는 이별의 술잔을 들이킨다. 선상에서 말하기를 "신령한 뱀이 있어 거래가 좋을꺼라"하며 "돛대로도 점칠 수 있다"한다.

   
 
7. 거제역사와 각종 신의(神意) 제의(祭儀).
거제는 고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써 교역에 의존해 살아왔다. 우리나라 남부해안 지역과 제주도 대마도 이끼섬 큐우슈우 등지로 왕래하여 재정이 풍부하였고 여러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다양성과 역동성이 넘쳐난 곳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1128년 중앙정부가 해상족 거제민 820명을 육지로 강제 이주한 사건과 1271년 삼별초의 침입으로 약 1000 여명을 육지로 소개 시킨 이후부터 섬의 풍속이 점점 다양성을 잃게 되었다.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조선후기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또 다시 거제 특유의 풍속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대에는 육지와 같이 남녀의 구분이 엄중하지 않았으며 남녀의 의복 또한 간편․ 화려하고 세속적이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남녀 가사노동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이러한 역사의 토양아래 거제 섬의 여자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억세며 노동에 능숙해졌다. 무속이 행해지는 일도 육지보다 몹시 현저하고 무당의 수도 매우 많았으며, 주술과 각종 신(神)들이 난무하는 다신사상(多神思像)의 고장이었다.

거제는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바다를 관장하는 신에 대한 제의가 어민들의 중요한 신앙으로 존재한다. 풍어와 안전한 항해 길을 기원하는 것이다.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신앙형태로 '공수서' 신당' 등의 제의 장소가 거제 곳곳에 있었다. 마을 공동으로 주관하는 '풍어제'와 개인적인 '뱃고사'는 어부들 자신이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 또한 육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성주신앙이 강하여, 어떠한 제사 때에도 주(主) 제사상 왼편에 작은 '성주상'을 차려 가택신(家宅神)께 예를 올렸는데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다. 집안의 복을 지켜주는 '구렁이' '두꺼비' 등을 해하지 않는 업신앙이 유별났다. 두꺼비가 지네와 싸워 주인을 구한다는 설화와 집안 창고와 재물을 지켜주는 큰 구렁이 이야기는 우리네 주위에서 여러 가지 설화 형태로 전해지는 업신앙의 한 형태이다.

   
▲ 1980년대 거제도 지세포 해안
   
▲ 1980년대 거제장승포 삼밭(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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