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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시블리와 유승흠, 그리고 '있을 뿐이다'신기방 /편집국장

파란 눈의 이방인이 외진 섬으로 찾아와 흙집을 짓고 병원을 열었다. 그는 당시엔 꿈도 꾸지 못했던 총괄 보건의료서비스를 선보이며 지역주민들에게 헌신적인 인술을 펼쳤다. 지역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단순진료를 뛰어넘는 예방과 보건, 재활, 장학사업 등 우리나라 지역사회의학사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Dr. John R. Sibley(한국명 손요한). 44년 전 낙도 거제도에서 인류애에 바탕한 인술과 사회계몽사업을 펼쳤던 파란 눈의 선교사. 흙집을 손수 지어 병원을 만들고, 가난하고 피폐했던 지역주민을 내 가족처럼 돌봤던 이방인….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에게, 그는 살아있는 이태석 신부였고, 슈바이처 박사였다.

6월이면 그가 88세를 일기로 타계한지 꼭 1년이 된다. 시블리 박사는 미국 뉴햄퍼스주 아트나시에 있는 농장 자택에서 운명하기 직전까지, 한국 그것도 궁핍한 삶을 살던 거제도 주민들을 그렇게 그리워했다고 한다. 심지어 사후(死後)에 한국에 묻히기를 소원할 정도였다니, 그 그리움과 애틋함을 무슨 말과 글로 다 헤아릴 수 있으랴.

그가 한국에 머물렀던 대구와 거제에서, 그를 기억하는 작은 추모회가 잇따라 열린다. 5일 열린 대구 추모행사는 계명대 의료선교박물관 옆 ‘Grace Garden'(은혜정원)에 추모비를 세우고, 그 옆에 작은 봉분을 쌓아 미국에서 가져온 시블리 박사의 무덤 흙을 뿌렸다. 8일 열리는 거제 추모행사도 이와 비슷하다. 그가 거제를 떠난(77년) 뒤 세웠다는 작은 기념비에, 그의 무덤 흙을 뿌리고, 그의 업적을 되새기는 자리다.

되짚어 보면 우리는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 40여년 전 그가 흙집을 짓고 병원을 열었던 자리는 이제 흔적조차 없다. 생전에 그리도 거제도를 그리워하며, 못내 거제에 뼈를 묻고자 했던 애절한 심정도 알지 못했다. 의료계에서 우리나라 지역사회의학사업의 효시로 평가받는 그를 기억할 노력도 실천도 없었다. 단지, 그가 떠나고 2년 뒤에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는 작은 기념비가 유일하다.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한국을 찾는 유족들을 우리는 무슨 낮으로 대할까.

대구 동산의료원이 이번에 작은 봉분을 만들고, 미국에서 가져온 그의 무덤 흙을 뿌린 건, 한국에 묻히고파 했던 그의 생전 소원을 배려했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그가 정작 뼈를 묻고자 했던 곳은 대구보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머문 거제가 아니었을까.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한없이 순박했던 사람들…. 그는 이런 거제도 사람들을 생전 내내 그리워했고, 애틋해 했다. 국내 지인들이 전하는 말들을 줍다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실이다.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이를 먼저 알고 작은 봉분을 쌓아 생전 그의 소원을 대신했다. 우리 입장에선 아쉬움이 많지만 그렇다고 이를 탓할 일도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그를 기억하는 작은 봉분은 대구에 있지만, 그의 정신과 행적을 모은 작은 기념관은 우리가 먼저 만들어야 한다. 출생지 문제로 인근 통영과 입씨름하는 청마 유치환 기념관이나 친일 문제로 논란을 거듭하는 김백일 동상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기억조차 잊어버린 거제시가 원망스럽고, 그래서 더 아쉽다.

한국의료지원재단 이사장인 유승흠(전 연세대 의대 교수.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조카. 70년대 초 존 시블리 박사와 함께 거제에서 1년간 인술을 펼쳤음) 박사가 펴낸 ‘우리나라 의학의 선구자’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존 시블리 박사를 ‘지역사회의학사업의 효시’라고 평가한 유 박사는, 본문 중간에 거제와 관련해 이런 표현을 썼다. ‘옛 실전병원 터 부근에 섬(칠천도)을 잇는 다리와 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시블리의 공적을 칭송하는 기념비가 있을 뿐이다’라고. 유 박사가 강조한 대목은 ‘있을 뿐이다’라는 부분으로 거제시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베여있는 표현이다.

이제라도 거제시 차원에서 그의 업적을 재조명해, 그가 거제도민들에게 베푼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고 알려야 한다. 그 평가를 바탕으로 시의회에서 관련예산을 확보해 당시 병원이 있던 자리에 작은 기념관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하청 실전마을이 대한민국 지역사회의학사업의 효시이자 발상지였고, 그 중심에 파란 눈의 이방인이 있었다는 걸 후세에도 전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존 시블리 박사 기념관이 김백일 동상보다 모자랄 게 뭐가 있겠는가. 거제에 터를 잡고 배 만드는 사업을 한지 30여년이 넘도록,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지역민을 위한 병원하나 짓지 않고있는 삼성은 또 어떻고….

   
▲ 2000년경 한국을 방문한 시블리 박사 내외분과 한국 의료 지인들이 대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 :조선대 의대 김기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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