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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에 올라 거제도를 읊다[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년)선생께서 1560년경 계룡산에 올라가 지은 ‘계룡산시(鷄龍山詩)‘는 총26절 104구로 이루어진 장문(長文)의 칠언고시(七言古詩) 한시(漢詩)로써 운(韻) 자(字)는 ‘선(先)’이다. 선생은 1548년 거제도 고현동으로 이배되어 약13년 간 귀양 살다가 거제에서 타계하신 분으로, 거제 유배동안 지은 유헌집(游軒集)을 통하여 많은 글을 남겨 거제도 유배문학의 가장 큰 획을 그었고, 거제향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신 분이다. 또한 선생은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의 성리학의 거두로써, 당시 편지로 학문을 주고받으며 거제가 성리학의 한 축을 담당케 한 인물이다.

이 작품 ‘계룡산시‘는 10여 년째 귀양살이 하면서 자주 찾던 계룡산에 올라가, 거제도 지세의 웅장함과 국토의 끝자락에서 보고 느낀 점을 표현했다. 내용에는 거제지역 지명이 나오는데 "오아포 오양역 가라산 구천동 유자도" 등이 언급되어 있어 참으로 반갑다. 배소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는 문장이 있는데, 서쪽은 계룡산, 남쪽바다 고을현, 북쪽은 2개의 유자도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구련(拘攣)병(손발이 굳어 못쓰게 된 병)이 걸린 것으로 보아 타계하기 직전인 1559년~1560년 사이에 이 글을 지으신 것 같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는 인간세상의 깨달음과 자연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병중에 아픈 몸인데도 불구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인생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양 겨드랑이 날개가 가볍게 나부껴 훨훨 날아 볼까나" 마지막 이 표현은 저자가 마지막으로 이 땅에 남은 이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문장이다. 다음은 긴 문장 중에 일부를 소개한다.

雞龍山在海中碧 계룡산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어
崢嶸勢壓扶桑天 한껏 높은 산의 기세가 부상의 하늘을 압도한다.
鯨噴萬頃屹砥柱 고래가 물을 뿜는 아주 넓은 바다에 지주처럼 솟아나
滄波幾見爲桑田 푸른 물결 몇 번이나 뽕나무 밭이 되어 오고갔나.
烏兒自古置大帥 오아포는 예로부터 대장수(수군절도사)를 두어 다스리고
五浦烽火通危巓 다섯 포구에서 봉화가 가파른 산꼭대기로 통한다.
縣郭嚴排就民衆 고을현 성곽은 경비가 빈틈없어 대다수 백성이 줄지어 따르니
爲土中央公私便 고을땅(거제) 가운데에 관인과 백성이 편안해졌다.
雄峙加羅是南趾 가라산 웅장한 고개 여기가 남녘의 발꿈치인데
遙拖練白走九川 먼 곳을 끌어당겨 자세히 보니 아홉 내(川,구천동)가 달리는구나.
龍種幾匹任自牧 용종포(다대포)의 말을 몇 필이나 스스로 길러짐에 맡기었나.
飢則有草渴有泉 주리면 풀을 먹고 목마르면 샘물 먹겠지.
潮通商賈百濟國 조수를 이용하여 백제국이 통상하고 장사를 했다하고
昇平物貨相貿遷 나라가 태평하여 물품과 재화가 서로 옮겨가며 무역을 했었다네.
惟東案對是對馬 생각해보니, 대마도를 마주보며 땅의 경계에서 동쪽으로 갔을 꺼고
晴日分明一眸邊 맑은 날에 한번 훑어보아도 또렷이 국토의 끝(대마도)이 보인다.
於焉逍遙以卒歲 어느새 한해를 보내면서 슬슬 돌아다녀도
豈念身是爲拘攣 손발이 굳어 못쓰게 된, 이런 몸이 어찌 가엾지 않는가?
何當一凌高頂望 높은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어찌하여 순간 업신여겨 보이는가?
兩腋羽翰飛翩翩 양 겨드랑이 날개가 가볍게 나부껴 훨훨 날아 볼까나.

   
 
‘계룡산’시편에 등장하는 거제의 지명들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고려말기 당시 거제섬은 왜구가 눈앞에 놓여 있었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요해처(要害處), 즉 적을 막기에 긴요한 용반호거(龍蟠虎踞)의 땅이었다. 現 가배량에는 오아포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려말기 해상방어를 위해 가라산방어소를 설치하였고 조선태종 때 수군절도사(수구도안무처치사, 정3품) 대장군이 거제해상을 사실상 통치했다. 이후 경상우수영으로 바뀌면서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1550년대 당시, 영등포(구영등) 옥포 지세포 조라포(구조라) 오아포(가라산) 다섯 포구에서 봉화가 처음 올라 서울로 위급함을 알렸다. ‘오아포‘의 지명어원은 2가지인데, 고대 우리 고유말 "오아"는 온전, 완전하다는 의미이니 오아포(烏兒浦)는 "완전무결한 항구"로 해석해도 되고, 덧붙여 ≪孟子≫편에 따라, "오획(烏獲)같은 아이" 즉 '힘센 무인이 지키는 곳'으로 해석해도 된다.
 
그리고 現 구천동(九川洞)을 당시 구천장이라고도 했는데 선생이 전하는 말로는 아홉 굽이의 하천(아홉 내)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또한 용종포(現 다대포)는 많은 수의 말을 키우는 좋은 목장지였고 그 말의 우수함을 칭찬한다.

그 옛날 거제는 고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써 교역에 의존해 살아왔다. 우리나라 남부해안 지역과 제주도 대마도 이끼섬 큐우슈우 등지로 왕래하여 재정이 풍부하였고 여러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다양성과 역동성이 넘쳐난 곳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백제국이 조수를 이용하여, 물품과 재화가 서로 옮겨가며 일본과 무역을 하기위해 반드시 거쳐 간 곳이라고 선생은 또 언급한다. 또한 국토의 끝이 대마도라 일컫는 바, 이 당시 대마도는 우리나라 영토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 거제는 거대한 목장지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3년마다 하는 구점의 역(방목한 말을 점검)은 또한 법식의 예에 따르기는 하나, 동원된 백성들의 고충이 크다 하시고, 고현성 북쪽에는 모자(母子) 같은 섬에 빽빽이 유자나무가 들어서 있다한다. 지금의 죽도와 유자도(귤도)를 말함이다. 이에 “거제유자가 맛이 좋은데 유자를 담은 질그릇을 공치사한다”하며 거제유자를 찬양한다.

   
 
거제에는 500m가 넘는 산이 7개나 된다. 그 중에 가라산(585m)이 최고봉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계룡산(566m)은 거제의 주봉(主峰)이다. 정상부의 암석이 닭의 벼슬모양을 닮았고 용처럼 구불구불한 산줄기를 가졌다고 '계룡산(鷄龍山)'이라 불리고 있다.

정황(丁熿) 선생의 ‘동지일(冬至日)’ 1551년 作 7언절구를 감상해 보자.
至月至日鷄龍寺 동짓달 동지날 계룡사(거제시 고현동 계룡사)에서
高陽北望暗銷魂 정오 한낮 북쪽을 바라보니 은근히 사람 혼을 녹이는구나.
對人不敢分明語 상대에게, 감히 분명한 말로 표현치 못하겠지만
我是羣臣最得恩 나는 많은 신하 중에 최고의 은덕을 입었다네.

위 시(詩)는 '계룡산에 올라(登鷄龍) 계룡산 초암제소에서 밤을 지새고(齋宿于鷄龍草庵,)' 내용이다. 당시 계룡사는 계룡산 정상 바로 아래에 초갓집 사찰로 자리하고 있었다. 정황(丁熿)선생은 1551년 중종대왕의 제삿날(15일) 전날(前日)에 거제향교 훈도 김급(金伋)과, 여러 제군들과 함께 계룡산에 오른다(翌日十五 卽中宗大王諱辰也 書示金伋諸人). 너무나 아름다운 거제 풍경을 보며, 자신이 가장 큰 성은을 입었다고 감탄하고 있다.

예로부터 거제 계룡산을 찬양한 기록을 살펴보자. 1881년 8월, 이유원(李裕元)의 거제향교 풍화루중수기(岐城鄕校風化樓重修記) 내용 중, 일부분인데 계룡산을 보고 감탄한 글이다. [以鷄山爲主峯 落脉蜿蜒 拓鹿洞而面鷰浦 毓文明之氣 余欽歎而歸] “계룡산은 주봉으로써 꾸불꾸불하게 산줄기를 이루며, 사슴골(거제면 녹반골)이 넓어지니 포구가 즐거운 표정이다. 그런 기운에서 문명이 나온다하네. 나는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돌아왔다.” 또한 “거제읍지 1759년 여지도서편”에는 계룡산은 거제부의 주산으로 읍치 관청의 북동쪽 5리, 대금산 내맥이 이어진 산줄기이다[鷄龍山 府主山在府東北五里大金山來脈].

김진규 선생이 1689년 거제면 동상리로 유배 와서 지은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은 선생의 선산이 있는 충청도 지역의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의 이름이 같은 걸 알고 자신의 귀양살이 동안 많은 위안을 삼았다는 내용이다. 또한 산의 위용과 아름다움이 충청도 계룡산과 유사하여 자산(玆山), 즉 짙푸른 색에 더한 검은 산으로 표현했는데, 조선시대 유배 간 학자들은 그 지역의 수려한 산 이름을 대개 '현산(玆山)' 또는 '자산(玆山)'이라 표현했다(흑산도 남해도 거제도 등).

[裳郡多山 嶂嶠重複環遶 而有巍然最高而大者出於其間 余始至而望之 問土人曰山何名 人曰此爲吾邑鎭 /南北遠 古之名之者 不相聞歟 彼此之名]. 거제에는 산이 많다. 높고 험한 산이 쭈빗하고 겹겹이 둘러싸여 중복되어 있으며, 아주 뛰어나게 높고 우뚝 서 있어, 어떤 때에 큰 인물이 나올 것 같다. 나는 일찍부터 기대하고는 "산 이름 무엇입니까?" 물으니, 거제토착민이 말하길, "이 산이 우리 고을 읍진(주봉)이다". / 남북이 멀다. 옛날에 이름을 지은 자는 서로 알거나 방문하지 아니했을 건데, 충청도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 이름이 같구나.

그리고 거제에서 오래전부터 전하는 설화가 있다. “계룡산 정기를 받고 조선을 빛낼 분이 두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용이 꽈리를 틀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계룡산의 웅장한 기운을 받아 나라를 일으킬 것이다.”라고 전한다. 또한 지역 어르신들에 의해 전해오는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따르면, 남해바다의 음기(陰氣)가 모두 모여 수렴하는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상 터와 녹반골 출신 여성이, 왕후(영부인)에 버금가는 여장부가 태어날 것이라고도 전한다.

계룡산(鷄龍山). 1870년대 作.  조익찬(曺益贊)
珍重鷄龍數疊峯 진중한 계룡산, 겹겹의 봉우리,
上遊日暮月惟東 올라가 노닐다 날 저무니 오직 동쪽 달만 떴구나.
座岩望景千年海 앉은 바위에서 바라본 경치는 천년의 바다일세.
橫路汗醒萬里風 험한 길에 젖은 땀, 만리 바람 불어 사라진다.  갈도(葛島, 해금강)
洛洛寒松無盡處 언제나 푸른 소나무 다함이 없는 곳,
層層石壁有碁蹤 층층 석벽에 바둑판의 흔적 있다네.
徐市過此銘於蹟 '서불과차' 새겨 자취 남겼으니
仙藥應生是邑中 선약(仙藥)은 응당 이 고을에 있으리라.  

조선말기 경상우도 육군 대장이었던 조익찬(曺益贊) 장군이 거제도 계룡산에 올라가 해지자 보름달이 뜬, 장면을 보고 쓴 시가 첫 수(首)이다. 둘째 수(首)에 따르면, 해금강에 '서불과차' 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제도에 서불이 새긴 자취가 있으니 이 고을에는 불사초(신선의 영약)이 있었던게 아닌가? 하며, 마지막 화두를 던지고 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약 25명 정도의 중앙관료가 거제시 舊 신현읍 일대에 이배되거나 유배되어 왔다. 이후 거제 유배객은 어느 정도 거제의 환경과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를 위안하는 자위(自慰)의 정서로 바뀌면서 긍정적 정서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에 유배문학도 교류를 통한 차운(次韻)·화운(和韻)·기증(寄贈)·연구(聯句)한 시(詩)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여러 인물들과 교류를 통해, 자신이 느낀 좌절과 고독감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되돌아 볼 기회를 찾는다. 자조(自照)의 정서로 가닥을 잡게 된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혼란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형성해 간다. “성찰과 순명(順命)” 그리고 “진실의 발견”의 과정이 이어짐을 엿볼 수 있다.

1506년 음력 9월 6일 날, 택지(擇之 이행), 자백(子伯 이윤)과 공석(公碩 김세필) 및 자선(子善 이전), 원숙(元叔 이육), 강재(強哉 이려)와 함께 거제 주봉(主峯)계룡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연구(聯句)로 짓는다. 3수(三首)[六日 從子伯擇之及子善 元叔 强哉 登主峰望海 聯句三首]. 중종반정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거제 계룡산에 올라, 다음 한시 연구(聯句)를 귀양살이 벗들과 주고받는다. 9일 날 저녁 늦게 사면령이 거제현령에게 도착하고, 10일 날 거제유배객은 이를 통보받고 모두 견내량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① 時序重陽近 절서는 중양절이 다가오고 -자백- 이윤
江山落日催 강산에 지는 해는 바쁘구나 -택지- 이행
東南迷遠目 동남쪽 멀리 눈길은 아득한데 -공석- 김세필
衰病且深杯 병약한 몸으로 깊은 술잔 마신다. -자백- 이윤
萬里心逾壯 만리 밖의 마음은 더욱 씩씩하고 -강재- 이려
孤雲首屢廻 외로운 구름에 고개 자주 돌린다 -택지- 이행
乘桴千古意 뗏목 띄우는 것 천고의 뜻이라, -공석- 김세필
人事轉悠哉 사람의 일은 더욱 아득해지구나 -자선- 이전

② 目斷滄溟夕 멀리 푸른 바다의 저녁 바라보니 -원숙- 이육
天高九月秋 하늘이 높은 구월의 가을이구려 -공석- 김세필
登臨今日意 오늘 이 산에 올라온 뜻은 -택지- 이행
風物暮年愁 풍물은 늘그막의 시름이지
夷島蜒涎外 푸른 바다 저편의 오랑캐 섬, -자백-이윤
淸樽鰈海頭 접해 가에서 맑은 술잔을 나누네 -공석-김세필
坐中誰主客 좌중에 누가 주인이고 객인가 -자선- 이전
談笑付悠悠 이야기와 웃음이 오래도록 그치질 않네. -자백- 이윤

③ 未覺吾身遠 내 몸이 먼 곳에 있음을 모르겠고 -택지- 이행
唯看馬島平 오직 수평선에 걸린 대마도만 본다. -공석- 김세필
層雲生眼底 겹겹의 구름은 눈 아래서 일어나고 -자선- 이전
斜日媚秋淸 기운 해는 맑은 가을에 아양을 떠네. -택지- 이행
衰鬢淵明菊 쇠한 머리털은 도연명의 국화요 -자백- 이윤
歸心張翰羹 돌아가고픈 마음 장한의 국이로다. -택지- 이행
悠悠今已幸 유유한 요새 생활도 다행이니
莫惜醉宜城 의성에서 취하는 걸 아까워 말게나. -공석-김세필

[주1] 뗏목 띄우는 것 : 무도한 세상을 피해 바다에 뗏목을 띄워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 浮于海]”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주2] 접해(鰈海) : 우리나라 바다를 뜻한다. 우리나라 바다에 가자미가 많이 난다 하여 우리나라를 접역(鰈域)이라 부른다.
[주3] 도연명(陶淵明)의 국화 :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주4] 장한(張翰)의 국 : 후한(後漢) 때 오군(吳郡) 사람인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를 차용하여 고향 생각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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