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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뱃길에서(舟中漢江) 정종한(鄭宗翰)[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거제도 문학인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1764~?) 선생은 그의 나이 40세 이후부터 약 40 여 년간 한강하류에서 남한강 중상류 지역일대를 유랑하며 수많은 시우(詩友)들과 교류(交流)하였다.

그는 몰락한 양반 사대부는 물론 현직 관료, 중인, 평민 등 신분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 외 자신처럼 출신지역의 차별화로 조선의 주류에서 소외된 모든 지식인과 교류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강호(江湖)∙여항(閭巷) 시인(詩人)이었다.

그의 문집에서 밝힌, 그가 유람한 한강지역은, 충북 단양 충주, 경기도 여주시 북성산(北城山) 신륵사 여강(驪江) 남양주 양평, 서울시 송파구 석촌(石村), 교남동 필운대 옥류동 성균관 삼청동(三淸洞) 남산과 동대문일대, 마포나루 김포 등지였다.

한편 곡구 선생은 일종의 시사(詩社)였던 서울의 ‘생백회(生白會)’, ‘석호회(石湖會)’, ‘석상회(席上會)’와 충북 단양 시인(詩人)들 모임 ‘화암아회(畫巖雅會)’ 즉, 문인들이 한시를 창작하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서로 교류하는 모임의 회원이기도 했으며, 경기도 여주시 시인묵객 모임의 主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중년 이후에 서울시와 충청도 경기도 일대에서 90 여명의 시인묵객들과 더불어, 시회(詩會)를 만들어 시편을 읊고 교류하며, 끝없이 학문에 정진하였다. 19세기 전반 이행기문학의 절정기에 곡구 선생이 그 한가운데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인간의 시선을 편견 없이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감정과 본질을 성찰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아름다운 창조의 시대를 열 수 있었으나, 곡구 선생은 한문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당시는 민중의식이 성장하면서 점차적으로 사대부문학이 퇴장하고 시민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근대문학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아래 시편은 곡구 선생이 한강을 따라 정기적으로 운행하던 여객선(돛단배)을 타고 작시(作詩)한 작품들이다. 경기도 여주시 일대를 흐르던 남한강을 여강(驪江) 또는 황려강(黃驪江)이라 불렀고 충북 충주시 남한강은 단강(丹江), 남양주 한강은 미호강(渼湖江)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강원도 태백시 골지천을 조탄강(棗灘江), 용진강(龍津江 북한강)과 여강이 만나는 곳은 대탄(大灘)이라 칭했다. 충주시 남한강에서 서울 마포나루까지 곳곳에서, 화물과 여행객을 실어 나르던 나루가 있었는데 날씨나 강물의 상태에 따라 여객선(큰 돛단배)의 출항여부가 달라, 하룻밤 기다리던 때가 종종 있었다.

선생의 시편에서 한강변 일대의 지명이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경기도 여주시의 신륵사(神勒寺), 대로사(大老祠), 북성산(北城山), 이릉산(二陵山), 청심루(淸心樓), 앙덕리(仰德里) 앙덕나루, 대신면 침석정(枕石亭)과 경기 충청 강원 3개도의 물줄기(남한강 청미천 섬강)가 만나는 삼협(三峽),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석촌(石村), 석호정(石湖亭), 석촌호수(石湖),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 풍납동 사이 광진(廣津)나루와 종남산(남산), 마포나루 등이다.

1) 여강에서 배를 타고[舟中驪江].
春風倚醉偃蓬間 봄바람에 취하여 사립문에 의지하는데
大老祠前鷰子湾 대로사(大老祠) 앞 제비들이 물을 적셨다 말리네.
滚滚流來三峽水 삼협(三峽)의 물이 세차게 흘러오니
蒼蒼飛過二陵山 이릉산(二陵山) 푸른 하늘을 날아 지나간다.
汀鷗得意交浮沒 물가의 물새가 마음대로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하며
浦柳縈情逓送還 물가 버드나무와 얽힌 정(情)을 번갈아 되돌려 보낸다.
明日杜湖泊舟處 밝은 태양은 배를 정박한 곳인 호수를 비추고
層城紫閣好開顔 드높은 성곽의 붉은 누각은 밝은 얼굴을 좋아한다네.

[주1] 대로사비(大老祠碑) : 1785년(정조 9)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향(祭享)하기 위해서 여주시 하동 강변에 지은 대로사(大老祠)를 사액(賜額)한 정조는, 송시열이 태어난 후 세번째 맞는 회갑년(1787)에 그를 기리기 위하여 장대한 규모의 대로사비(총 높이 약 390㎝)를 건립하였다.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老論)의 신임의리론(辛壬義理論)과 북벌대의론(北伐大義論)을 높여 현창(顯彰)하는 정치적인 조치였다.

대로사비는 비문을 쓴 비신(碑身)의 크기가 가로 268㎝, 세로 223.5㎝에 이르는 대작(大作)이다. 비신의 앞면 중앙에 전서(篆書)로 “대로사비”라고 크게 쓰고 우측 상단에 소전(小篆)으로 “어제어필(御製御筆)”이라는 표기가 있어 정조(正祖)가 친히 짓고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신의 좌측면에서 뒷면을 거쳐 우측면으로 돌아가면서 쓴 본문(本文)의 글씨는 유려(流麗)하고도 장엄(莊嚴)하여 정조가 쓴 어필비(御筆碑)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글씨를 새긴 홈에는 주칠(朱漆)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건립 연대는 “황명(皇明)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정미(三丁未, 1787, 정조 11) 동(冬) 십일월(十一月) 일립(日立)”이다.

[주2] 삼협(三峽) : 경기 충청 강원 3개도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 충북 장호원 경기 여주군 강원 원주시, 남한강 청미천 섬강이 만나는 곳을 삼협(삼합)이라 부른다.

[주3] 이릉산(二陵山) : 2개의 왕릉이 있는 산.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2) 여강 배 안에서[驪江舟中]
春來三峽雪消多 봄이 오니 삼협에는 녹은 눈에 강물이 불어나
生動驪江一夜波 생동하는 여강의 하룻밤 물결일세.
舟自淸心樓下發 청심루(淸心樓) 아래에서 배가 출발해
雲隨仰德里邊過 구름 따라 앙덕리(仰德里) 강변을 지나간다.
篙師秉柁和眠坐 노련한 뱃사공이 키를 잡고 앉아 조는데
啇客依舷擊莭歌 장사꾼은 뱃전에 기대어 박자에 맞춰서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
利涉前程知幾許 이로운 여정의 앞길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廣津西去是松坡 광진(廣津) 나루에서 서쪽으로 가니 이곳이 송파라네.

[주1] 여주 청심루(淸心樓) : 現 여주시 여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청심루(淸心樓)는 고려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이색·정몽주 등 고려의 대학자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성종·중종·숙종·영조·정조 등 여러 임금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특히 숙종의 어필이 걸려 있었던 유서 깊은 유적이다. 우암 송시열은 큰 글씨로 ‘淸心樓’의 현판을 새로 써서 걸어 놓기도 하고, 김종직·최숙정·김안국·이항로·정약용 등 조선의 대표적 선비들이 100수 이상의 시문을 남긴 국가적 명소였으나, 1945년 군수관사의 소실 때 함께 불 탄 것으로 전해진다.  옛 문헌에 여주의 누정으로 소개된 것 중 현재는 없어진 누정 유적으로는 청심루, 침류정, 범사정, 육우당, 사우당, 침석정, 금강루, 이화정 등 8개 유적이다.  

[주2] 앙덕리(仰德里) : 본래 여주군 개군면의 지역으로서 동명(洞名) 유래가 한 가지 전해 오고 있다. 먼 예전에 안동 김씨 효문공(孝文公)이 낙향(落鄕) 은둔하여 지역 백성들에게 선정(善)을 베풀어 주민 모두가 그의 인격에 추앙심을 지녔다는 데서 앙덕이라고 연유된 지명 일설(一說)이 구전된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앙덕리라하여 오늘까지 전하는 지명이며, 1963년 1월 1일부터 양평군으로 편입되었고, 1988년 8월 1일 기준에 2개 반 편성 마을이다. 앙덕나루는 남한강 앙덕포구에서 여주군 산북면 용담리로 건너 다니던 나루. [주3] 광진(廣津) :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 풍납동 사이, 한강을 오가던 나루.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3) 대탄을 지나며[過大灘]. 대탄(大灘)은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남쪽 10리 지점의 여강(驪江) 하류로 용진강(龍津江 북한강)과 합쳐지는 곳이다.
地水爭流集 대지의 물이 다투듯 흐르다 모이고
天河直瀉來 은하수는 곧게 쏟아져 내려와
激噴騰沸雪 격하게 뿜어내는 하얀 눈이 분분히 일어나더니
號努闐殷雷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 격하게 들려온다.
却立群峯竦 문득 우뚝 솟은 뭇 봉우리가 서 있고
驚奔大陸廻 대륙을 빙빙 돌다가 놀라 달아나듯 흐른다.
瞿塘十二險 구당(瞿塘)의 열두 협곡이 험난하다는데
孰與較碓哉 누구와 더불어 좋은 절경 구경하리오.

[주] 구당(瞿塘) : 원래는 중국 양쯔강 험난한 삼협(三峽)중에 으뜸인 협곡을 일컫는 말이다. 삼협은 양쯔강 6397km 물길에서 석회암이 용식 침식돼 형성된 세 개의 협곡인데 충칭직할시와 이창 후베이 성 사이 협곡 취탕샤(瞿塘峽)이다. 우리나라 삼협(三峽)은 경기 충청 강원 3개도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으로, 충북 장호원 경기 여주군 강원 원주시, 남한강 청미천 섬강이 만나는 곳을 삼협(삼합)이라 불렀다.

4) 단강에서 배를 기다리며[丹江待舟].
黃驪江上待行舟 황려강에서 오가는 배를 기다리는데
枕石亭前水漫流 침석정 앞의 강물이 질펀하게 흐른다.
一日如年丹室客 붉은 집의 나그네는 하루가 일 년 같구려.
三時錯認白巖洲 흰 바위 물가에서 세 때나 잘못 알았다네.
主人歛釣磯頭望 주인은 낚시를 좋아해 물가 바위를 바라보는데
津子褰蓬渡口畱 물가 아이들처럼 옷을 걷어 올리고 나루에서 기다린다.
忽見棗灘三兩舳 갑자기 조탄(棗灘)강에서 두서넛의 배가
乗風飛下若相謨 서로 도모하듯, 바람타고 날아 내려오누나.

[주1] 황려강(黃驪江) : 여주군을 관통해 흐르는 남한강(南漢江)을 여주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일컫는다. 여강은 여주를 라말려초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었던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주의 강이라는 자부심과 애착이 오롯이 그 이름에 담겨있다.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던 조선 전기의 이름난 문인 서거정은, 여주 남한강에 대해 “멀리 동쪽에서 몇 백리를 흘러 내려온 강물이 여주에 이르러 강폭이 점점 넓어져 여강(驪江)이 되었는데,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고 하였다. 옛 문헌에는 여강을 상류부터 단강, 여강, 기류로 나누었는데, 여강 위의 단강(丹江) 부근은 자산 아래 합류하는 곳이 물이 깊어 수려한 경관을 간직하고 있으며, 여강 아래의 기류는 양화나루에서 하자포나루까지의 금사면 지역으로 넓은 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고 관망이 좋아 특히 사대부뿐만 아니라 정객들이 선호해온 곳이다.

[주2] 침석정(枕石亭) : 침류정은 여주시 대신면 금사리 침류정 마을 강변에 있었던 고려말기의 누정으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고려말기의 명재상 곡성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의 아들 염흥방(廉興邦)과 관련이 있다. 침석정(枕石亭)은 단강(丹江) 부라우 나루 주변 단암(丹巖) 민상공고택(閔相公古宅)의 터와 가깝다. 예서체로 단암(丹巖)이라고 바위에 각자되어있다. 단암은 민진원(1664-1736)의 호로, 그는 민유중의 아들이고 인현왕후의 동생이다.

[주3] 조탄강(棗灘江) : 강원도 태백시 골지천을 일컫는 이름이다.

5) 뱃길속의 비바람[舟中風雨]
東風細雨颯生寒 동풍의 가랑비가 바람소리 일으켜 싸늘한데
舟子廻舟入下灘 뱃사공이 배를 돌려 여울 아래로 들어간다.
倦客披衾仍委席 고달픈 나그네가 이불을 헤치고 자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니
行人搔首摠欹冠 행인은 머리를 긁으며 언제나 머리를 갸우뚱한다.
雲煙滅洖愁難穵 구름과 연기가 사라지니 시름을 비우기 어려운데
山水冥濛夢和看 산수(山水)가 어둑하여 꿈속에서 보는 듯,
頼有詩朋能起我 시(詩)짓는 벗에 의지하여 나를 능히 일으키니
高吟隨處此心寬 가는 곳마다 마음속에 맺힌 한(恨)을 소리 높여 읊노라.

6) 강에서 놀며[江遊] 한강의 하류에서
玄江一道海門通 현강(玄江)은 바다어귀와 한 가지 길로 통하는데
選日扁舟與子同 기약한 날에 조각배타고 그대와 함께 하였네.
宛彼中流恣近遠 저 완연한 강 가운데서 제멋대로 가깝다가 멀어지는
飄然浮卋任西東 덧없는 세상에서, 둥실둥실 오고갔구나.
遙岑簇簇晴含黛 먼 산봉우리 뾰족뾰족, 푸른빛 맑게 머금었는데.
細浪粼粼乍起風 갑작스런 바람에 잔물결이 맑디맑게 일어난다.
載得琴歌聊叙暢 거문고에 맞춘 노래 싣고 유창하게 애오라지 이어 부르니
玆遊嬴得樂時豊 이번 유람은 즐거운 때가 가득하여 알차게 보냈구나.

[주] 여자동포(與子同袍) : ‘자네와 두루마기를 같이 입겠네’라는 뜻으로, 친구 사이에 서로 허물없이 무관하여 하는 말.

7) 미호 강에서 숙박하다[舟宿渼湖]. 미호(渼湖)는 남양주 한강을 일컫는다.
向老求閑未濟翁 늘그막에 한가로움 구하려하나 이루지 못한 늙은이가
扁舟來宿渼湖東 조각배로 동쪽 미호로 자려간다네.
一年今夜偏宐月 일 년 중에 오늘 밤의 달이 유달리 좋아서
半日高帆恰受風 한나절 돛단배가 바람 받아 유유히 달린다.
笑語頻驚閑鷺睡 우스갯소리에 한가한 백로가 졸다가 자주 놀라는데
起居平壓老龍宮 거처가 편안한 용궁이 된 듯 안정되었다.
雲林小蕁知何處 구름숲에 작은 지모(蕁)가 어디에 있는지 어이 알리.
上峽靑峰若箇中 골짜기 위의 푸른 산봉우리가 이와 같은 이치일세.

8) 석호정에 정박하고 새 거처로 들어왔다[泊石湖亭入新居]. 서울시 송파구.
春水東湖晩泊舟 봄날 동호(東湖)의 강물에 늦게까지 배를 정박하고
相公歸卧有山樓 재상이 벼슬 버리고 돌아와 누운 산 누각이 있다.
幽鶯知止花生樹 꽃 핀 나무에 숨은 꾀꼬리도 노래 그칠 줄 알고
睡鷺忘形月滿州 체면 없이 조는 해오라기에 달빛 가득한 마을일세.
門掃風埃延野色 바람이 문 앞의 티끌을 쓰는데 들판의 경치가 이어지고
庭鳴瑶佣引泉流 새가 우는 정원에 샘물을 끌어오니 아름다움 더하네.
一枝饒我鷦鷯樂 한 나무 가지의 뱁새가 즐거이 노래하니 내 더욱 신나는데
從此南隣自可留 이로써 남쪽 마을에 절로 머물 만하구나.

[주] 남린(南隣) : 남쪽 마을을 일컫는데, 중국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이 남린(南隣)에 살고 있었다. 가난 때문이 아니고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 때문에 그 곳에 살았는데 어느 가을날 그 분을 찾아가 ‘남린(南隣)’이란 시를 지었다.

長松和雨翳江湄 강 물가에 그늘을 만들던 큰 소나무가 비에 젖었는데
洞裏人家深不知 골짜기의 인가(人家)는 솔이 무성해도 알지 못했다.
漸覺淸凉生步履 점차 맑고 서늘함을 깨닫고 발걸음을 옮겨가는데
遂令蒼翠動鬚眉 이로 인해 싱싱한 푸름에 수염과 눈썹 동요되었다.
紅塵不到懸車地 속된 세상이 다다르지 못한, 벼슬 버리고 늙어가는 땅,
黃鳥偏鳴送客時 꾀꼬리도 객을 보내는 시절에만 울고나.
谷口逍遙隨杖屨 소요하는 골짜기 어귀에서 지팡이와 신발을 따르니
晩年薖軸竟云誰 만년에 한가한 은거생활 어느 뉘가 이와 같으랴.

[주] 과축(薖軸) : 과축은 시경(詩經) 고반(考槃) 편에 나오는 말로, 한가한 은퇴 생활을 뜻한다.

階花門柳儼成行 섬돌의 꽃과 문 앞의 버들나무가 의젓이 늘어서고
新闢林庄二水陽 새로이 열은 숲속의 장원(莊園)은 두 개의 물줄기에 양지바른 곳.
山翠滴簾衣欲染 산 빛은 푸르고 주렴의 물방울이 옷에 스미려는데
泉鳴透戶夢還凉 새가 우는 샘물의 집에 놀라 꿈을 깨니 쓸쓸하네.
沉沉世入黃梁枕 깊은 세계에 들어온 황양(黃梁)의 꿈이런가.
滿滿公酬綠野觴 넘치는 공의 접대는 녹야(綠野)의 술잔이로세.
也知地靈終有待 알겠노라 땅의 영묘(靈妙)함이여~ 끝내 덧없는 인간의 몸,
始敎楱莾發幽香 비로소 무성한 귤나무에서 그윽한 향기 발하네!

[주1] 황양침(黃梁枕) : 중국 당나라 노생(盧生)이 한단(邯鄲)에서 도사(道士)를 만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니 도사(道士)가 주머니 속에서 베개를 내어 주며,「이것을 베면 영귀(榮貴)를 뜻대로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객사주인(舍主)는 누런 좁쌀로 밥을 짓고 있었는데 노생이 그 베개를 베고 꿈을 꾸니 부자 최씨(崔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고위(高位)에 올라 영화롭기 비할 데 없었다. 늙어서 고향으로 가고 싶었으나 불허(不許)하여 관직(官職)에서 죽게 되는 순간, 꿈을 깨니 밥이 덜 익었고 옹이 웃으며「인생사(人生事)는 이 꿈과 같은 것이라」하였다. 이 꿈을 한단침(邯鄲枕) 황량몽(黃梁夢)이라고도 한다.

[주2] 녹야(綠野) : 녹야당(綠野堂)의 준말. 당 나라 배도(裴度)가 재상을 그만두고 유우석(劉禹錫)ㆍ백거이(白居易) 등 문인들과 시주(詩酒)를 주고받던 별장. 곧 은거를 지칭하던 말이다.

   
 
9) 서울로 가는 배[舟向京師]
爲憐晴日訪前津 사랑겹네 청명한 날에 앞 나루터를 찾아 나감은,
自有幽期在漠濱 저절로 밀회의 약속이 생겨난 넓은 물가가 있음이다.
夜宿湖亭淸夢寐 숙박한 호수의 정자에서 밤새 꿈이 선명하였는데
朝登江舶稳心神 아침에 강가의 배에 오르니 마음이 편안하다.
紅翻碎浪昇初旭 부서지는 물결 속에 붉게 나부끼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綠隱長洲送晩春 푸른빛 가득한 긴 물가에서 늦봄을 보낸다.
泊向靑門門外路 동대문으로 향하는 문밖의 길가에 배를 정박하는데
終南山色喜迎人 종남산(남산)의 산 빛이 사람을 기쁘게 맞아주네.

10) 돌아오던 돛단배 갑자기 바람을 타고 돌아가네[歸帆御風冷然而返]
西風觧纜杜湖灣 서풍에 닻줄이 풀리어 호수 물굽이를 막았는데
靑幔摇摇翠浪間 푸른 돛천막이 푸른 물결 사이에서 심히 흔들거리네.
沙際紟妆江北樹 모래펄 가의 강 북편 나무가 옷깃을 단장하고
帆前趨走漠南山 돛단배가 지나가니 허리를 굽히어도 남산은 그윽할 뿐.
飛花落絮齊相送 휘날리는 꽃이 솜이 떨어지듯 서로를 전송하는데
飄鶴流雲廻莫攀 흐르는 구름 속에 나부끼던 학이 오르지 않고 빙빙 돌다가
坐到石林俄忽頃 홀연히 바위 무더기에 이르러 잠깐 내려앉는다.
此身短在夢中還 이 몸이 꿈속에서 깨어나 숨 가쁘게 살펴본다.

11) 강물이 넘치다[江漲]
横擣直撞勢競誇 세력을 서로 다투며 제 세상인양 좌충우돌 하는
百川奔集浩無遮 온갖 하천이 달리다 모인 곳은 막힘없이 드넓다.
倒來急萊流雲氣 흘러가는 구름이 뒤집어지고 엉켜 거칠게 오더니
湧起驚輪蕩日華 물이 솟구쳐 깜짝 놀라보니 태양이 일렁인다.
沉墊幾何能不痗 물에 잠긴다면 얼마나 힘들지 않다 할 수 있으랴마는
壯觀如是亦云嘉 이 같은 아름다움을 일컬어 장관(壯觀)이라고도 한다.
沿江父老偏搔首 강 연안 노인이 걱정스레 한쪽 머리를 긁는데
被害秊秊近水家 강가 가까운 집은 해마다 피해를 입는다하네.

[주] 백천학해(百川學海) : 온갖 내는 바다를 배운다는 뜻으로, 바다나 강은 같은 물이지만 강은 바다를 배우며 흘러서 마침내 바다로 들어감, 즉 사람이 학문을 배우는 데 있어 가져야 할 자세를 비유해 이르는 말.

   
 
● 조선후기 이행기문학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는 단순한 과도기가 아니라 그 나름대로 뚜렷한 특징을 가진 독자적인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에 의한 혼란과 병폐를 체험한 사대부나 백성들이 현실인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눈을 떠는 시기이기도 했다. 아름다움만 소중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사물의 원리나 인간본성을 궁구한 바탕위에서 시를 창작해야한다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문학 구비문학 국문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현실사회의 다면적 면모와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 문학 담당층이 최하층까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자기성찰을 통해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고 풍자하는데 더욱 주목하였다.

허균(許均 1569~1618)은 “허위에 찬 구속에서 벗어나 험난한 경험을 하는 정(情)이야말로 문학의 진실성을 보장해주는 근거라고 했다. 이민성(李民宬 1570~1629)은 농민시와 악부시를 한시로 한역해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며, 한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후 같은 시기에 여러 문인들이 민간의 노래와 역사적 사실을 연작시로 한역하기 시작한 것은, 이전에 실험적으로 몇 편을 읊은 것과는 다른, 시대적인 큰 변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문학이라는 틀에서 이루어진 변화였지, 국문학이 문학 전반에 나서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성리학적 문학관인 정통 한문학은 그동안 중세 가치관을 상징해 보수적∙형식적이었는데, 고답적이고 복고적인 표현방식과 격식화된 시문으로 인해 사회변화를 지연시키는 구실을 해왔다. 본래 한문학은 시(詩)와 문(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문은 실제적인 내용과 공식적인 효용으로 인해 문학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했다. 시(詩)는 세속의 굴레에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형이상의 것으로 하늘에 속하고, 문(文)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과제에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명을 의식하면서 형이하의 것으로 땅에 속한다고 인식하면서 문도 형이상의 것에 가깝도록 그 영역의 변화와 태도를 바꾸어야함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문장의 평가는 도(道)가 아니라 미(美)라고 여기면서, “시는 천기(天機)이다” 즉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구현하면서 기교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선악의 대립관계를 줄곧 강조하며 문학은 음란하거나 번잡한 소리를 배제하고 천리지정(天理之正) 즉, ‘하늘의 이치를 바로잡는다.’라면서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한다고 강설하였다. 그런 기준에 반하는 문학은 발붙일 수 없게 비판하니 문학의 독자성과 사상의 자유는 용납지 않았고 주자의 학문에 의거해 규제를 받아야만했다. 노론의 권세가 조선말기까지 이어져,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물론이고 문화예술까지 중세의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걸음마로 천천히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성리학적인 문학관에 의거해, “시는 성정(性情)의 나타남이고 천기(天機)의 움직임이다.”고 하면서 성정론과 천기론을 아우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으며, 김만중(金萬重 1637년~1692년)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의 한글 소설을 짓기도 했다.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마음의 소리여야 한다. 그러니 형식도 자유로워져야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문(文)도 17세기부터 커다란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홍길동전 임경업전 박씨전 등의 국문학 작품이 등장하면서 18세기에 이르러 우화소설 중국번역소설 등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으로 당∙송(唐宋) 이전의 고문을 찾고 성리학 이전의 유학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기에는 이미 문학의 큰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 밀려오고 있었다.

사대부에게 문학 활동의 본영역은 한시였는데, 여가활용과 권력진출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17세기부터 일부 선각자 사이에서 삶의 진실을 찾는 고난에 찬 탐구영역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실학파문학이 등장하였다. 실학파 문학은 사회모순을 비판하고 개혁의 방향을 찾고자 했으며 올바른 선비로서 기존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창조하는 문학을 창조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삶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며 세상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어야함을 강조했다.

이에 이익 이용휴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이옥 정약용 김려 이학규 등이 있었는데 옛사람의 글을 흉내 내지 말고, 그대로의 상태에서 무엇이던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배합하고 서술시점도 다양화하여 역사 풍속을 물론 사회사상의 각성과 실용적인 가치로써 문학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옥 정약용 김려 이학규는 유배지에서 그들이 남긴 문학에서 역사 풍속 민요 전설 민담 등을 한역화하였고 여러 악부시(樂府詩)는 물론, 수많은 민중의 노래를 문학화 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더욱 전진적으로 전개시켜, 근대적 개화사상에 연결시키는 교량적 역할을 수행한 최한기(崔漢綺 1803~1879)는 “무릇 이른바 문장이 운화(運化)하는 기(氣)에서 유래하지 않고 운화하는 기와 어긋나면, 다만 무력(無力)하고 무신(無神)해서 아름다운 표현을 갖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뜻을 혼란하게 해서, 도움이 되는 바가 없다.”고 했다. 즉 이 말은, “문장은 실제로 움직이며 활동하는 기(氣) 또는 객관적인 현실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져야만 힘이 있고 생기를 띠며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다른 글에선 “용이 꿈틀거리는 형체를 갖추고 만화(萬化 끝없이 변화함)를 녹여서 지닌다.”고 했다. 원칙론에 머문 일반적인 이론이지만, 중세 규범주의의 문학을 청산하고 근대 사실주의 문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부터 현실에서 생동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작품과 우리나라 고유의 풍속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19세기 전반 위항문학(여항)이 성리학적 사대부문학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위항인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지위상승을 꾀하여, 위신을 갖추고자 시집을 펴내고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세계를 개척했다. 하지만 실학파문학과 위항문학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의 한계를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비록 이행기를 중세로 역행시키지 못하게 하였고 근대로 순행하도록 한 점은 있으나 국문학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민중예술에 새로운 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했으며, 또한 대중화하지 못해, 제한적 울타리에서 맴돌았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론적으로 이행기 문학은, 인간의 시선을 편견 없이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감정과 본질을 성찰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아름다운 창조의 시대를 열 수 있었으나 사회적 규범과 시대문화의 공고함에 따라, 다양화된 시민∙국문학으로 나아가기에는 벅찬 현실이었다. 그러나 민중의식이 성장하면서 점차적으로 사대부문학이 퇴장하고 시민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근대문학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시민문학’이 태동하였고, 사설시조 잡가 탈춤 판소리, 상품화된 소설 등, 새로운 문학을 창조한 주도권이 19세기 후반부터 시민과 하층 민중에게 넘어와 본격적인 근대문학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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