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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치자 꽃향기(梔子花香)[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남쪽 거제도의 겨울, 차가운 해풍(海風)에도 집 가까운 남새밭에서 언제나 푸른빛 광택을 내는 식물이 있다. 황금색의 열매를 달고 파란 잎을 유지한 채 겨울을 나는 치자나무는 6월에 6장의 하얀 꽃잎을 피워 코끝을 찌르듯 짙고 달콤한 향기를 내 뿜는다. 가을이면 흰 꽃에서 흰 열매가 맺을 법도 하거늘, 치자 열매는 붉은 듯 노란빛을 띄운다.

치자(梔子)의 한자어 치(梔)는 술잔 치(巵)에 목(木)자를 붙였는데, 그것은 꽃모양이 ‘술잔’ 같다하여 붙여진 것이고 자(子)는 염료로 쓰는 열매(子)가 달린다하여 붙여져, 치자(梔子)라 일컬었다. 여섯 개의 하얀 설꽃(雪花)에 풍녀(風女)의 은밀한 음기(陰氣)가 엉겨 나부끼는 치자꽃! 어느 누군들 그리운 여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예로부터 치자나무는 초여름 장마의 시작과 종료를 관측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치자나무에 첫 꽃이 피면 장마가 시작되고 마지막 치자 꽃이 지면 장마가 끝난다고 한다. 치자나무는 우리나라 따뜻한 남해안과 도서지방에서 잘 자라며, 키가 2~3미터 정도로 작은 상록수로서,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치자나무나 치자꽃을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담복(薝蔔)으로 쓴다. 《삼국유사》〈탑상〉 제4의 ‘만불산’ 이야기에 담복(薝蔔)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삼국시대부터 벌써 우리 곁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고, 초여름에 흰빛의 꽃잎에서 짙은 향기를 풍긴다. 흔히 보이는 꽃들은 대부분 꽃잎이 다섯 장이지만, 치자나무는 여섯 장의 꽃잎을 갖고 있다. 열매는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긴 타원형이고, 세로로 6~7개의 능선이 있다. 열매는 가을에 접어들면서 연붉은 주황색으로 익는다.

거제도 유년시절, 치자열매 민간요법이 여러 있었다. 다리나 허리를 삐었을 때나 배가 아플 때, 치자열매 가루를 밀가루에 개어, 아픈 부위에 붙여 동여매곤 하룻밤을 지나면 이상하리만큼 깨운하고 시원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신경통에 좋다고 하늘수박과 치자열매 진액을 막걸리에다 조금 넣어 마시기도 했다.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있었던 치자나무에 열매가 익을 때면, 치자열매를 바늘로 꿰어 주렁주렁 처마나 방안에 매달아 놓았다가 제사나 차례 지낼 때 양재기에다 치잣물을 만들어, 생선을 노랗게 염색해, 생선전을 붙이곤 했다. 결혼 예단 음식에도 치잣물을 들여서 곱게 꾸미었고, 밀가루에 꿀과 소금을 쳐서 풀같이 끓인 것을 치자꽃에 발라서 기름에 띄워 지진 음식인 담복화전(薝蔔花煎)도 있었다. 또한 모시옷을 황금빛 색깔로 물들이기도 했으며, 아이들은 치자열매로 장난감 팽이를 물들여 곱게 단장 하곤 했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암 홍만선(流巖 洪萬選:1643년~1715년)이 지은 농업 책이자 가정생활 책인《산림경제(山林經濟)》내용 中, 《치화잡조(梔花雜俎)》에는 화훼류(花卉類) 중의 명품(名品)은 치자이다. 치자화(梔子花)를 일명 담복촉(薝葍蜀)이라고 하는데 붉은 꽃이 피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훼(花卉)서적은 1450년대 나온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인데 이 책에서, “모든 꽃은 꽃잎이 여섯 장인 경우가 거의 없는데 오직 치자꽃만이 여섯 장의 꽃잎[六出]이다.” 또한 "꽃 빛이 흰 것, 향기가 맑은 것, 겨울에도 윤기 있는 싱싱한 푸른 잎, 황금색 물감으로 쓰이는 열매.“를 치자의 4가지 아름다움으로 꼽았다. 또한 ‘꽃 중에 가장 고귀 한 것’이라고 극찬했다.

   
 
○ 거제도를 비롯한 남해안은 따뜻한 기후로 인해 천년 세월 동안 치자나무가, 이 땅의 선조들의 고단한 삶과 아픔을 맑게 정화하고, 멋과 깊은 향내를 가슴속 깊이 안겨주었다. 또한 거제도로 유배 온 이들에게도 삶의 희망을 이어주고 궁핍한 마음에 훈훈한 위안이 되었다.

1) 밤에 앉아 생각에 잠겨[夜坐有懷] 택지(이행 李荇)에게 보이다(示擇之). / 직경(直頃) 홍언충(洪彦忠) 1506년 거제시 장평동.
獨坐茅簷下 띠로 인 처마 아래 홀로 앉아
蒼茫夜氣存 창망한 밤기운을 맞을 때
蟲聲連遠巷 벌레우는 소리가 멀리 문밖 마을까지 이어지고
月影半荒園 달그림자는 황폐한 정원에 드리운다.
滴露光梔葉 이슬이 방울지어 떨어져 치자나무 잎에서 빛나고
孤螢翳菜根 외로운 반딧불은 채소뿌리에 숨는다.
三韓方丈外 삼한은 방장산 바깥에 있다는데
亦有客愁村 나그네 수심은 마을에 있다네.

2) 자진(子眞 최숙생)에게 화답하며[答子眞] 二首, 음력 6월 초. 정덕 병인년 봄 1506년 2월에 거제도에 귀양 가서 지은 글임(正德丙寅春二月 赴巨濟以後作) / 이행(李荇 1478∼1534) 거제시 상문동.

자진의 편지에, “이제 치자를 심었고, 또 대를 심어서 천 가닥 푸른 그림자를 보고자 한다.” 하였기에, 희롱 삼아 절구 두 수로 답한다. 위의 한 수에서는 그가 속히 방환(放還)되기를 송축하였고, 아래 한 수에서는 현 처지에서 그를 조금 위안해 주려 하였으니, 또한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 주기 위한 말들이다(子眞簡云 今種梔子樹 又欲種竹 要看綠影千竿 故戲以兩絶答之 上一絶 頌其亟放歸 而下一絶 欲少安於斯也 亦所以寬解之語).
支子着花不足翫 꽃을 단 치자도 완상하기 부족하니
竹林結實那能食 대숲이 열매 맺기로 그 어이 먹을쏘냐.
故鄕泉原望來久 고향 산천이 그대 오길 바란 지 오래니
莫待支花與竹實 치자꽃과 대 열매 맺길 기다리지 마시라
支子開花能悅目 치자가 꽃 피우면 눈을 즐겁게 하고
竹林生筍可充腹 대숲에 죽순 돋으면 배를 채울 수 있지
支花已落竹筍老 치자꽃은 이미 지고 죽순은 늙었으니
快馬輕裝歸亦速 빠른 말 가벼운 여장으로 고향에 돌아가리.

3) 치자꽃 향기[梔子花香] / 고영화(高永和) 거제시 일운면.
子色黃金嫩 열매 빛은 황금같이 부드럽고
花憐白雪香 꽃은 어여뻐 흰 눈처럼 향기롭네.
船穿水中月 배가 물 가운데 달을 뚫듯이
梔傳鼻端香 치자 향기가 코끝으로 전해오네.
六出奇葩含淡香 기이한 여섯 꽃잎 피워 은은한 향기 머금었는데
梔花風軟村淡香 하늘하늘 치자 꽃바람에 온 마을이 향긋하다.
又有歲寒葉靑靑 또한 겨울에도 푸릇푸릇 잎이 있으니
喚得心身尤淸香 돌이켜 얻은 몸과 마음에서 향기 더욱 맑아지네.

4) 치자 꽃(梔子) / 청마 유치환(1908~1967).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 가는 고향의 슬프디 슬픈 해안통(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천막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청마 유치환은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시조시인 이영도 여사와 20년 동안 연서를 주고받았는데, 위 시편에서 모시적삼 고운 여인 이영도를 치자 꽃에 비유하였다. 치자꽃은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으며 은은하여 자꾸 그리워지는 꽃이다. 은밀(隱密)하게 정(情)이 깊어 음흉(陰凶)스럽고 그윽하니 언제까지나 지켜보아야 할 것 같은 순백의 꽃이기도 하다. 치자꽃 향기에 의해, 그리운 여인을 떠올리고 해안통 곡마단의 서글픈 인생이 이어지며 으스름 저녁에 자신의 심장을 춤추게 만든다. 여섯 개의 하얀 눈(雪花)에 풍녀(風女)의 음기(陰氣)가 엉겨 있는 치자꽃 모양, 어느 누군들 그리운 여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치자꽃 향기는 ‘은밀한 사랑으로 다가오는, 향내 나는 눈(香雪)의 유혹이자 그리움’이었다.

5) 치자나무[梔子花] / 김수온(金守溫 1410~1481)
梔子來何處 치자나무는 어디에서 왔는고.
盈盈自結花 꽃이 열매되어 아름답게 달렸구나.
孤叢來水國 바닷가로 온 한 떨기
粉艶惹江波 고운 꽃이 강 물결에 이끌었네.
引綠柔條嫩 어린 초록 싹에 눈길이 가는데
裁靑密葉婆 촘촘한 푸른 잎의 자태로다.
秋風打垂實 가을바람에 열매를 드리우다가
猶得染彤紗 비단을 붉게 물들이겠지.

   
 
6) 치자를 훔쳐보다[梔子見偸] / 정운희(丁運煕) 조선중기.
綠葉藏紅未 푸른 잎이 아직 덜 붉은 빛을 감추었는데
寒丹被此兒 옷을 붉게 물들이어 이 아이에게 입히리라.
能言無賴鳥 무뢰한 새여~ 소리 하도 시끄러우니
休更近空枝 가까운 빈가지에서 기다려주오.

7) 치자[梔子] / 이서(李漵 1662~1723) 조선후기 문신.
鮮支黃爍氣自和 치자 열매의 누런 빛깔 기운이 절로 훈훈하고
簷葍吾知得香多 첨복(簷葍)이 향기가 많음을 나는 알고 있다.
四德常主四時氣 4가지 덕에다 사시사철 기운을 늘 지녔는데
六稜元因六出花 여섯 돌출 모서리도 원래 여섯 꽃잎 때문이다.

[주] 첨복(簷葍) : 첨복은 황화수(黃花樹) 또는 금색화수(金色花樹)라는 나무로, 이 나무는 높고 크며 꽃향기는 바람 따라 멀리 퍼진다고 한다.

8) 치자꽃[梔子花] / 성삼문(成三問 1418~1456) 韻字 ‘陽‘
子愛黃金嫩 열매는 황금빛 아름다움이 사랑스럽고
花憐白玉香 백옥색 꽃에 향기가 어여쁘구나.
又有歲寒葉 또한 겨울에도 잎이 있어
靑靑耐雪霜 푸릇푸릇 눈과 서리를 이겨낸다네.

9) 치자나무[梔子花] 三首 / 이충익(李忠翊 1744~1816)
女貞扁薄山茶俗 여자의 지조가 동백꽃 풍속처럼 얇다 해도
薝葍花前讓數籌 치자 꽃 앞에서 자랑 말라 한다네.
還似蘭亭稧中客 난정(蘭亭)에 모인 벗들처럼 돌아가
不修邊幅自風流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도 스스로 멋스럽구나.

六銖輕薄仙衣冷 육수의(六銖衣)가 가벼워 신선의 옷같이 차갑고
七寶欄楯佛座嚴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는 부처의 자리 엄숙하다.
香氣吾無隱乎爾 향 연기가 “나는 너희에게 감춘 게 없다.”하니
小參三敎一時拈 스승에게 문답한 3가지 가르침을 금방 깨우쳤다.

葉葉枝枝相準向 잎새와 가지마다 서로 맞추어 향하는데
無量經裏舊聞殊 한량없는 경전 속 글에서 특별하다 들었다.
白衣大士西來日 관세음보살이 서쪽에서 돌아 온 날에
猶着花冠絡寶珠 화관(花冠)을 쓰고 보주(寶珠)로 둘렀다네.

[주1] 난정첩[蘭亭帖] :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가 3월 3일에 벗들과 더불어 난정(蘭亭)에서 모여 놀고 각각 시(詩)를 짓고 자신이 서문(序文)을 지어 그의 득의한 글씨를 서수필(鼠鬚筆)로 고치 종이 쓴 것이 난정첩이다.
[주2] 불수변폭(不修邊幅) :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다. 소소한 예의범절과 형식에 구애되지 않다. '변폭(邊幅)'은 천의 변두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옷차림새나 생활 작풍을 가리킨다. 
[주3] 육수(六銖) : 육수의(六銖衣)를 가리킴. 불가어(佛家語)로 매우 가벼운 옷을 일컫는 말.
[주4] 오무은호이(吾無隱乎爾) : ‘나는 너희에게 감춘 게 없다’는 내용으로서 ‘참된 스승의 모습’을 뜻함.

10) 치자[梔子] / 성현(成俔 1439~1504)
旃檀未是香 향나무라고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薝葍最芬芳 치자나무가 최고로 향기롭다.
群樹蔽南土 수많은 나무가 남쪽 땅을 가리었는데
寸根移北方 작은 뿌리는 북방에서 옮겨왔다.
素花披雪殼 흰 꽃이 눈 조각처럼 나뉘고
靑顆束蓮房 푸른 낱알에 연꽃을 동여맨 듯,
只得盆中翫 부득이 동이 안에서 탐하니
非關取染黃 누런 염색과는 관계없다네.

[주] 전단(旃檀) : 인도(印度)에서 나는 향나무 이름. 조각도 하고, 뿌리와 함께 가루를 만들어 향으로 쓴다. 전단수(旃檀樹)는 인도에서 나는 향목으로 향기가 진하다.

○ 해 저물자 정지(부엌)에서 솔가지로 불 지피니 남새밭(난서밭)에서 바람 불어와 은은 달콤한 치자향기가 어지럽다. 어머니의 청정한 얼굴에서 뿜어 나오는 깊고도 그윽한 사랑의 향기이다. 으스름에 바라보는 꽃은 새치름한 눈매에서도 가버린 이에 대한 아쉬움을 찾아낼 수 있는 소복의 여인처럼 언제까지나 지켜보아야 할 것 같은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늦봄에는 치자 나무에 하얗고 탐스러운 꽃이 피는데, 향기가 과자처럼 달콤하고 그윽하다. 노란 꽃술 무더기에서 퍼져 나와 코끝을 살짝 스칠 때 느껴지는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더더욱 기다리는 이를 감질나게 한다. 그래서 선인들은 술잔에 꽃잎을 띄워 마시고, 꽃잎으로 술을 담그기도 하였다.

치자는 일반치자(홑치자)와 꽃치자(겹치자)가 있는데 일반 치자는 은은한 향기를 내지만 꽃치자는 예쁘고 아주 진한 향기를 낸다. 남해안의 치자는 대부분 일반치자로써, 황금색의 열매를 맺어 옷감이나 전이나 튀김 등에 노란 물을 들이는데 사용하지만, 겹치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한방에서 열매는 치자, 잎을 치자엽, 꽃을 치자화, 뿌리를 치자화근이라 한다. 열을 내리고, 습을 내보내며, 피와 폐를 맑게 하고, 독을 없애며, 피를 멎게 하고, 염증을 가라앉힌다. 〈동의보감〉에도 “치자는 성질이 차서 열독을 없애고, 속앓이와 화닥증(짜증)을 낫게 하며, 입이 마르고 눈과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여섯 장의 큰 꽃잎 위에 소복소복 피어난 순백의 꽃잎들은 근접할 수 없이 고결하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의 멋과 고결한 심연에 깊은 순결함을 지켜온 치자는 봄에는 하얀 미백색의 꽃을, 가을에는 주황색의 열매를 감상할 수 있다. 꽃말은 순결, 행복, 청결이다.

치자꽃향(梔子花香)은 “언제나 우리 내면에 남아 있는 여향(餘香)이자, 인간의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켜온 고향의 향기(鄕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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