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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배 정황(丁熿))의 새 거처[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정황(丁熿 1512~1560년) 선생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游軒),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아버지는 필산감역(匹山監役) 정세명(丁世名)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그리고 정황선생은 정직한 문사로 명망 높던 정환(丁煥)의 열여섯 터울 아우이고, 1519년 사림파 김종직 제자인 김굉필(金宏弼) 문하생이, 선생의 스승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이다. 일찍이 형에게 학문을 익혔는데, 철들 무렵 형을 따라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29년 부인 전주 이씨를 맞이하여 1531년 아들 지(至)를 얻었다. 1536년(중종 31)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고 1542년에는 교검(校檢)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 이듬해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1544년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이듬해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545년에 인종(仁宗)이 승하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의 인산(因山)을 서두르자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하였다. 그 해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이 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고‚ 1546년 가족을 이끌고 남원으로 돌아왔다.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으로 곤양(昆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거제(巨濟)로 이배되어 1560년 거제도에서 죽었다.

정황(丁熿)은 1548년~1554년 까지 거제시 고현동 계룡산 아래 배소에서 측실 정(鄭)씨와 장모가 함께 따라와 그를 보살폈다. 거제에서 태어난 호남(好男) 정남(正男) 서얼 두 아들을 돌림병으로 잃게 되었고, 그해 1554년 정(鄭)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1555년 봄에 고현성 동문 대나무가 우거진 시냇가, 큰 바위 곁에다 새 초가 거처로 옮겼으나, 1558년 그의 머슴까지 잃게 된 후부터 극도의 외로움에 구련(拘攣)병[손발이 굳어 못쓰게 된 병]이 걸린다. 1560년 계룡산을 마지막으로 올라가 생을 뒤돌아보며 정리하곤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친지와 제자들이 전라도 장수군으로 옮겨 매장하였다.

1570년에 관작이 복구되었고‚ 1619년에 남원(南原)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708년에 충간(忠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만년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퇴계 이황(退溪 李滉) 등과 교유가 있었다. 학문적으로는 ≪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어, 거제도에서 ≪부훤록負暄錄≫‚ ≪장행통고壯行通考≫ 등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현재 그가 유배지 거제도에서 남긴 문학작품이 700여 편에 이른다.

정황선생은 당시 다른 유배자들과 더불어 매일 한 번씩 거제관리로부터 점검과 보고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배자는 고현동 전체에 흩어져 거주했으나 선생은 고위관료로서 인품과 덕망을 갖춘 학자였기에 특별히 거제향교 근처에 작은 오두막집을 한 채 사용할 수 있었다. 정황 선생의 작품과 기록 중에 귀양살이 한곳이 언급되어 있는데, 現 거제시 고현동 거제공설운동장 동편 근처로 판단된다. 그 후 을묘년 1555년 봄에 처음 집을 옮겼는데(乙卯春中徒宅初) 고현성 동문 시냇가 주변이었다. 1555년 봄 고현성 동문 시냇가 주변에 거처를 옮긴 거제의 정황은 아득하였다. 누이의 부음에 아스라한데, 1558년 머슴까지 사등섬 앞바다에 빠져 죽었다. "생사는 하늘에 있다지만 실로 내가 시킨 것이나 진배없나니, 어찌 차마 네 어미의 절규를 듣고만 있을쏘냐." 그러나 공부를 놓지 않았다.

선현의 학문과 출처, 정론과 병법 등을 발췌한 '장행통고(壯行通考)'와, 충군애국과 덕업공부를 나름 살핀 '부훤록(負暄錄)'을 거제도에서 저술하였고 인근 고을과 고향에서 찾아오는 학자와도 강론하였다. 한편 삼남 각처에 흩어진 선배동료와 소식을 주고받으며 쓰라림을 삼켰다. 김대유·이황·이문건·노수신·김난상·김인후·민제인 등이었다. 그래도 아쉬움은 깊었다. 1553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격렬한 상소를 작성하였는데, 마침 합천의 남명 조식이 찾아왔다가 극구 만류하여 중지한 적도 있었다. 평안도 강계로 유배 갔던 이언적의 부음에는 통곡으로도 부족하였다. "공이 가시다니 어찌할거나? 나라는 이제 일월의 빛을 되찾지 못하겠네!" 1558년 사망 2년 전에 지인 이정과 김하서가 지리산을 넘어 통영을 거쳐 거제의 정황 배소로 와서, 당시 새거처 이 초가집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돌아갔다. 1560년 이른 봄 고현동 바닷가 나루터에, 시든 매화를 집 마당에 옮겨 심고는 정말 기뻐했다. "뿌리가 다쳐서 처음 자란 땅을 떠나기 어렵겠지만, 응당 꽃망울 맺어 그대 우아함을 보여주게나." 그러나 환생을 반길 틈이 없었다. 이해 견우직녀 만나기 바로 전날인 7월6일(음력), 유배 14년을 마감한 것이다.

   
 
1) 해산의 새 거처[亥山新居] 1555년(명종 10) 봄(乙卯春中徒宅初) / 정황(丁熿).
扉臨寺徑徑臨川 사립문은 절가는 길에 임했고 길은 시내에 임했네
屋上層巖巖上天 지붕 위에는 층계 진 바위요 바위 위에는 하늘이라
坤峙鷄龍遮遠眼 땅에서 계룡산이 솟아나 먼 시야를 가리고
乾開城郭暗晴烟 하늘에서 성곽이 열려 맑은 안개가 어둡게 하네.
祠前松栢靑山下 사당 앞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푸른 산 아래에 있고
缺後筠篁碧草邊 (결자) 뒤의 대나무 숲은 푸른 물가에 있구나.
萬物儘知非耐久 만물이 모두 오래도록 견뎌내지 못함을 아노니
祠前缺後是堪憐 사당 앞과 (결자) 뒤, 무릇 뛰어나게 어여쁘네.

1555년 을묘년 봄, 고현성 동문 인근에 정황선생은 새로운 집을 얻어 이사를 하게 된다. 남동쪽으로 흐르던 시내 물가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옆의 집을 지었다. 바위 뒤편에는 고현성 성곽이 이어져 있었고 돌밭 시내주변은 푸른 대나무가 울창하게 덮이고 사당이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초가집은 흙벽으로 둘러쳐 있었는데 매화나무와 오동나무 몇 그루가 주위에 있었고 온갖 잡초더미로 우거져 적막한 배소였다. 그래도 선생은 몇 그루 푸른 솔(松)이 우뚝 서 있는 새로운 거주지로 이사하게 되니, 귀양 사는 몸이지만 기쁨과 감회가 가슴속에서 밀려와 이러한 시편을 남겼다.

2) 寄吳敬夫(謙) 오경부(겸)에게 부치다. 1555년(명종 10) 봄 / 정황(丁熿)
東城城後石磎斜 고현성 동성 성 뒤로 돌 시내가 비켰는데
其上巖邊新卜家 그 위 바위 변에 새로 집을 지었다.
十載前歡同夢寐 10년 전에는 꿈자리 함께하며 기뻐했는데
天涯回首暮雲賖 머리 돌린 거제도엔 저문 구름만 아득해라.

3) 흙집에 부치다(寄土堂) 새 거처 초가에서. / 정황(丁熿)
天地無邊會合同 천지가 끝없는 변방에 함께 모였는데
此生牛女各西東 이승에선 동서로 나뉜 견우직녀이네.
從前准擬長相見 이제까지 헤아려 보면 늘 서로 만나려했지.
今日深情默默中 오늘도 깊은 정이 묵묵히 흐른다.

4) 달빛 아래 매화를 읊다(月下賦梅) / 정황(丁熿)
枯梧獨坐蔭虛簷 오동나무에 홀로 앉으니 빈 처마에 그늘 드리우고
滿地梅梢月下尖 땅에 가득한 매화가지 달 아래 뾰족하네.
爭如雪後孤山夜 어찌하여 눈 온 뒤에 밤중의 외로운 산에서
疎影橫斜伴凍蟾 성긴 그림자 비낀 차가운 달과 벗되었나.

매화가 상징하는 가난은 결코 초라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가장 맑게 해 준다. 청렴결백한 청백리의 정신을 비유하는 꽃이기도 하다. 조선조 중기의 문신,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詩에서,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고 읊었다. 아무리 불우한 환경 속에서 좌절을 맛보며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낸다 하여도 지조를 무너뜨리지 않고 군자의 덕과 선비의 올곧은 기품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황 선생과 지우(知友)였던 퇴계 이황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72제 107수의 매화 시를 쓸 정도로 매화를 남달리 아꼈다. 하지만 정황은 하나 둘씩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5) 매화에게 묻다(問梅) / 정황(丁熿)
新居寂寞沒荒蕪 새 거처는 거친 잡초 더미에 빠져 있어 적막한데
入眼靑松凡幾株 눈에 들어오는 몇 그루 푸른 솔만 범상하다.
矮屋冰宜高戶扇 낮고 작은 집은 문짝을 높게 함이 마땅하고
疲笻只用匝庭隅 지친 지팡이는 다만 뜰 모퉁이를 돌 때 쓴다.
自移君後知心有 그대를 옮겨 심은 후로 그 마음 잘 알고 있으나
已度寒餘吐意無 이미 추위가 지났는데도 필 뜻이 없구나.
初月影邊香獨遠 달 뜨자 그림자 가에 향기를 홀로 피우니
將於貌外不須孤 장차 외견상으로는 외롭지 않으리라.
- 적막한 새 거처는 한편으론 "나그네 거처 쓸쓸하다"로 되어있다(新居寂寞一作旅居寥闃).

   
 

6) 즉사(卽事) 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 정황(丁熿)
日日古城曲 날마다 옛 성(城 고현성)의 모퉁이에서
朝吟復暮攀 아침에 읊조리고 저녁에 부여잡는다.
秋聲蟲觜在 벌레 뿔에서 가을 소리 나는데
歲序斗柄看 한 해의 순서는 북두의 자루에서 본다.
月到鵲橋散 달은 오작교에 이르러 달아나고
風來梧井寒 오동나무에 바람 부니 우물이 차갑다.
無窮雖復會 끝없는 세월 지나 비록 다시 만난다면
作別更爲難 거듭된 작별은 어려우리라.

7) 봄날 거제도 소회[春日巨濟所懷] 韻字 ‘眞’ / 고영화(高永和)
年華悵望入芳春 창망해라 계절은 어느새 꽃다운 봄,
客地悠悠更送春 올해도 객지에서 봄날을 보내누나.
靑春可惜堂堂去 애석해라 청춘은 이미 멀리 떠나갔으니
着處狂吟便有神 가는 곳마다 마음 담아 미친 듯 읊노매라.

雨添新浪水生鱗 비 온 뒤 불어난 파도에 잔잔한 물결 일렁이고
細細輕風漾白蘋 미풍 불어 간들간들 흰 꽃마름 스쳐 가누나.
橫流狂瀾漲海浦 흘러넘치는 미친 바다 물결이 포구를 넘나들고
綠楊鶯語大傷神 버들에 꾀꼬리 소리 울어도 마음 몹시 상하네.

斷盡腸來惱盡人 애간장 다 끊어진 뒤 번뇌로 시달린 몸,
白鷗海語最傷神 갈매기 바다 소리에도 마음 몹시 상하누나.
窮海逢春知老至 바다 끝에서 봄 만나니 나도 이제 늙나보다
故園芳樹夢中春 내 고향 꽃다운 나무는 꿈속의 봄일 뿐이네.

牢落乾坤文筆人 천지간에 고독한 문필인으로
十年古書困風塵 옛 책 잡고 풍진 속에 시달린 십년 세월.
鄕心猶自怨南風 고향 향하는 마음에 남풍을 절로 원망할 뿐,
一樹殘花倦問津 피다 남은 꽃가지에다 나루터 묻기도 지쳤네.

   
 
○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황(丁熿)은 국가에 하나라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강력히 말하며 꺼리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들추어내는 것을 강직한 것으로도 여기지 않았다. 노수신과 함께 명성을 떨쳤는데 죄를 받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라 하였다. 인종임금이 1545년 7월 1일 승화하시자 문정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인종대왕의 국장을 간단히 하려 할 때, 도의정치를 주장하는 정황선생이 역대 국상의 제도와 예법을 들어 그 불가함을 극간하였으니 조정의 중신들마저 윤원형일파의 세도가 무서워 입을 열지 않고 국장행사를 일개 의정부 사인(舍人)인 정황선생만이 상소하여 불가함을 논박했다. 뒤에 성균관학사 윤결(尹潔)이 계속 상소하여 가로되, "큰 행세를 하는 신하가 오직 정황 일인밖에 없나이다(大行之臣 惟丁 一人而己)"라 하였으니 당시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이 걸었던 인생길은 올곧고 까마득해, 앞길을 알 수 없는 눈 먼 맹인의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방심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암흑 속에서 지팡이를 좌우로 흔들고 심장을 펄떡이면서 탐구해 나갔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과 후회 없이 먼 타향 거제도에서, 1560년 13년간의 귀양살이를 뒤로한 채, 병든 자신의 몸뚱아리를 안고 인생을 정리하고자 계룡산에 올랐다. 잔잔한 해풍이 불어오던 황혼의 어느날 저녁에, 거제현의 주산(主山) 계룡산에서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지난 인생을 되돌아본다. 어쩌면 그는 문득 바라본, 거제도의 해질녘 석양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후 1570년 유헌 선생의 충직함에 율곡 이이 선생이 상소하여 관작이 복원되었고, 1619년에는 임실의 영천서원에 제향되면서 홍문관부제학에 증직되었다가, 1708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확고한 덕성(德性)과 온축(蘊蓄)에서 나온 문장은 절박하면서도 저절로 향기가 묻어 나온다. 정황 선생은 거제도 역사상 최다(最多) 유배문학을 남겼으며, 또한 고현동 거제향교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분이셨다. 그의 덕행(德行)과 문장의 도(道)를 기리며 삼가 존경의 념(念)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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