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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을 넘어서[수필]신유현/동인 섬' Ting 문학회원

가본들 아무것도 없다.

어릴 때 마을 앞 큰 산 옥녀봉, 그 너머에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호랑이도 있고 곰도 살고 가끔 형들의 호기 있는 무용담에서만 나타나는 도깨비도 사는 깊은 산중. 그러나 나이 들어 그 산에 오르니 허탈하게도 그 산은 어느 마을의 초라한 뒷산이었다. 그 어느 마을에 살았던 내가 알았던 한 소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만나 서로 확인을 하고 싶다. 그것이 그녀를 만나고 싶은 핑계일지 모르지만,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가끔 내가 누구일까 생각한다. 젊은 시절, 고갈비 안주에 소주 한 병과 매일 하였던 친구들과의 고민, 새삼 이 나이 때 이런 말을 하면 친구들은 4차원이라 하니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궁금한 것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그 나이 때는 뭐 그리도 고민이 많고 세상 걱정을 하였는지

번뇌와 져야 할 십자가가 많았던 젊은 날 방황스럽던 기억이다.

그때 기억의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었을까? 머리에 뿔이 달린 새로운 존재들이 사는 경이로운 세상이 있었을까? 이끼 낀 돌로 변장하는 트롤들이 사는 엘사의 얼음 왕국이 있었을까?

나이들어 보니 없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나의 도깨비도 엘사의 트롤도 만날 수도 찾을 수도 없다. 도깨비는 나의 기억에, 트롤들은 애니메이션 영화 속에 있을 뿐 내가 생각했던 저 산 너머 심연의 세상은 그저 저 산 너머 사는 한 소녀의 또 다른 허구의 뒷산일 뿐이었다.

오늘 병원을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걱정은 우리가 할테니 선생님은 열심히 생활이나 잘하세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따뜻함은 두해 동안의 묵은 걱정을 지우는 지우개가 되었다. 아마도 어릴 적 앓았던 지독한 가난의 흉터가 폐부에 타고난 숯처럼 남아있는 모양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 들은 내 폐부의 그림자와도 같이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살인자의 흔적은 희생자의 몸에 각인되어 과학수사원에서 깨어나듯 우리의 흔적은 우리 기억 속에 선명하고 온전히 남아 새로운 환생을 기다린다. 그 흔적 그 기억이 우리를 규정함에 때론 공허를 느낀다. 우리의 기억이 왜곡되고 변형되면 그것 또한 지금 존재하는 내가 생각하는 나를 규정 하는 것이기에 혼란스럽다.

우리는 그 흔적을 지울 수가 없다. 지우고 싶은 기억은 그림자만 지워질 뿐 그놈은 생각지도 못하는 곳과 시간에 자기 마음대로 내 허락과 상관없이 불쑥불쑥 살아난다. 어떤 것은 트라우마이고 어떤 것은 추억이다. 거대하고 시꺼먼 연기를 휘잡아 흔드는 조그만 불구덩이처럼 아주 고약한 놈이다. 조그만 놈이 성질은 제 멋대로이다.

부처는 설산에서 고행하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없었다. 그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을 보았을 때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의 진리는 자신의 평온한 호흡과 함께 그렇게 시작되었다.

때가 되었다. 트라우마도 추억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때가 되었다. 내가 나를 남 보듯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지금의 나를 넘어서게 되리라. 지금의 나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흔적은 지워지지도 잊혀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 관심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버리는 난처럼 그렇게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비로소 소멸은 더 이상 나에게 있지 않고 그대 기억 저편에 있다.

트라우마도, 그녀를 오토바이에 태워 멀리 데려가고파 자장면 배달을 했던 풋풋함도 있는 그대로의 존재했던 기억 저편의 추억이다. 이제 그것을 그림자로 홀연히 새로움을 위한 나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라면, 나의 여행은 이미 다 이루었다.

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지, 장폴 샤르트르는 왜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 했는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은 왜 그토록 알에서 깨어나러 바둥거렸는지,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이해되는 비 오는 겨울의 어느 늦은 저녁이다.

벌거벗은 채 목욕탕에서 나와 거리를 뛰면서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나 나의 여행을 다 이루었다 하는 나나 거기서 거기다. 어찌 보면 실성, 그러나 둘다 나 하나도 미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이의 눈에 그렇게 비칠 뿐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격정이 평온함과 집착으로 베란다 창에 엉켜 녹아내리는 그런 겨울비를 담담히 바라보는 저녁이다.

뉴스앤거제  n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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