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연재 고영화의 거제산책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제현(巨濟縣)[연재]고영화의 거제산책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성종 때의 인문 지리서이다. 성종 때 명(明)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2년)가 수입되자 王이 노사신·양성지·강희맹 등에 그것을 참고하여 세조 때의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지리서를 편찬케 하였다. 그들은 성종 12년(1481년)에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 17년에 다시 증산(增刪)ㆍ수정하여 35권을 간행하였다. 그 후 연산군 5년에 개수(改修)를 거쳐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이행(李荇) 등의 증보판이 나오니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전55권 25책으로 각 도의 지리를 수록하였는데 첫머리에 이행(李荇)이 쓴 진전문(進箋文)과 서거정 등의 서문, 김종직 등의 발문과 더불어 구본《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실었다. 특히 이행(李荇)은 1506년 거제시 상문동에 유배 온 사실로 인해 거제현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술하였으며, 또한 『신증』부분은 직접 자신이 기재했다. 특히 거제를 읊조린 시가(詩歌) <음영(吟詠)>편에는 선생의 한시를 넣지 않고 자신의 시에 화답한 같은 제목의 한시(漢詩), "십영(十詠) 최숙생(崔淑生)"의 시(詩)를 기술하여 이후 현재까지, 거제 각종 읍지에는 최숙생의 시(詩)가 실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한국고전국역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행(李荇)著.

◯ 거제현(巨濟縣) : 동쪽으로 옥포(玉浦)까지 20리이고 서쪽으로 견내량(見乃梁)까지 37리이며,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는 물길로 3리이다. 남쪽으로 탑곶(塔串)까지 41리이고 북쪽으로 영등포(永登浦)까지 5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바다 가운데 섬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처음으로 상군(裳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顯宗)이 현령(縣令)을 두었고, 원종(元宗) 12년에는 왜구(倭寇) 때문에 땅을 버리고 거창현(居昌縣)의 속현이었던 가조현(加祚縣)에 우거(寓居)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관성(管城)과 병합하였다가 곧 혁파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4년에는 거창과 병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 부르다가 얼마 뒤에 또 파했고, 세종(世宗) 14년에 옛 섬으로 환원하여 지현사(知縣事)로 만들었는데 그 뒤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관원】 현령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상군(裳郡)ㆍ기성(岐城)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성씨】 본현 반(潘)ㆍ정(鄭)ㆍ박(朴)ㆍ윤(尹)ㆍ손(孫)ㆍ조(曹), 나(羅) 내성(來姓)이다. 신(辛) 영산(靈山). 이(李) 고성(固城). 박ㆍ백(白) 모두 촌성(村姓)이다. 명진(溟珍) 임(任)ㆍ조ㆍ한(韓)ㆍ허(許)ㆍ하(河). 아주(鵝州) 신(申)ㆍ문(文)ㆍ갈(葛)ㆍ조. 송변(松邊) 박ㆍ손. 하청(河淸) 김(金)ㆍ송(宋). 말근곡(末斤谷) 박 해덕(海德)과 같다. 고정(古丁) 조 죽토(竹吐)와 같다. 연정(鍊汀) 조ㆍ신.
『신증』 【풍속】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 관풍안에 있다.
 
【형승】 영해(瀛海)가 호양(浩洋)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이사관(李史館)이 부임하는 길을 전송하는 서(序)에, “내 본래 들으니, 거제는 남방 끝에 있는데 물 가운데에 집들이 있고, 사방은 모두 호호 망망한 큰 바다이다. 독한 안개가 찌는 듯하고 회오리바람이 그치지 않으며, 여름철이면 벌보다 큰 모기가 떼로 몰려들어서 사람을 깨무는데 참으로 무섭다고 한다.” 하였다. 대마도(對馬島)와 서로 바라보인다. 이보흠(李甫欽)의 〈신성기(新城記)〉에, “거제는 현인데, 푸른 바다 복판에 있으며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인다.” 하였다.
 
【산천】
○계룡산(鷄龍山) 현 남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가라산(加羅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대마도를 바라보는 곳으로서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증산(甑山) 현 서쪽 43리 지점에 있다. ○주산(主山) 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다. ○사도(沙島) 고현(古縣) 동쪽에 있다. 고려 고종(高宗) 때에 왜적(倭賊)이 침입하자, 현령 진룡갑(陳龍甲)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사도에서 싸웠는데 적이 밤에 도망쳤다. ○구천동(九川洞) 가라산(加羅山) 동쪽에 있다. 둘레가 1백 19리이고 목장이 있다. ○산달도(山達島) 현 서쪽에 있으며 둘레가 32리이다. 목장이 있다. ○칠천도(漆川島) 현 동쪽에 있으며 둘레가 51리이다. 목장이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3일 간의 동북풍에 골이 무너지고 바다가 뒤집히네. 사방으로 눈산 같은 물결이 무너져 자라 굴에 거꾸로 쏟아지네. 구름이 그늘져 햇볕이 엷고 빗방울은 도리어 쓸쓸하네. 큰 배가 낮았다가 솟구치고 섬들은 아득하여 서로 찾지 못하네. 생명은 기러기 털처럼 가벼우니, 믿는 것은 오직 충성된 이 마음 뿐. 일에 매인 것 임금의 일 아니라면, 어찌 스스로 편하게 하지 않으리. 하늘만은 이 충정(衷情)을 알아주어서 웬만하면 개인 날을 내려 주겠지. 아득히 [주1]진(晉) 나라 사안(謝安)에게 부끄러워라. 집으로 돌아가는 돛배가 빠르구나.” 하였다.
 
○ 주원도(朱原島) 둘레가 45리이다. ○외비진도(外非辰島) 둘레가 25리이다. ○내비진도(內非辰島) 둘레가 15리다. ○매매도(每每島,매물도) 둘레가 44리이다. ○오아도(吾兒島) 둘레가 14리이다. ○대죽도(大竹島) 이상은 모두 현 남쪽에 있다. ○유자도(柚子島,죽도) 현 북쪽에 있는데 크고 작은 섬 두 개가 있으며, 온 섬에 유자 나무가 있다. ○대좌이도(大左伊島) 현 서쪽에 있으며 크고 작은 두 개의 섬이 있다.

○ 사등포(沙等浦)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탑포(塔浦) 송변현(松邊縣)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오비포(吾非浦)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가이포(加耳浦)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하청포(河淸浦) 하청부곡(河淸部曲)에 있다. ○사외포(絲外浦)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황포(黃浦) 현 동쪽 43리 지점에 있다. ○한다포(閒多浦)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명진포(溟珍浦) 명진현에 있다. ○산촌포(山村浦) 현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 ○오양포(烏壤浦) 오양역에 있다. ○견내량(見乃梁)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바로 바다이다. 고성(固城)에서는 여기를 건너야 본현(本縣)에 들어오게 된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멀리 바라보니 바다가 넑고, 돌아보니 산이 얽혀 있다. 세월은 예와 지금이 변했는데, 밀물과 썰물은 가고 옴이 분명하구나. 나팔 소리는 가을 하늘을 뚫고, 높은 돛대는 저녁 구름을 가리네. 배에 오르니 도리어 감회 있어, 퉁소와 북으로 왕손을 조상하네.”

○ “창랑수(滄浪水)에 발을 씻고 [주2]두약주(杜若洲)에 배를 대누나. 파도가 이니 푸른 멧부리가 끊어진 듯하고, 바다가 넓으니 파란 하늘이 둥실하네. [주3]조공(曹公 조조)은 창을 가로잡고 시 읊었고, [주4]한(漢) 나라 사신은 타고 놀았다지. 오가노라 이틀을 머무르며 모래 위 갈매기 짝을 짓는다.” 하였다. “긴 바람에 돛배 보내고, 배 안에서 편안히 베개 베고 누웠네. 빙빙 돌아드니 흰 모래가 평평하고, 언뜻 언뜻 청산을 지나가네. 강이 넓으니 파도에 꽃 같은 무늬 일고, 하늘이 개니 구름 잎처럼 갈라지네. 섬 오랑캐들, 이날에 왕화(王化)에 돌아올 줄 어찌 짐작했으리.” 하였다. 구천(九川)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주산(主山)에서 나오며, 산촌포(山村浦)에 흘러든다.

   
 

【토산】 옻[漆]ㆍ활과 창ㆍ수달(水獺), 왜닥[倭楮] 유자도(柚子島)에 심는다. 문어ㆍ전복[鰒]ㆍ조개ㆍ홍어ㆍ청어ㆍ미역ㆍ대구[大口魚]ㆍ유자ㆍ석류ㆍ표고[香蕈]ㆍ꿀[蜂蜜]ㆍ산무애뱀[白花蛇]ㆍ지황ㆍ해삼ㆍ모래무지[鯊魚]ㆍ전어. 『신증』 준치[眞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농어[鱸魚]ㆍ낙지[絡締]ㆍ소금ㆍ치자.
 
【성곽】 읍성 석축(石築)이다. 둘레는 3천 38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샘 셋과 못 둘이 있다.

○ 이보흠(李甫欽)의 기(記)에, “전조(前朝) 말년에 기강이 무너지고 섬 오랑캐가 침범하니, 거제 백성이 옛터를 버리고 거창 경내(境內)에 교우(僑寓)한 지가 여러 해였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을 받고 열성조(列聖祖)가 대를 이어서 문(文)으로 나라 안을 다스리고 무(武)로써 외적을 막았다. 성교(聲敎)가 멀리까지 이르러 산융(山戎 여진족을 말함)과 유구(琉球)까지도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궐하(闕下)에 부복(俯伏)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오직 남보다 뒤질세라 두려워하였거든, 하물며 서로 바라보이는 섬 오랑캐임에랴. 올빼미 울음소리가 좋은 소리로 변하듯 백성 되기를 원하였으니, 동방에 나라가 있은 이래로 이와 같이 융성한 적이 없었다. 세종(世宗)께서 즉위하신 지 5년인 임인년에 거제 백성이 본래 살던 터로 돌아가기를 원하자, 성곽을 쌓아서 백성을 살게 하고 수호(守護)할 제구를 설비하여서 외적을 방어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흩어졌던 백성이 모두 모이니 성이 작아서 다 들어갈 수 없고 또 샘물이 모자랐다. 지금 우리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진양(晉陽) 정상공(鄭相公) 분(苯)에게 음양을 살피고 샘물을 찾아보아 관아를 옛 관아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다가 옮기도록 명하였다. 북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삼면이 산에 가로 막혀 있으며, 높고 낮은 땅과 찬 샘물 등 모든 것이 영구한 터가 될 만하였다. 이에 여기에다 터를 정하고 하도(下道) 백성 2만여 명을 모두 부르고, 영천 군사(永川郡事) 정차공(鄭次恭), 진주 판관(晉州判官) 양연(楊淵), 곤양 군사(昆陽郡事) 최성로(崔性老), 청도 군사(淸道郡事) 이의(李椅), 사천 현감(泗川縣監) 장오(張俁), 진해 현감(鎭海縣監) 김한진(金漢珍)에게 공사를 나누어 감독하게 하고, 또 현령 이호성(李好誠)에게 관사(館舍)와 부고(府庫)를 세우게 하니, 이에 멀고 가까운 곳의 백성이 다 모여서 각기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성 3천 6백여 척과 집 40여 칸이 몇 달 못되어 완성되었다. 아, 백성을 사역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의로써 움직이지 아니하면, ‘황보(皇父)가 도읍을 만드니 땅이 오래(汚萊 낮은 땅에 물이 괴고, 높은 땅에 풀이 무성하여 땅이 황무해짐)하였다’는 백성의 원망이 있게 된다. 사역하는 것이 비록 의롭다 하더라도 적절한 때가 아니거나, 비록 때가 적절하더라도 그 힘을 절약해서 이용하지 않으면, [주5]‘화원(華元)이 성을 쌓을 때에 배가 희구나.’ 하는 기쁨의 노래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현 백성은 성이 작고 물이 없음을 고통스럽게 여겨서 모두들 옮기기를 원했으니, 백성의 이익을 보아서 의로써 움직였다 할 수 있다. 농사를 마친 다음 사방에서 모두 모였으니, 알맞은 때에 부렸다 할 수 있다. 새벽과 저녁을 알리는 북을 설치하고, 바삐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니, 그 힘을 모조리 쓰게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의로써 움직였고 알맞은 때에 부리며 힘을 아껴 썼으니,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큰 북[鼛]으로 이기지 못하였음과, 주공(周公)이 은(殷) 나라를 시켜서 크게 지은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나으리오. 참으로 이른바, 즐겁게 하는 것으로 백성을 부리면 백성은 그 수고로움을 모른다는 것인가.” 하였다.

<역주(譯註)>
[주1] 진(晉) 나라……부끄러워라 : 동진(東晉) 말년의 정승인 사안은 진중한 사람이었다. 북방의 여러 나라를 통일한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95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진(晉)을 치러 오자, 사안은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8만이라는 소수의 군으로 방어하게 하였는데, 큰 승리를 얻어서 망국의 위기를 면하였다. 그 보고가 정승인 사안에게 들어왔는데, 태연하게 앉아서 조금도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한다. 여기서는 자신은 집으로 돌아가는 배가 빠른 대단치 않은 일도 기뻐하고 있으니, 큰 일에도 태연하던 사안에게 부끄럽다는 말이다.
[주2] 두약주(杜若洲) : 두약은 창포의 일종으로 보랏빛 꽃이 피는데 습한 땅에서 자란다.
[주3] 조공(曹公)은……시 읊었고 : 조조(曹操)가 강동의 오(吳) 나라를 정복하려고 8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육지와 수로로 강동을 향하여 가다가, 대항하는 오나라 군사와 적벽강(赤壁江)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달 밝은 밤에 여러 장수와 참모들을 모아서 큰 연회를 베풀고 자신이 창을 비껴들고 서서 직접 지은 시를 노래했다 한다.
[주4] 한(漢) 나라……타고 놀았다지 :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장건(張鶱)이 서역(西域 지금의 중앙아시아)에 사신으로 가면서, 떼를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 은하수 가에 있는 직녀성(織女星)을 만나 보았다 하는 전설이 있다.
[주5] 화원(華元)이 성을 쌓을 때에 배가 희구나.’ 하는 기쁨의 노래가 있게 된다. : 화원(華元)은 춘추시대 송나라의 정승이었다. 외적의 침입이 많으므로 서울의 성을 다시 쌓는데, 백성의 힘을 잘 이용했으므로 도리어 백성들이 배를 두드리며 기뻐서 노래 불렀다 한다.

【관방】
○ 우도 수군절도사영(右道水軍節度使營) 현 남쪽 37리 지점에 있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는 2천 6백 20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샘 하나, 못 하나가 있다. 산달포(山達浦)에서 오아포(烏兒浦)로 옮겼다.
○ 영등포영(永登浦營) 현 북쪽 49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천 68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시내 하나가 있다. 수군 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뱃소리와 사람 소리 시끄러운데, 누워서 들으니 노 젓는 소리가 나네. 뱃사공 능히 바람을 알고, 자리를 걸자 지는 달에 나부끼네. 날이 밝자 갯가에 나가니 아득한 물결이 넓기도 하네. 파도는 가볍게 갈매기 실어보내며, 함께 가면서 차마 이별 못하네. 영등섬을 돌아다보니, 잠깐 사이에 공중에 사라지네. 만약 배편이 아니라면, 어느 길로라도 깊이 찾아 볼 수 있을 것을.” 하였다.
○ 옥포영(玉浦營) 현 동쪽 19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천 74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우물 하나, 못 하나가 있다. 수군 만호 1명이 있다.
○ 조라포영(助羅浦營) 현 동쪽 28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천 8백 90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샘 하나가 있다. 수군 만호 1명이 있다.
○ 지세포영(知世浦營) 현 동쪽 29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천 6백 5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시내 두 개가 있다. 수군 만호 1명이 있다. 본국 사람 중에 일본으로 가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려서 배를 띄우고 대마주(對馬州)로 향한다.
○ 율포보(栗浦堡) 현 동쪽 33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9백 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샘 하나, 시내 하나가 있다. 권관(權管)을 두어서 방수(防戍)한다.
 
【봉수】 계룡산 봉수(鷄龍山烽燧) 남쪽으로 가라산(加羅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고성현(固城縣) 미륵산(彌勒山)에 응한다. 가라산 봉수(加羅山烽燧) 북쪽으로 계룡산(鷄龍山)에 응한다.
 
【누정】 무이루(撫夷樓) 견내량(見乃梁) 동쪽 벼랑에 있다.
○ 하연(河演)의 시에, “옛 섬은 의관이 다르고, 원융(元戎)의 호령은 신(神) 같도다. 갈잎배는 북쪽 길과 통하고, 거친 풍속은 동쪽 이웃과 접했네. 바다가 고요하니 요사한 기운 그쳤고, 시대가 청명하니 교화가 날로 새롭다. 한 구역에 연화(煙火)가 흡족하니 모두 다 태평 성대 백성이어라.” 하였다.
○ 만경루(萬景樓)ㆍ청해루(靑海樓)ㆍ임해정(臨海亭) 모두 오아포(烏兒浦)에 있다.
『신증』 황취루(黃翠樓) 고현성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해안정(海晏亭) 오아포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오양역(烏壤驛) 현 서쪽 34리 지점에 있다. 『신증』 홍치(弘治) 경신년에 이 역에 보루(堡壘)를 설치하였는데, 돌로 성을 쌓았다. 둘레는 2천 1백 50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권관(權管)을 두어서 방수(防守)한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성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고적】
○ 아주폐현(鵝洲廢縣) 본섬 안에 있으며, 현과의 거리는 동쪽으로 16리이다. 본래 신라의 거로현(居老縣)으로 청주(淸州)에 속해 있었는데, 소성왕(昭聖王)이 학생(學生)들의 녹읍(祿邑)으로 만들었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來屬)시켰고, 고려와 본조에서 그대로 두었다.
○ 송변폐현(松邊廢縣) 또한 본섬에 있다. 신라 경덕왕이 남수(南垂)라 고쳐서 내속시켰는데, 고려에서 옛날 명칭으로 회복하여 그대로 예속시켰다. 현과의 거리는 남쪽으로 45리이다.
○ 명진폐현(溟珍廢縣) 본래 신라의 매진이현(買珍伊縣)이며 역시 본섬에 있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두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원종(元宗) 때에는 왜(倭)를 피해, 육지에 나와서 진주(晉州) 영선현(永善縣)에 교우(僑寓)하였다. 본조 공정왕(恭靖王) 때에 강성현(江城縣)과 합병하여 진성(珍城)이라 하였고, 세종(世宗) 때에는 본섬에 되돌려 다시 내속시켰다. 현과의 거리는 남쪽으로 15리이다.
○ 하청부곡(河淸部曲)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 고정부곡(古丁部曲) 지금 관아가 있는 곳이다.
○ 죽토부곡(竹吐部曲) 현 동쪽 14리 지점에 있다.
○ 말근향(末斤鄕) 죽토부곡 동쪽에 있다.
○ 연정장(鍊汀莊)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 덕해향(德海鄕)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 고현성(古縣城) 현 서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石築)이며 둘레는 2천 5백 11척 6촌이고, 높이는 9척이다.
○ 둔덕기성(屯德岐城) 내현(內縣) 서쪽 37리 지점이다. 석축이며 둘레는 1천 2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성안에 못 하나가 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는 본조 초기에 고려 종성(宗姓 왕씨)들이 귀양왔던 곳이라 한다.
 
【명환】 고려 송저(宋詝) 명종(明宗) 때의 현령(縣令)이다. 진용갑(陳龍甲) 고종(高宗) 때의 현령이다. 본조 이호성(李好誠)이 현령을 지냈다.
『신증』 【유우】 본조 최숙생(崔淑生) 연산(燕山) 때에 유배당하였다.

【효자】 본조 임귀달(林貴達) 부모가 함께 죽어서 6년 동안 거려(居廬)하였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신증』 이돌대(李石乙大) 어릴 때에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죽자 친히 흙과 돌을 지고서 무덤을 만들었고, 3년 동안 거려하였다. 또 아버지의 관(棺)을 옮겨서 어머니 무덤에 함께 장사한 다음, 다시 3년 동안 복(服)을 입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신증』 【열녀】 본조 김씨(金氏) 남편이 죽자 매우 슬퍼하였고, 상을 마치고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개가시키려 하니, 김씨가 죽기를 맹세하고 듣지 않았다. 시아버지를 매우 정성으로 섬기다가, 시아버지가 죽으니 정성을 다해서 상을 입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제영】
○ 해산추색수(海山秋色秀) 이범(李範)의 시에, “연화(煙火)는 온 마을에 피어나고, 상마(桑麻)는 사방을 덮었네. 바다와 산에 가을 색이 빼어나고, 물가에 열린 유자는 늦게까지 향기가 새롭네.” 하였다.
○ 남래접접타비연(南來跕跕墮飛鳶)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바람은 돛대에 시끄럽고 파도는 하늘에 닿은 듯하네. 남쪽으로 오니, 날던 솔개가 미끄러지듯 떨어진다. 해진 돛은 춤추듯 너울거리고, 딱딱이 소리에 경점(更點)도 깊은데 다시금 잠 못 이루네.” 하였다.
○ 군산삽해천환심(群山揷海淺還深) 앞사람의 시에, “여러 산이 바다에 꽂힌 듯 얕았다가 깊었다가, 잠깐 사이 개였다가 또 쉽게 그늘지네. 누군가 밤에 선창(船窓)에 기대어 피리 부는지, 배에 가득한 비바람에 늙은 용이 읊조리는 듯.” 하였다.
○ 조접부상만리회(潮接扶桑萬里回) 송처검(宋處儉)의 시에, “산은 견내(見乃)를 따라 천 봉우리가 솟아났고, 파도는 부상에 닿았다가 만리 길 돌아온다.” 하였다.
○ 연분도구만조회(煙分島口晩潮回) 이근(李覲)의 시에, “하늘은 해협[海門]에 닿은 듯 가을 물결이 멀고, 연기는 섬 어귀를 가르고 늦은 파도가 돌아온다.” 하였다.

● 『신증』 십영(十詠) 최숙생(崔淑生)이 이행(李荇)에게 화답(和答)한 시(詩).
○ 소요동(逍遙洞)
묻노니 그대는 소요동에서 몇 번이나 소요해 놀았던가. 푸른 산에서 한 차례 긴 휘파람 부니, 달이 맑고 천지도 가을이로다.
○ 백운계(白雲溪)
흰 구름 한가하게 물 건너와서 때로는 나와 짝이 되네. 잘 가서 빗줄기 되어 한 번 건곤을 씻어 맑게 하라.
○ 세한정(歲寒亭)
골짜기에 누운 솔은 하늘의 한 기둥 되어, 명을 받고 층공(層空)을 버티었다. 날씨 차가울 때의 늠름한 빛, 인간 세상에서 몇 번이나 우레와 바람 겪었던가.
○ 성심천(醒心泉)
무엇으로 내 마음 깨우칠까. 깨끗한 샘이 옥같이 희다. 돌에 앉으니 바람이 옷깃을 들썩이고, 물을 잔질하니, 달이 움큼에 가득하다.
○ 군자지(君子池)
산 밑 한 조각 못, 복판에 푸른 창포(菖蒲) 있네. 날씨 추워져 온갖 풀이 시들었으니, 이 창포 녹록(碌碌)한 것 아니로구나.
○ 차군정(此君亭)
못 위 두어 자 되는 터에, 그윽한 대 두세 가지 서 있네. 이렇게 작다고 깔보지 말고, 서리에도 까딱않는 모습 보기나 하소.
○ 운문폭(雲門瀑)
긴 칼이 공중에 기댄 듯 맑은 날에 우레와 비 쏟아지네. 운문 위에 처음 와서, 날아내리는 냇물을 분명 보았노라.
○ 신청담(神淸潭)
맑은 빛이 지팡이와 신을 덮치고, 늦게 서늘하여 의건이 상쾌하다. 못 밑 그림자에게 웃으며 말하길, 나도 진세(塵世) 밖 사람이라고.
○ 지족정(止足亭)
족한 줄 아는 것이 늘 족한 것이라고, 내 노자(老子)에게 들었노라. 지금 택지(擇之 이행의 자(字))의 정자를 보니, 샘과 돌뿐이로다.
○ 보진당(保眞堂)
화려한 집은 귀신이 엿보고, 높은 지위는 사람이 시기한다네. 그대 보진당 보았는가, 여기가 마음 편안히 할 곳이라네. 《대동지지(大東地志)1864년》

● 이행(李荇)이 1506년 최숙생(崔淑生)에게 보낸 시(詩).
○ 소요동(逍遙洞) 상문동 문동저수지.
森森喬木陰 빽빽하게 교목은 우거지고
決決淸流瀉 콸콸 맑은 시내 쏟아지누나
道上有暍死 길에는 더위먹어 사람 죽어도
谷中無朱夏 이 골짜기엔 더운 여름 없어라
竹筇伴還往 대지팡이 짝하여 오고 가노니
不必朋從假 함께할 벗이 필요하지 않구나
持玆問傲吏 이를 가지고 오리에게 묻노니
誰是逍遙者 그 누가 진정 소요하는 자인고
[주] 이를 …… 자인고 : 오리(傲吏)는 오연(傲然)한 관리란 뜻으로, 칠원(漆園)의 관리를 지낸 장자(莊子)를 가리키는바, 장자가 관리로 있으면서도 그 뜻이 높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즉, 용재 자신이 소요동에 노닐면서 자적(自適)하는 심정이 장자의 소요유에 비길 만하다는 것이다.

○ 백운계(白雲溪)
石溪鳴濺濺 바위 틈 시냇물 콸콸 흐르고
常有白雲宿 항상 백운이 머물러 있도다
雲去無定姿 구름은 가 일정한 자태가 없고
溪流不少畜 시내는 흘러 조금도 쌓이지 않지
拘留淹日月 구류된 채 그저 세월만 보내니
人世悲局促 인간 세상 국촉한 신세가 슬퍼라
悵望淸潁濱 서글피 맑은 영수 가를 바라고
高歌白雲曲 백운곡 노래를 높이 부르노라
[주1] 영수(潁水) : 요(堯) 임금이 당대의 고사(高士)인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넘겨주겠다고 하자,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고 영수(潁水)의 물에 귀를 씻었다 한다. 《莊子 逍遙遊》
[주2] 백운곡(白雲曲) : 도연명(陶淵明)의 〈화곽주부(和郭主簿)〉란 시에, “아스라이 백운을 바라본다[遙遙望白雲]”라는 구절이 있는바, 은자(隱者)의 시를 뜻하는 듯하다.

○ 성심정(醒心亭)
鑿泉巖石底 바위아래에다 샘을 파니
六月氷雪冷 유월에도 얼음처럼 물이 차
挹之一漱齒 손으로 움켜 양치질을 하면
已覺神魂醒 정신이 번쩍 깸을 느끼누나
平生老木瓢 평소 지니던 고목 표주박을
取用功莫竝 꺼내어 쓰니 더없이 좋아라
爲報同心子 마음 맞는 벗에게 이르노니
松根來煮茗 솔뿌리 가져다 차를 달이세
[주] 고목 표주박 : 《용재집》 제5권 〈단풍나무 표주박〉에 그에 관한 내용이 있다.

○ 군자지(君子池)
小池絶淸淨 작은 못은 몹시도 청정하고
愛此君子竹 이 군자 대나무 사랑스러워라
菖蒲亦非凡 창포 역시 범속하지가 않아
涼影相倚綠 서늘한 그림자 녹음이 짙구나
蒼石百年奇 푸른 돌은 백년토록 기이하고
遊魚一樂足 노니는 물고기 한 즐거움 누려라
客來莫洗耳 이곳에 와서 귀를 씻질랑 마소
下有人飮犢 송아지 물 먹이는 이 아래 있다오
[주1] 이곳에 …… 있다오 : 허유(許由)가 천하를 맡아 달라는 요(堯) 임금의 말을 듣고 못 들을 말을 들었다고 영수(潁水)에 귀를 씻고 있는데 그의 벗 소부(巢父)가 마침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 그 까닭을 묻고는, “그대가 사람이 안사는 깊은 골짜기에 은거하면 누가 그대를 볼 수 있으리요. 그대가 짐짓 부유(浮游)한 행위를 해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구려. 이 물을 먹였다가는 내 송아지 입이 더러워지겠군.” 하고 송아지를 끌고 상류(上流)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한다. 《高士傳》 
[주2] 옛사람이 …… 했지 : 차군(此君)은 대나무의 이칭(異稱)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사랑하여 “하루라도 차군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한 데서 유래한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 운문폭(雲門瀑) 문동폭포
蒼崖倚天半 반공에 기대어 선 푸른 벼랑
懸瀑空中垂 폭포수가 공중에서 쏟아지누나
白日忽霆掣 대낮에도 갑자기 우레가 울리니
風雲颯在玆 풍운이 문득 여기서 일어나도다
千年閟壯觀 천년토록 장관을 감춰 두었다가
偶許幽人窺 우연히 내가 보도록 허락했는가
恨無謫仙句 적선의 시구 없어 한스럽나니
不減廬山奇 여산폭포만 못하지 않는 것을
[주] 적선(謫仙)의 …… 것을 : 적선은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그가 여산폭포(廬山瀑布)를 바라보며 지은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 “나는 물줄기 곧장 삼천 척 높이로 쏟아져 내리니, 아마도 은하수가 구천에서 떨어지는가 하여라.[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는 시구가 절창(絶唱)으로 인구(人口)에 회자된다.

石門頟頟 우뚝한 저 석문이여~
孰開闢之 그 누가 열어젖혔는가?
瀑流虩虩 콸콸 흐르는 폭포는
孰導畫之 그 누가 끌어 놓았는가?
巨靈擘之五丁役 거령이 쪼개고 오정이 일했나니
雲氣拍之龍所宅 구름 기운 부딪치고 용이 깃들도다
神慳鬼呵肇古昔 태곳적부터 귀신이 아끼고 지킨 곳
霞關霧鎖終不隔 자욱한 놀과 안개도 끝내 감추지 못해
余嬰禍網世共斥 내가 재앙을 만나 세상에 버림받았지만
飽怪富異天或惜 기이한 경치 실컷 보니 하늘이 아낀 건가
欲將名字記岩石 이내 이름을 바위에 새기고자 하노니
百年在後尋吾迹 백 년이라 뒤에 나의 자취를 찾으리라 
 

   
 
○ 신청담(神淸潭) 문동폭포 밑 웅덩이.
石潭淺見底 물이 얕아 바닥이 뵈는 바위 소
不雜沙土氣 더러운 흙먼지는 섞이지 않았어라
遊人神骨淸 노니는 사람 정신과 뼈가 맑아지니
造物功力費 조물주가 만드느라 몹시 애썼구나
潭下有嘉魚 소 아래엔 좋은 물고기가 있고
潭邊產香卉 소 가에는 향기로운 풀이 자라지
臨風復喟然 바람을 맞으며 다시 한숨 쉬노니
玆地人所諱 여기는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로다
[주]여기는 …… 곳이로다 : 변방의 귀양지임을 뜻한다.

○ 차군정(此君亭)
古人有名言 옛사람이 명언을 남겼으니
不可無此君 차군이 없어선 안 된다 했지
手種數竿碧 손수 몇 가닥 대를 심었노니
何時高出雲 그 언제나 높이 구름을 찌를꼬
新亭喜淨潔 새 정자가 정결한 것이 좋아
嘯詠窮晨曛 시 읊으며 아침저녁 보내노라
淸風颯然至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萬事從糾紛 뒤얽힌 인간 만사 나는 몰라라
[주] 옛사람이 …… 했지 : 차군(此君)은 대나무의 이칭(異稱)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사랑하여 “하루라도 차군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한 데서 유래한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 세한정(歲寒亭)
岸上老大松 기슭 위에 선 늙은 소나무는
蒼蒼歲寒後 추운 겨울에도 언제나 푸르러
度溪三畝陰 시내를 가로지른 세 이랑 그늘
偃蹇謝矯揉 구불텅 뻗은 줄기 굽혀질쏘냐
不才是大用 재목 못 되는 게 큰 쓰임이니
直者更何有 곧은 부분이 대체 어디 있으랴
蕭然一病翁 쓸쓸한 이 병든 늙은이가
與爾眞耐久 진정 너와 변치 않는 벗이 되리

○ 지족정(止足亭)
不止無所止 그치지 않으면 그칠 바가 없고
知足皆可足 만족을 알면 모두 만족할 만한 법
向來昧斯戒 예전엔 이 경계를 알지 못했나니
欲悔歲月促 후회하려니 세월이 빨리 흘렀구나
平生佳山水 평생에 늘 산수를 좋아한 것은
性實愛之酷 성품이 실로 이를 몹시 사랑해서지
恐此復太多 이 정도도 아마 내겐 과분하리니
於焉斂遐躅 여기서 나의 발길을 거두어야겠다
[주] 이 정도도 …… 거두어야겠다 : 평소에 산수를 좋아했는데 이곳의 경치가 몹시 좋으니 더 이상 산수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것이다.

○ 보진당(保眞堂)
保眞當少慾 참을 지키려면 욕심이 적어야지
養性當保眞 성품을 기르려면 참을 지켜야지
久聞老氏說 노씨의 말을 들은 지 오래이니
名與身孰親 이름과 몸 어느 것이 친한가
小屋莫洒掃 작은 집 청소할 것 없나니
自然無俗塵 자연히 세속 티끌이 없는 것을
煕煕以卒歲 희희낙락하면서 평생을 보내노니
何似羲皇人 희황 적 사람과 비교해 어떠하뇨
[주1] 이름과 …… 친한가 : 《도덕경》 제44장에, “이름과 몸 중 어느 것이 더 나와 친한가.” 하여, 세상의 명예보다는 몸이 더 자기에게 소중한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주2] 희황(羲皇) 적 사람 : 태고 시절 근심 걱정을 모르고 살던 순박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백(李白)의 〈희증정율양(戲贈鄭溧陽)〉이란 시에,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누워 스스로 태곳적 사람이라 하네.[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하였다.

名已隳兮 이름이 이미 무너짐이여
身已卑兮 몸이 이미 비천해졌도다
眞之全兮 진리를 보전함이여
庶勉旃兮 이에 힘쓰리로다.

< 다음은 18세기 작성(作成), 덧붙인 자료임 >

【연혁】 현종 5년에 치소(治所)를 명진(溟珍) 옛 현의(古縣)의 서쪽 3리로 옮겼고 옛 치소는 북쪽으로 30리이다. 숙종 37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방면】 ○읍내(邑內)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고현내(古縣內) 북쪽으로 처음이 15, 끝이 40리이다. ○둔덕(屯德)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사등(沙等)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영초(迎草)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하청(河淸)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원래는 하청부곡(河淸部曲)이다. ○ 고정부곡(古丁部曲) 옛적 거제현 때의 치소(治所)이다. ○죽토부곡(竹吐部曲) 동쪽으로 25리이다. ○말근향(末近鄕) 죽토의 동쪽에 있다. ○덕해향(德海鄕) 동북쪽으로 45리이다. ○연정장(鍊汀莊) 동북쪽으로 30리이다.

   
 
【영아】 혁폐 우수영(右水營) 본래는 웅천(熊川)의 제포(薺浦)에 두었는데, 후에 창원의 합포(合浦)로 옮겼다가 다시 거제의 산련포(山連浦)로 옮겼으며, 다시 탑포(塔浦)와 오아포(烏兒浦)로 옮겼는데, 선조 26년에 삼도통제영(三道統制營)을 겸하게 하였다가 37년에 고성(固城)의 용두포(龍頭浦)로 옮기면서 오아포는 행영(行營)으로 삼았는데 후에 혁폐하였다. 고성편에 있다.
 
【진보】 ① 영등포진(永登浦鎭) 옛적에는 구미포(仇未浦)에 진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는데, 인조 원년에 견내량(見仍梁) 서쪽 3리로 옮겼고, 영종 23년에 혁폐하였다가 32년에 다시 두었다. 왜인소(倭人所)가 있고 성을 돌로 쌓았다. ○ 수군 만호 1명이다.
② 조라포진(助羅浦鎭) 동북쪽 40리에 있다. 선조 25년 옥포성(玉浦城) 밖으로 옮겼다가 효종 2년에 지세포(知世浦)로 옮겼다. 옛 성터의 둘레는 1천 6백 5척이고, 시내(溪)가 둘이다. 대마도(對馬島)를 왕래하는 자는 반드시 이곳에서 바람길을 본다. ○ 수군 만호 1명이다.
③ 옥포진(玉浦鎭) 동북쪽 35리에 있다. 성종 19년에 둘레 1천 74척의 성을 쌓았다. 우물 하나와 못(池) 하나가 있다. ○ 수군 만호 1명이다.
④ 지세포(知世浦) 동쪽 40리이다. 임진왜란 후에 변포(邊浦)에서 옥포(玉浦) 옛 성밖으로 옮겼다가 효종 2년에 다시 옛 곳으로 옮겼고, 후에 다시 지금의 진으로 옮겼다. 성의 둘레는 1천 6백 5척이다. ○ 수군 만호 1명이다.
⑤ 가배량진(加背梁鎭) 남쪽으로 20, 오아포 우수영 옛 터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6백 20척이며, 샘(泉) 둘과 연못 하나가 있다. 선조 37년에 고성현(固城縣) 땅에 있던 우수영을 이곳으로 옮겨왔었다. ○ 수군 만호 1명이다.
⑥ 장목포진(長木浦鎭) 북쪽으로 60리이며, 본래는 훈국둔(訓局屯)이다. 효종 7년에 둔(屯)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왜인소(倭人所)와 성이 있다. ○ 수군 만호가 1명이다.
⑦ 율포보(栗浦堡) 동남쪽으로 20리에 있다. 현종 5년에 우수영 옛터의 남쪽으로 옮겼다가, 숙종 13년에 다시 가라산(加羅山) 밑으로 옮겼는데, 경종(景宗) 4년에 다시 수영(水營) 남쪽 5리로 옮겼다. 권관(權管) 1명이다.

○ 혁폐
영등포구진(永登浦舊鎭) 동북쪽 70리이다. 성의 둘레는 1천 68척이며 시내[溪]가 있다.
조라포구진(助羅浦舊鎭) 동쪽으로 40리이다. 성의 둘레는 1천 8백 90척이며 샘이 있다. 옥포구진(玉浦舊鎭) 동쪽으로 40리이다.
지세포구진(知世浦舊鎭) 동쪽으로 40리이다.
가배량구진(加背梁舊鎭) 전에는 고성(固城) 남쪽에 있었으나 후에 옥포(玉浦)로 옮겼다. 성의 둘레는 2천 6백 28척이다. 영종 23년에 지금의 진으로 옮겼다.
율포구보(栗浦舊堡) 동북쪽으로 50리이다. 성의 둘레는 9백 척이며 샘과 시내가 있다.
오양폐보(烏壤廢堡) 서북쪽으로 30리이다. 영종 6년에 역(驛)에 보(堡)를 두고 권관(權管)을 두었다. 성의 둘레는 2천 1백 50척이다.
소비포폐보(所非浦廢堡) 동남쪽으로 50이며, 성의 둘레는 1천 68척이다. 영종 26년에 진을 고성으로 옮겨 구(舊) 소비포진이라 부른다.
 
【봉수】 등산(登山)ㆍ남망(南望) 모두 가배량(加背梁)에 있다. 옥림산(玉林山) 옥포(玉浦)에 있다. 눌일곶(訥逸串) 지세포(知世浦)에 있다. 가을곶(柯乙串) 율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 둘, 진창(鎭倉) 일곱이다.
 
【목장】 가조도(可助島)ㆍ칠천도(漆川島) 소를 기른다. 산달도(山達島)ㆍ구천동(九川洞) 가라산 동쪽이다. 탑포(塔浦)ㆍ구영등(舊永登)ㆍ장목포(長木浦)ㆍ구조라포(舊助羅浦)ㆍ지세포(知世浦)

【진도】 견내량진(見仍梁津) 서쪽으로 40리이다. 고성에서 거제로 들어오는 요해지(要害地)이다.
【토산】 대[竹]ㆍ녹용(鹿茸)ㆍ김[海衣].

【누정】 진남루(鎭南樓)ㆍ운주루(運籌樓)ㆍ제승정(制勝亭)ㆍ대변정(待變亭).

 

뉴스앤거제  nng@daum.net

<저작권자 © 뉴스앤거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앤거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 뉴스
  • 1
  • 2
  • 3
  • 4
  • 5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