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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관아(官衙) 기성관(岐城館) 질청(秩廳)[연재]고영화의 거제산책

   
 
☞ 차례 : 1). 거제현관아(巨濟縣官衙) 개요 2). 거제질청(秩廳) 3). 거제 기성관(巨濟 岐城館)과 송덕비군 4). '기성(岐城)'의 어원

1). 거제현관아(巨濟縣官衙) 개요
거제현관아(巨濟縣官衙)의 소재지는 거제면 동상리 546-1번지(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1호인 기성관과 거제면 동상리 535-2번지이다.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6호인 거제질청을 묶어 2007년 7월 31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84호로 지정하면서 그 명칭이 ‘거제현관아(巨濟縣官衙)’로 바뀌었다.

1427년(조선 세종 9년) 이후 일반적인 객사(客舍)는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망월례를 하던 곳인데, 거제도는 1453년에 고현성 내에 처음 건립되었다. 이후 1471년에 건립된 객사(客舍) 기성관은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폐성된 이후 거제면으로 이건되었고 주로 거제현의 객사로 이용되었다가, 경술국치(1910년) 이듬해에는 거제초등학교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건평 265㎡에 고목이 울창한 고대 위에 층단식으로 축조된 기성관은 본관과 외삼문, 석축기와 담장이 매우 세련된 고전미를 잘 간직하고 있어 경남 4대 고건축물(촉석루, 세병관, 영남루, 기성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거제면으로 이건할 당시인 1644년과 1661년, 두 차례 도입(島入)한 명나라 유민들의 영향으로, 원목을 사용한 기둥의 중장미와 선의 개방과, 남아식 불화단청(南亞式 佛畵丹靑)은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건축기법이라 예술성이 더욱 높게 평가된다.

   
 
거제부읍지에 따르면, 거제부 동헌(現거제면사무소)과 질청, 기성관, 그 외 부속건물(통인방, 군관청, 형방소, 아사, 내아 관청 등)에서 주로 사무와 일을 맡았던 분이 공식적으로 총 179명 이었다. 동헌 중심건물에 거제도호부사(무종 3품), 거제향청(鄕廳)의 우두머리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50인, 아전(인리) 30인, 거제부사의 관인을 보관하고 날인의 일을 맡던 토관직인 지인 50인, 관청의 심부름꾼 사령 13명, 관노 남13명 여 19명이 있었다.(都護府使 武從三品 座首一人別監二人軍官五十人人吏三十人知印十五人使令十三名官奴十三口婢十九口). 이 외에도 거제부사의 가솔들은 물론, 거제관기와 거제도 內 면단위 각 지역에서 파견된 사람이 한두 명씩 상주하기도 했다.

19세기 거제 기록 上, 거제도호부 관직에 등장하는 총 54 분의 좌수 아전 별감에는 유(兪)씨 14명, 옥(玉)씨 8명, 윤(尹)씨 12명이고, “임, 신, 남, 하, 진, 이, 김, 주, 최, 정, 원“씨가 1~2명씩 나온다. 19세기 말엽부터 대한제국 사이에는 하(河), 유(兪), 이(李)씨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토착민인 이 분들이 실제 거제부의 현장실무자이면서 거제도 유지(有志)들이었다.

거제현의 관아인 동헌, 기성관, 질청, 관청, 내아, 공소(工所), 통인방, 형방소, 읍창, 단실, 수직소, 외삼문, 내삼문, 군관청, 관노방, 교방, 사령방, 군고방 등은 배산 구조와 안산, 관아배치와 진입로 구조가 시각적으로 뚜렷한 축을 형성하여 한양의 광화문-경복궁-백악산-북악산의 축과 매우 흡사한 시각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현존하는 관아건물인 기성관은 거제현의 객사로써 중심적 역할을 하던 곳으로, 단청이 화려하고 웅대한 마루구조 건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예전 동헌(東軒), 내아(內衙), 관청(官廳), 형방소(刑房所), 수직사(守直舍), 외삼문(外三門), 내삼문, 단실(丹室), 나졸각(羅卒閣), 사소(射所), 호적고(戶籍庫), 급창각(及唱閣) 등의 건물이 비록 헐리고 그 자리에 거제면사무소가 들어서 있지만, 부속 건물이었던 질청이 남아있고 당시 고지도 등의 관련 자료가 많아 당시 읍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이다. 따라서 거제읍치의 관아와 거리는 조선후기 읍치의 전형적 경관과 구조를 보여줄 뿐 아니라 주요건물인 객사와 부속건물이 남아있어 역사적, 경관적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고 인정된다.

기성관(岐城館)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장대한 규모에 창호나 벽체가 없이 통간으로 된 마루바닥으로 우물마루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단은 매끈하게 다듬은 장대석 기단이지만 기둥 밑 주춧돌 주초는 막돌을 그대로 사용한 덤벙 주초(주추)이다. 주두 위에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포작을 세운 주심포(柱心包)형식의 건물로 기둥 바깥쪽으로는 서까래 도리인 외목도리를 설치하여 중앙부에서 두 개의 높은 기둥과 7개의 도리를 갖는 이고주(二高株) 칠량(七樑)의 장대한 구조를 갖추었다. 지붕은 양 측면에 처마가 없는 맞배지붕인데 중앙부를 조금 더 높이고 양단부를 조금 낮추어 팔작(八作)지붕으로 처리한 것이 역동적이고 특이하다.

현재 기성관 바로 뒤편 약10m 지점, 거제초등학교 운동장 동편에서 서편으로 군관들이 일을 보던 군관청(軍官廳), 관노의 거처인 관노방(官奴房), 관기들에게 가무를 가르치던 교방(敎坊)이 위치했었고 거제초등학교 정문에는 관청 안에 사령들이 모여 있는 곳인 사령방(使令房)이, 면사무소 정문 큰 나무 옆에는 건물 경비와 관리를 담당하던 수직사(守直舍)가 면사무소 서북편에는 약재들을 보관하던 단실(丹室), 면사무소 남쪽 편엔 큰 나무쪽에서 나졸각(羅卒閣)과 유치장 형방소(刑房所)가, 면사무소 서남쪽에 공물 보관 창고 대동고(大同庫), 군관청과 사령방 사이 동편에 음악과 연희를 담당하던 기관으로 취방(吹房), 現 면사무소 정문 일대에는 호적고(戶籍庫)와 관청에 소속된 사내종의 기거 처인 급창각(及唱閣)이 있었다. 큰 길이 확장되고 도시화과정에서 동헌 기성관 질청을 지키던 군인들의 사무실 군고방(軍庫房), 거제부사가 공사를 처리하던 동헌(東軒, 면사무소 자리)은 물론, 내아(內衙), 관청(官廳), 공소(工所), 통인방(通引房), 형방소(刑房所), 읍창(邑倉), 수직사(守直舍), 전제소(田制所), 부사(府司), 사소(射所), 대동고(大同庫), 문루(門樓), 화연고(火鳶庫) 등, 기와집으로 구성된 건물 총 200여 칸이 사라졌다.

◯ 1759년 거제부읍지에 따르면, 공해(公廨) 즉, 관가 소유 건물에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 관사(館舍)인 객사(客舍), 거제수령이 공사를 처리하던 동헌(東軒), 향촌자치기구로서 이용된 청사 향사당(鄕射堂), 군관들이 일을 보던 군관청(軍官廳), 군대의 북과 나팔 등 각종 악기를 보관하던 기고청(旗皷廳), 아전의 집무실 질청인 인리청(人吏廳)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1899년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에 따르면, 읍내에 하창(何倉), 호적고(戶籍庫), 육진군기고(陸陣軍器庫), 병고(兵庫), 죽림포의 수진군기고(水陣軍器庫), 죽림포 해창(海倉)이, 거제부 단묘(壇廟)로는 사직단(社稷壇)[在郡西五里] 군서5리 성황단(城隍壇)[在郡南三里] 군남3리 여단(厲壇)[在郡北五里] 군북5리에 있었고, 죽림포 누정으로 대변정(待變亭)과 제승정(制勝亭) 운주루(運籌樓)가 위치했으며, 읍내에는 진남루(鎭南樓) 사중대(師中臺)가 있었다하니 그 옛날 거제부의 화려했던 위용을 짐작케 한다.

   
 
2). 거제질청(秩廳, 길청)은 거제동헌의 부속건물 질청으로 아전들의 집무실로 사용하던 곳이다.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함락됨에 따라 1644년 거제동헌이 옮겨올 때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1926년 4월부터 부산지방법원 거제등기소로 사용되었으며, 1982년 1월 1일에는 등기소를 고현으로 이전시키고 1984년에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

ㄷ자형 평면에 중앙 4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으로 하고, 양측 부분은 전면으로 3칸을 돌출시켜 방을 배치한 큰 규모의 건물이다. 특이한 평면구성에 모든 외주는 원주를 사용하고, 5량 구조에 단청 팔작(八作)지붕의 민도리집이다. 옛 조선시대 질청은 ‘ㅁ‘자형 건물로 남동쪽 방향으로 대문이 한군데 있어 출입 가능했었는데 도시화 과정에서 일부 철거되면서 'ㄷ'자형으로 변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만 총 27칸 대규모 형태로 중앙에 공사용 대청을 두고 양 익사(날개부분)에 주거용 방을 배치했다. 특히, 전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이 넘는 중앙 대청은 현존하는 전통건축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조선시대 지도를 살펴보면, 건물의 네 면에 모두 지붕면이 있는 우진각 지붕과 다포계(多包系)양식의 집으로 주두(柱頭)나 포작(包作)을 갖추지 않고 모가 난 도리를 써서 꾸민 민도리집이었고 출입구 위치도 지금과 다른 곳이었다.

   
 
질청을 일명 ‘전헌(詮軒)“ 또는 ’인이청(人吏廳)‘ 혹은 ’작청(作廳)‘ ’연청(椽廳)‘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방을 비롯한 육방관속(六房官屬)들이 부사의 명령을 받아 직무를 수행한 사무소로 거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각방을 두어 사무를 분장 처리하였는바, 향리들의 인사(人事)와 서역(書役)은 물론 빈객(賓客)의 접대와 공물(貢物)의 징수, 호적과 부창(府倉)의 관리, 부병(府兵)의 징모(徵募)와 군기(軍器) 조달, 백성들의 사송(詞訟)과 형옥(刑獄) 등 수령의 치정(治政) 전반을 직접적으로 보좌하던 관청이다. 1895년(고종 32년)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거제도호부의 부사(府使)는 군수(郡守)로, 좌수(座首)는 향장(鄕長)으로 이방(吏房)은 수서기(首書記)로, 호장(戶長)은 재무서주사(財務署主事)로, 수형리(首刑吏)는 사송과서기(詞訟課書記)로, 풍헌(風憲)은 면장(面長)으로, 존위(尊位)는 이장(里長)으로 각각 바뀌었다.

3). 거제 기성관(巨濟 岐城館)과 송덕비군
"기성(岐城)"은 고려초기 거제현의 또 다른 명칭이었고, 거제의 별호(別號)이며 관풍안(觀風案)이다. 거제 기성관은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거제현 기성관(岐城館)은 거제 지역에 왜구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에, 조선 초기 1470년(성종1년) 이를 방어하기 위해 지세포,옥포,조라,장목,율포,영등,가배등 7곳에 수군진이 설치된후, 1471년에 거제현이 일반 행정과 함께 군사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고현성에 이 건물을 처음 지었다한다. 그러나 그때 일뿐, 1711년 거제도호부가 설치될 때까지 군사업무 총괄 건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1431년(세종 13) 외관의 품계를 재정리할 때 거제현령은 종5품(문관)이고, 만호(무관)는 종4품이었으며, 가배량(오아포)경상우도수군절도사는 정3품[당상관(堂上官) 서반 외관직(外官職)]이었기 때문에 각기 독립된 행정과 재정을 꾸려나갔다. 거제현령이 거제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품계)가 아니었다.

1711년 거제현이 거제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거제7진과 죽림포진영을 거제부사가 통합 관장하게 되었고 죽림포 진영의 수군은 거제부사가 직접 관장하였다. 기성관은 수백 년간 거제부의 객사(客舍)로써 그 역할을 수행하다가, 거제부사가 거제8진영의 수군합조(훈련)을 실시할 때에만 기성관을 수군조련 임시 집무실로 이용했다. 거제부사가 주관하는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할 때에는 고을 백성들이 그 장관을 보기위해 죽림포 인근에 새벽부터 모여들어 수천 명이 구경했다고 한다. 경술국치(1910년) 이듬해에는 거제초등학교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 거제 기성관 內 송덕비군(頌德碑群)
거제면 기성관 앞뜰에 1970년 거제군 문화공보실 주관으로 흩어져 있던 송덕비를 모았다. 거제읍치 250년 동안 많은 송덕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14기만 남아있다. 이중 철비6기는 개석과 비단이 하나의 통철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석비8기 중 3기는 개석이 있으나, 5기는 비신만으로 되어 있다. 

송덕비군(頌德碑群)는 1664년(현종 5년) 이후 약 250년 동안 부사(府使), 암행어사(暗行御史), 통상국(統相國), 순상국(巡相國), 관찰사 등 거제를 위해 선정(善政)한 송덕비 14기(基)를 모아 1970년 기성관 경내(境內)에 수립한 것이다. 이 중에 철(쇠)로 만든 비석이 6기인데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참고로 예전에 전국에는 철비 300 여기가 있었으나, 현재 남아 전하는 철비는 전국적으로 30기에 불과하다. 그 중에 6기가 우리 거제에 있어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다음은 비석 10기의 비문 내용을 소개한다.

   
 
◯ 거제면 송덕비군 철비(鐵碑)  

(1). '순상국 홍공 종영 영세불망비(巡相國洪公鍾英永世不忘碑)' 홍종영(洪鍾英, 1788년~1857년), 경상감사 홍종영(洪鍾英)의 퇴임에 맞추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남양 홍씨, 부(父)는 홍집규(洪集圭). 1844년 9월에 거제읍민이 세웠다. (높이 123cm, 나비 25cm 鐵碑)

[一境漁磯 恩並山高 民以賴活 德與海渴 濟溺寶筏 猶石可轉 救難䔒薩 爰銘于鐵 / "거제 땅 어장의 은혜는 산처럼 높아 백성이 이에 의지하며 사는데, 덕으로 여기며 바다를 갈구한다. 물을 건너다 훌륭한 배가 빠졌는데 가히 돌이라면 굴리련만, (경상감사 홍종영이) 꽃 향초 같은 소중한 배를 구해 냈다하네. 이에 철비에 새기노라."]
 
(2). '현령 최공 운서 청정 애민비(縣令崔公雲瑞淸政愛民碑)' 최운서(崔雲瑞), 정미년(현종 8년, 1667년)에 건립. 해주 최씨, 충청병사(忠淸兵使)로 퇴임. 부(父)는 최석징(崔碩徵), 거제현령 재직은 1666년 현종7년 8월 초10일 ~ 현종8년, 1667년 8월까지이고 1623년에 태어났으나, 사망한 해는 확실치 않다. (높이 170cm, 나비 36cm 鐵碑)
 
(3). '암행어사 조공기겸 영세불망비(暗行御史趙公基謙永世不忘碑)' 조기겸(趙基謙, 1793년~?),임천(林川) 조씨, 호조참의 역임, 부(父)는 조학빈(趙學彬)' 생부(生父)는 조학춘(趙學春)으로 자는 치수(稚秀)이다. 후면에는 '崇楨後五己卯十一月邑民立' 1879년 11월에 읍민이 세웠다.(총 높이 161cm, 나비 42.5cm 鐵碑)
 
(4). '도순찰사 이공면승영세불망비(都巡察使李公勉昇永世不忘碑)' 이면승(李勉昇,1766~1835), 본관 전주(全州). 자 계래(季來). 시호 문헌(文憲). 성순(性淳)의 아들이다. 1829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831년 1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833년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업무처리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비변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공조판서로 기용되었다. 1834년 순조가 죽자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높이 167cm, 나비 53cm 鐵碑)
 
(5). '현령 송후적(필)중청정휼민비(縣令宋侯迹中淸政恤民碑) 송필중[宋迹(必)中], 본관 여산(礪山) 자(字)는 성백(盛伯), 부(父)는 증사복시(贈司僕寺) 송덕신(宋德臣)이다. 1667년 현종 8년 9월 15일 거제현령 송필중 하직(巨濟縣令宋必中下直), 1670년 의금부(義禁府)가 송필중(宋必中)을 은진현(恩津縣)에 일년동안(徒一年) 정배(定配). 1673년 무관(武官)과 선전관(宣傳官)을 겸직. 거제현령 1667년 10월2일~ 1669년 6월까지 역임. 1669년 1월 건립. (높이 125cm, 나비 36cm 鐵碑)
 
(6). '통상국 이공규안휼민불망비(統相國李公圭(奎)顔恤民不忘碑)' 이규안(李奎顔)은 본관 연안, 자는 우약(愚若)이며 1773년 생(生), 부(父)는 이완희(李完煕)이다. 충청수사(忠淸水使),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제203대 삼도수군통제사는 1886년 3월~ 1887년 12월까지 만기 근무. 1888년(戊子年) 庚子月 향민(鄕民) 건립. (높이 180cm, 나비 49cm 鐵碑).
 
◯ 거제면 송덕비군 석비(石碑) 
(1). '행부사변후성우선정애민비(行府使邊侯聖祐(佑)善政愛民碑)' 변성우(邊聖佑) 거제부사 영조10년 1734년 3월10일~1735년 2월까지 역임, 순천영장(順天營將)으로 이배(移拜,전근) 됨. 내금위장, 무랑청(武郞廳) 등 근무. '강명우청 만고유일(剛明又淸 萬古惟一)' 성질(性質)이 강직(剛直)하고 두뇌가 명석하며 청렴함이 언제나 한결 같았다. 건륭(乾隆) 원년 1737년 병진년(丙辰年) 3월 건립. (높이 200cm, 나비 52cm 石碑).
 
(2). '통정대부행 부사변공진영재읍인정몰불망비(通政大夫行府使邊公震英再泣仁政沒不忘碑)' 변진영(邊震英) 거제현령 숙종 30년 1704년2월19일 ~1705년12월, 통우후(統虞候)관직, 숙종37년 1711년 거제도호부 승격으로 거제 초대부사로 1711년 5월25일~1713년 3월까지 역임. 덕원부사(德源府使). 1727년 가선대부로써 기계활인 노(弩,큰 활)에 대한 노해(弩解)병서를 저술. (높이 195cm, 나비 54cm 石碑).
 
(3). '순상국 이공 휘근필 청덕애민비(巡相國李公諱根弼淸德愛民碑)', 이근필(李根弼), 전의(全義) 이씨로서 장악정(掌樂正), 문비랑(文備郎), 울산부사(1842년), 山南都巡使(산남도순사), 경상감사, 황해감사, 이조판서 역임. 부(父)는 이근오(정1품). 경상감사 재직 때인 고종 15년(1878년)에 진주 지역을 비롯한 남해안 지역에 논밭과 집이 무너지는 재해를 입어 휼전을 베풀어 많은 백성을 구제하였다. (높이 148cm, 나비 45.5cm 石碑).
 
(4). '통정대부행부사 안후명문 선진애민청덕비(通政大夫行府使安侯名(允)文善賑愛民淸德碑)', 안윤문(安允文) 거제부사 1730년 영조6년 6월12일 부임 ~ 1732년 3월에 거제부사(巨濟府使) 유임됐으나 1732년 3월 송전 화재를 통영 보고,  4월 파직 후 잡혀갔다. 옹정(雍正) 갑인년(1734, 영조 10년) 10월 건립. (높이 130cm, 나비 45.5cm 石碑).

[주1] 巡相國(순상국) : 조정 최고위급관료나 경상도관찰사의 지방순찰 때 쓰인 존칭어.
[주2] 統相國(통상국) : 삼도수군통제사 순찰 때 쓰인 존칭어.
[주3] 兵相國(병상국) : 고위 무관을 일컫는 말, 병마절도사, 좌수사 등.
[주4] 都巡察使(도순찰사) : 군관 직. 정 2품, 종 2품의 관찰사가 겸임한 임시직.

4). '기성(岐城)'의 어원
먼저 거제에서 기성(岐城)을 주로 사용한 역사기록을 살펴보자. ① 조선시대 감사의 전임자 명부, 즉 역대 현령 부사 행적(치적)을 정리해 놓은 책 이름으로써, 거제 현령 부사의 명부 표지 제목이자, 거제의 관풍안(觀風案)이었고 ② 또한 고려시대 983년(성종 2년) 거제현이 기성현(岐城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년) 거제현으로 되돌아 불리어졌으니 35년 짧은 기간 동안의 거제지명인 셈이다. 그 이후 ③ 약 900년간 거제의 별호(別號)로 불리어 졌음은 많은 역사 기록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폐왕성은 예전에 둔덕기성으로 지칭되었다.

 기성(岐城)에서 "기(岐)"는 뜻을 나타내는 山(메 산)과 음을 나타내는 "지"支(가를 지)의 변음으로 "기"로 읽게 된 글자이다. 신라시대 향찰식 표기로는 "枝"(가지 지)를 말하며 木(나무)와 支(가를 지)로 이루어져 "갈려 나온다"는 뜻이나, 우리 고유어로는 "가지"를 의미한다. "城"은 당시 신라와 고려초기 지명 표기에 "땅"이란 뜻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기성(岐城) <지성(枝城) <"가지땅" 즉, 중심 지역 밖의 땅, 즉 "변방" 또는 "가장자리의 땅"을 지칭하는 말이다. (단, 조선시대 이후 다른 지역, 새로운 지명은 이와 다르다, 한자의 뜻으로만 표기).
 
"기성"을 사용한 지명은 역사서에 우리 거제를 포함하여 총 4군데가 있었다. ① 강원도 금성현(金城縣) 조선왕조실록 (江原道 金城 岐城面) 여지도서, 기성현(岐城縣)은 본래 고구려의 동사홀군(冬斯忽郡)인데, 신라에서 기성군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현(縣)이 패망(敗亡)하게 되매, 지금 직촌(直村)으로 하였다. ② 성주목(星州牧) 조선왕조실록, (星山郡 高麗初改今名顯宗時來屬別號岐城) 여지도서. 성산군은 경덕왕이 성산군(星山郡)으로 고치고, 고려초기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이후로 속현이 되었고 별호로 '기성'이라 불렀다. ③ 조선시대 평안도 의주 '기성연대(岐城煙臺)' 연대는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에서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정치·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을 말한다. ④ 그 외 일본서기 ["도구사기성 都久斯岐城"], ["침복기성枕服岐城"]이 나온다.  

이상과 같이 모든 역사 기록에서 살펴보면, 당시 수도(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항해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일본으로 가는 배가 전부 거제도를 거쳐 해류를 따라 이동했기에 거제도는 남쪽 경계의 끝에 위치한 변방이었다.

또한 ‘岐城‘은 두 글자 모두 평측성에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글자인데 반해, ’巨濟‘는 두 글자 모두 측성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조선시대 학자들이 ’巨濟(쥐지)‘보다는 ‘岐城(치쳥)‘이라는 지명 표기를 더 선호한 이유도 한몫을 해, 여러 문헌에서 ‘岐城‘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제(巨濟)는 신라 경덕왕 757년 개명[景德王改之]한 ’거제’라는 이름 속에, 클 거(巨)와 건널 제(濟)로 '크게 건너다'라는 단순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濟"(건널 제)는 우리나라 고유어 "거리츄다", "거리치다", "구제하다", "거느리치다(물에서 건져내다)"라는 순 우리말의 한자어이며 "巨"(클 거, 어찌 거)는 "(큰) 크다", "어찌" 라는 말 이외는 별 뜻이 없는 글자이다. 1500년 전의 '거(巨)'는 대부분 의문사 '어찌'로 많은 지명에 사용되었다. 실제로 '巨濟'는 “어찌 건널까?” 걱정스레 표현한 '섬 지방'을 일컫는 말이다(참고 : 濟州는 ‘물 건너 고을 섬’이라는 뜻). 하지만 "크게 구제할 아름다운 섬"이라는 멋진 말로 쓰인다면 더욱 미래지향적이며 우리 거제를 위해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역사 이래 거제 섬을 지칭한 ‘사도도(沙都島)’ ‘상도(裳島)’ ‘거제도(巨濟島)’는 모두 ‘섬(island)‘이라는 뜻을 가진 공통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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