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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전복(全鰒)과 해남해녀[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거제도는 역사이래로 갖은 해산물이 풍부하여 육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특히 귀한 전복(全鰒)은 감영이나 중앙의 진상품과 공납물로 19세기말까지 이어졌다. 역사서에 기록된 거제도 전복을 소개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서 거제 토산품, 해동지도 거제부 토산품 1750년대, 19세기 <진상품> 주요 산물편, 거제읍지(巨濟邑志) 1864년과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품(土産),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1899년 진공품(進貢), 거제부보민고절목책(巨濟府補民庫節目冊) 1830년 가입질(加入秩) 수입항목 등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거제도의 특산물이었다.

예로부터 서울로 진상한 건전복은 껍질과 내장을 뺀 말린 전복이라, 3.75kg 1첩(접)에 담긴 전복이, 크기에 따라 약100개~200개 정도 들어가 있었다. 이에 공출로 정해진 양을 해결코자 반쯤 말린 전복을 진상하게 되었는데, 통영(거제도 포함)에서 올린 반건조한 전복의 품질이 나쁘다는 이유와, 서울로 운송 도중에 부패했다는 사유를 들어, 통제사의 파직을 요청하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전복은 한자어로 ‘복(鰒)’ 또는 포(鮑)라고 한다. <현산어보>에서는 복어(鰒魚), <본초강목>에서는 ‘석결명(石決明)’이라 하여 눈을 밝히는 약(藥)이라 했다. 일명 구공라(九孔螺)라고도 쓰고 있다. 김려의 『우해이어보』에는 살아 있는 것은 생포(生包)라고 하고 죽은 것은 전복(全鰒)이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포(包)는 전복의 방언이다. 『자산어보』에는 전복을 복어(鰒魚)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맛이 달고 날로 먹거나 익혀 먹어도 좋다. 말려서 포로 만들어 먹으면 더 좋다.'고 전한다. 말린 전복에는 다양한 형태의 전복이 있었다. 이를테면 추복(搥鰒 두드려가면서 말린 전복), 조복(條鰒 길고 가늘게 썬 전복), 인복(引馥 납작하게 펴서 말린 전복)이 있었고, 또한 소금에 약간 절인 생복(生鰒), 반 건조한 전복(半乾全鰒) 등을 조공으로 올렸다. 전복은 맛도 좋고 귀해서 예로부터 조개류의 황제 대접을 받아왔다. 게다가 영양분까지 풍부해 “바다의 산삼 또는 웅담”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연근해 어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바닷가 수렵채취는 수천 년이 넘는 오래된 어업방식이다. 해남 해녀(海男, 海女·潛女)는 고대로부터 계속 이어온 어업의 한 방편에서 출발하였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유교적 생활방식이 보편화되면서 해녀보다는 해남(海男)이 전복을 잡는 해부(海夫 어부)로 더 큰 기능을 하였고, 해부가 잠수하여 작살이나 갈고리로 전복을 채취하였다.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청성잡기>에서 “울진(蔚珍) 둔산진(屯山津)에 어부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작살로 찔러 잡았다”하였고, 거제도 김진규(金鎭圭 1658∼1716년) 선생은 1690년경 갈고리나 작살로 해부(海夫 沒人)가 잠수하여 채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윤증(尹拯 1629~1714), 조문명(趙文命1680~1732) 등도 어부가 전복을 채취했다고 그의 문집에서 전한다.

그러나 제주도는 다른 지역보다 수십에서 수백 배에 이르는 전복의 공출[서울진상 : 제주도 연간 5500첩 이상, 거제도 서울진상 약 30첩 이상, 그 외 통영 김해진관 공출 상납 수백 첩]과, 수많은 수효를 충당하기 위해, 해녀가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성보다 여성이 많은 바닷가의 특성 上, (여초현상)].

1105년(고려 숙종 10) 탐라군(耽羅郡)의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이 "해녀들의 나체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에서 해녀라는 말이 등장하였고, 1629년 이건의 [제주풍토기]와 1670년 김춘택의 [북헌거사집]에는 '잠녀(潛女)'로, 위백규의 [존재전서]에서는 '해녀'라고 쓰여 있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제주해녀의 물질은 그 명맥이 수천 년을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 일반적인 우리나라 해남해녀(잠수부)는 사실상, 고대로부터 이어오다가 고려중기부터 여성의 민망한 나체가 드러난다는 사회 도덕적인 규범으로 인하여, 해녀의 전복 채취를 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이학규(李學逵 1770∼1835년)의 ‘채복녀[採鰒女] 전복 캐는 여인네’ 기사시(紀事詩)에서 알 수 있듯, 경남 바닷가, 거제시 고성군일대에도 해녀 잠녀(海女 潛女 潛嫂)가 한가한 어촌을 배경으로, 19세기 이전부터 이미 직업으로써 삶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 당시 거제도 어촌에는 남녀 구분 없이 개발(해산물 채취)을 하다가 여성들이 자연스레 수영을 하면서 전복을 채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학규 선생의 경남 김해배소 죽도에서 전복을 채취할 수 있는 바닷가까지는 옛 길을 따라 최소 40여리가 넘는 먼 곳이었다. ‘전복 캐는 해녀’를 관찰하고 인터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유교적 봉건질서가 뚜렷한 영남지방에서 해녀의 작업이 용인될 사회상황은 더욱 아니었다. 육지를 제외한 영남의 한적한 섬 지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채복녀’ 시편은 이학규 선생이 거제도에 머물렀던 기간에 창작한 작품으로 추정되며, 거제도 해녀의 역사는 신석기시대 이후 수천 년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1) 몰인설(沒人說) 거제 해남(海男,沒人). / 김진규(金鎭圭 1658∼1716년). 거제면 대숲개.

김진규(金鎭圭)선생이 거제시 거제면 죽림포(대숲개 竹林浦)에서 1690년 여름에 전복을 채취하는 거제 해남(海男,沒人)의 모습과 생활상을 보고 "몰인설(沒人說)"이라는 제목으로 쓴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부(해남)에 관한 기록이다. 200여 년 전의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보다 약 100여년 앞서 해남, 잠수부의 해산물 채취 방법과 생활상을 기록하였다. 잠수인(沒人)의 생활상을 세세히 살펴, 전복을 채취하는 방법, 잠수인의 외형 모습, 낙천적인 잠수인과의 인터뷰 등을 아주 멋지게 표현했다. 당시 신분제도상, 천하고 힘든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생계를 훌륭히 꾸려 나가는 잠수부의 태도에 자신의 유배 상황과 견주면서 지난 세월을 반성하고 깨닫는 그런 글로써,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없으며 가치 없는 삶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거제시민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주위에서 늘 보아온 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거제도에는 해녀보다도 해남(海男) 즉, 남자들이 잠수하여 여러 가지 해산물을 채취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잠수부(男)에 관한 상세 기록은 최초인지라, 참으로 자랑스럽다. 또한 선생은 거제도 유배생활 중에 지은 시(詩)들과 각종 기록(竹泉記, 望鷄龍山記, 擊蛇文, 沒人說)에서 당시 거제지역의 풍습과 생활상, 풍경을 알려준다.

조선시대 전복은 통영 제주 거제 연일 동래 등지에서 임금께 진상되던 공물로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다. 거제도에서 5년간 귀양살이 한 김진규 선생은 1694년 7월 서울로 복귀한 후, 임금께 다음과 같이 아뢴다.
"전복은 다른 어채(漁採)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바다 밑 10여 길 아래로 들어가야 겨우 얻을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니 이를 착취함은 진실로 온당치 못한 일이며, 더구나 통영에는 진상채복선(進上採鰒船) 즉, 오직 진상(進上)할 전복(全鰒)만을 따던 전용 배에는, 전복을 채취하는 해부(男)가 있으나 오히려 부족하다하여 해변 각 읍의 해부에게 두루 사역을 시키며 그 지급하는 본전도 역시 3~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1년 사이에 여러 차례 울력을 시키고, 한 차례 세금이 매번 자그마치 1백 여첩(貼)에 달한다. 뭍에 있는 물산(物産)도 잇대기 어려움을 걱정하는데 바다 밑에서 구하는 것이 더 말할 게 있겠는가? 이러므로 연해 해부들은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다. 거제 한 읍의 전선(戰船)수호[선박 수리]도 오로지 해부에 의지하고 있다. 해부는 사실 예사 백성이 아님에도 통영의 착취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 하니 크게 한심스럽다."

<전복 캐는 잠수부의 인생론>
전복은 보배다. 거제사람들이 최상의 보배를 생산한다. 고을 읍치에 거주하는 죽림포 사람의 일로써, 고기잡이와는 그 이로움이 많이 다르다. 갯가에 재물을 취하러 가는 사람이 있어 내가 물었다. "이 일이 이로운건 무엇인가?" 가로되, "이건 천한 일입니다" 얼마나 넉넉한지 물었다. "지아비가 바다에 죽을 정도로 위험하며 전복은 반드시 바다 깊은 곳에만 있습니다. 그물로 싸서 잡는 게 아니라 나뭇가지 갈고리로 사로잡으며, 반드시 바다 밑에까지 잠수하는 동안 호흡을 참고 머물며 탐색하고 찾아, 손에 넣으면 중단해 올라오고, 또 반드시 작살 칼날로 인한 상처가 생기면서 비로소 가히 잡습니다. 약하게 천천히 칼날로 재갈을 물게 해야지.. 아무리 칼날로 힘을 열심히 쓰더라도 전복이 드러내 벌리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서로가 대립하여 고집하니 어찌 일이 더디지 않겠습니까? 가끔은 물에 빠져 나오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또한 바다엔 사악한 물고기가 많아 사람을 물어뜯기도 잘하며, 바다 밑에는 심히 물이 차가워, 아무리 더운 계절에도 물에 빠지는 사람은 항상 차가움에 두려워한답니다. 그래서 모두 물에 잠수하는 걸 꺼립니다. 따라서 전복 껍데기에 이빨을 열 번이나 남긴 건, 배운 것이 부족해서입니다. 차츰 배워 익숙하면 깊게 들어간답니다. 반복을 스물 번 정도 해야 비로소 능숙해지고 이로써 마흔 번이 지나면 아주 능숙하게 된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잠수부(沒人)는 항상 바다에 있어 그 머리털이 그을려 메마르게 보이고 그 살갗이 거칠어 얼룩얼룩하다. 흥겹게 사는 모습인데도 보통사람과 다르다한다. 이런 연고로 오랑캐는 아니지만 천하게 보인다. 그 일이 거칠고 또한 천하여 이와 같다. 관아에 공물을 주지도 못할 형편인데 무슨 이익이 있을까? 내가 말하길, "그러면 병이 날껀데 어찌 죄다 버리지 않는가? 이러니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는가?" 잠수하는 사람이 입을 딱 벌리며 웃음을 머금고 말하길, "어찌 잠수하는 자의 일이 편안하겠습니까마는 다 소인의 일이옵니다". "농사와 더불어 장사도 이와 같겠죠? 농부가 굶주릴 때는 가뭄과 장마마다 잇속을 챙기려고 남북으로 흩어 달리겠지만 그런 괴로움과 나의 일과는 다르답니다". 이와 같은데도, 군자는 업을 살펴야 하거늘 편히 앉아서 녹봉과 먹을 것을 취하고 따르는 무리와 함께한다. 벼슬아치는 수레를 타고 가며, 장식한 쇠가 붉게 빛나며 관의 장식이 위엄이 있다. 자신의 근거가 있는 고을 관청으로 향해 들어가 고을 구역에 다다르면 즉시 관인들이 환영한다. 이런 걸 가히 일컬어 극락같이 영화롭다한다. 그리고 또 그 관아 음식 맛도 소문이 났고, 아침에 녹을 받아 밥을 먹고는, 저녁에 꾸짖고 나무란다.

예전의 고을 관청이 이러하니 오늘날 영남 바다엔 부모형제가 곁을 떠나기에 이르러 이름이 욕되게 되었다. 이내 목책 안에서 나가고 머무르다가, 형벌을 피해 나간 타향에서 병들고 죽지 못해 사는 자가 대부분이다. 위태로운 벼슬살이 또한 어찌하리오? 이러한데 잠수부와 무엇이 다르리..

/ 잠수부의 성성한 고통이 천박하다 하지만 잠수를 익혀서 익숙해지면 곧 깊이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 물속에 들어가 주위를 살펴 머물고는 손을 쉽게 넣는다. 점술과 지술로 생활하니 물결의 상황에 순응하는데, 귀신이 다닌다고 발을 뗄 순 없다한다. 그 방법(미신)을 주저하더라도, 잔물결을 밀어내 더디고 가벼이 물에 몸을 담근 후에 가지런히 하고 들어가서 헤엄친다. 평정심을 찾고 넓고 큰 바다를 떠다니며 두루 돌아다니다 살피고는 빠르게 작살로 찔러 사로잡는다. 그리고 또한 쉽게 소라나 방합(씹조개)을 잡는다. 또한 쇳소리(숨비 소리)를 울리고 이내 들어간다. 즉 사악한 물고기를 피해야 하기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음은 물에서 나오면 차디 찬 몸을 녹이기 위해서다. 관소 안 공관의 세금을 내고 다행히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걸로 돌아가서는 팔아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 생계는 그 일로 애써 이어가며, 그 일로써 자연스레 다스려진다. 사람들이 비록 천하게 여기더라도 가족은 즐겁다. 나 역시 무엇이 귀하고 천한지는 모르겠으나, 바로 여기에 그 가치가 있다. 비록 그러하지만, 모진 바람에 거친 물결이 일면 그 가격이 높아져, 상당히 값이 오른다. 나 역시 앞으로 벌어질 잠수의 어려움을 절감한다. 항구로 서둘러 가, 배가 돌아오길 기다리다 때를 맞춰서 작업을 하고, 서로 형세를 나타내 알리곤 한다. 이런 등등의 연유로 위태로움에 빠질 수 있어 많이 수확하지는 못한다. 한편으론 농사나 장사나, 다 애쓰는 건 같다. 진실로 이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애써 일함에 있다. 그러나 가령 극락세계를 믿으면서 영화로운 것을 비교하고, 남의 밥을 먹고 살아도 그 누가 내 힘으로 생계를 이어 간 만 하겠는가? 간사한 자는 오직 직책만 고려한다지만 무엇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것만 하리오? 그리고 자신의 일이 소중할 때 영화와 명예가 있는 것이며 또한, 누가 나를 천하다고 욕 하진 않는다. 나의 상황이, 안으로는 울타리에 가두고 밖으론 병에 걸려서 사망한다거나 더불어, 그 당시 정승의 권세를 기다린다면, 언제 벗어날 수 있으랴? 멀리 떨어져 위태로움에 빠져있는데.. 나는 지금 어찌하여 또 병에 걸려, 비록 내 고향마을만 바라보게 됐지만 우리 유배자가 항상 즐겨 편안히 태평하게 보낸다면, 벼슬하는 자들이 틀림없이 오랏줄로 묶어 불러서 꾸짖을 것이다. 잠수부 역시 이 같은 사람처럼 위태하니 편안한 직업이라 어찌 말할 수 있으랴? 잠수부가 전하는 바로는, 이미 이런 일들에 관해 충분히 괴로움을 알고 있었다. 잠수부가 어찌 한이 맺히지 않겠는가? 이로써 나를 죄다 내려놓고 깨우쳐 돌아보니, 아~  잠수부가 도리어 나보다 편안하게 생각된다. 살펴보니 땀에 흠뻑 젖어 부끄러워하고 놀라워하면서도 입을 헤벌쭉 벌리고, 행복해하며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오호~라 옛 사람들이 바다와 견주어서 벼슬살이가 좋다 해도 나는 정말 믿지 못하겠다. 지금 검증해보니, 잠수부에 관한 소문들이 돌이켜 지나쳤다생각된다. 이런 견해로써 나는 주장해본다. 온전치 못한 직업을 택하여 스스로 마음 아파하면서, 벼슬살이 한 나에게, (잠수부가) 마음 열고 난 후에야 경계하길 시작했다.

[鰒魚之珍 而産裳郡者最珍 郡之居竹林浦者業之 其利多他漁云 浦之人有來貨 余問曰若業利果如何 曰此賤業 何足問 夫海死地 而鰒必在海深處 又非網罟杈鉤可捕 必沒于底 閉呼吸留時頃 窮探索得之 而又必疾以刃擉 乃可捕 若少徐則鰒啣刃 雖盡力刃不出鰒不動 相持而遅焉 有溺不出者 又海多惡魚善齧人 海底又寒甚 雖盛暑沒者常凜凓 盖沒難也 故自齒餘十之淺 稍習之深 至二十乃能 而過四十卽廢焉 //又沒者恒在海 其髮焦而枯 其膚麤而駁 以其興居體貌 異乎恒人 人故不夷而賤之 其業之苦且賤如此 而供官之不給 何利之有 余曰然則若病之乎 奚不舍斯而務他 沒人呀然笑曰 業 豈有便於沒者 小人之業 農與商爾 農餒於暵澇 商走乎南北 其苦與我均 若乃君子之業仕 安坐而祿食 乘軒而從徒 金朱耀如 貂蟬峨如 入則據府省 出則涖州部 斯可謂極樂而榮矣 然亦甞聞之 朝而祿食 暮而譴責 昨也府省 今也嶺海 骨肉離身名辱 而內柴乎趣舍 外罹乎刑辟 能不死而生者盖幾希 仕之危何如也 若沒者 誠苦且賤 然其習也熟則可能深 其入也審則可得留 占風之息 候波之伏 以神行而不以足履 循乎其道 排細浪欵輕漚 齊然而入 汩然而出 坦蕩乎若行周行 而視之諦而擉之捷則捕 之亦不難於螺蚌 且鳴金而入焉則惡魚可辟 火而出焉則凜凓可解 官而幸有餘焉 歸而鬻之 以哺婦子 食其力而治其事 室家煕煕 人雖我賤 我亦不知貴賤之所在矣 雖然若値惡風暴浪 吾亦先見其難爲 回船而趣港 竢時而作 相勢而發 故不至乎阽溺矣 彼農商之苦 固不必舍斯而務也 //而就其極樂而榮者較之 食人之食 孰如食吾力 任人之職 孰如治吾事 而其貴之有榮 又孰如吾賤之無辱 况其內柴外罹而死亡 與竢時相勢而免乎阽溺懸矣。吾又何病乎哉 雖以吾邑見之 吾儕之其樂常晏如 而 仕者之以譴來絡然 子亦其一 業之孰危孰安 子可辨已 胡不悔子之業 而乃反諭我舍斯 嘻 子休矣 余聞而愧而汗浹 驚而口呿 久不能答 嗚呼 古人有以仕宦比 海而余未之信 今驗以沒人言反甚 故志其言 自悼擇業之不善 仍欲以誡後之溺於仕者]

   
 
2) 채복녀[採鰒女] 해녀(海女) 이학규(李學逵 1770∼1835년) 기사시(紀事詩)

<전복 캐는 여인네> 인수실집(因樹屋集).
낙하생이 귀양살이 하던 19세기 초기에는 중세적 역사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 있던 시기였다. 농업생산력과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한 토지상품화의 가속화로 토지 소유는 지주층과 부농층에게 집중되었다. 대부분의 농민은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거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소출의 절반은 지주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관아의 세금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빈부의 격차는 더욱더 심해지고 관정(官政)의 기강은 무너지고 부패는 끝없이 이어지니 민중들의 고난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세금을 못 내어 관청에 끌려가 매를 맞고 자식까지 팔아야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민중들이 지배계층에게 받는 수탈은 어민들에게도 한결같이 부여되는 고통의 질곡이었다.

이학규 선생이 창작한 많은 시편 중에는 바다의 물산 즉, 어패류 관련 작품은 거제도와 김해에서 체험한 작품이 함께 섞여 <낙하생집>에 실려 있어, 당시 19세기 초의 경남 해안지방의 물산(物産)과 풍속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집이다. 당시 선생의 김해배소에서 전복을 채취할 수 있는 바닷가까지는 당시 길을 따라 최소 40여리가 넘는 먼 곳이었다. 전복캐는 해녀를 관찰하고 인터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채복녀 시편은 거제도에서 창작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채복녀[採鰒女]’ 즉 ‘전복 캐는 여인네’라고 제목을 붙인 기사시(紀事詩)는 민중들의 평범한 삶의 모습과 함께 고난과 역경의 단면을 보여준다. ‘채복녀‘ 장편고시 40운에는 당시 하층민으로서, 바닷가 여인네들의 숙명적 생애를 읊고 있다. “진귀한 음식 전복을 탐하지 말라“하며, 늦가을 추위에도 험한 물질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임을 적나라하게 읊고 있다. 선생은 전복 채취의 위험한 작업을 직접 보면서 강한 연민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자맥질을 하고 태연히 웃으며 어린아이 젖을 먹이는 강한 생활력을 섬세히 그려내고 있다. 이렇게 채취한 전복을 관아 관리에게 빼앗기고 서울로 다시 공출 당하는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위정자의 탐욕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모순된 시대현실을 아파하면서 애민의식이 점철되어 잘 나타난다. 그래도 선생은 세끼 밥이라도 먹고 사는 해녀들이 총각들에게 가장 인기 좋은 ’신부감‘이라고 말하면서 시편을 마무리 하였다.

食魚莫啖鰒 생선을 먹어도 전복은 먹지 말라.
取婦須績纑 여인네는 모름지기 길쌈을 한다지만
績纑死同穴 길쌈하다 한가지로 무덤 속으로 향하니
啖鰒慕鮮腴 전복을 먹으면서 살 찐 생선 탐하랴.
援繳亦射鴈 주살 끈을 잡고 기러기를 쏘더니만
投餌亦釣鱸 미끼를 던져놓고 농어를 낚는다.
誰令水中鰒 수중의 전복이라 누가 말하리오.
珍味充盤需 상위에 가득 차려진 진귀한 음식이네.
噫彼採鰒女 슬프다 저 전복 캐는 여인이여~
生死寄斯須 생사가 순식간에 달려있구나
處地本潟鹵 사는 곳이 본래 해변이라서
蠶穀非所圖 누에나 농사는 아예 못한다네.
名參漁蠻籍 이름은 고기잡이 문서에 오르고
足踏鮫人居 발길은 인어 사는 곳까지 미친다네.
霜膚赤髲髮 하얀 살갗에 붉은 머리카락
何異魈與魖 도깨비 모습과 무어 다르랴
九月十月交 9월에서 10월 사이에
驚浪無朝晡 거센 물결은 밤낮이 없다네
沙頭列酒缸 모래톱에 술항아리 늘어놓고
煗腹先一壺 뱃속 데우기 위해 먼저 한잔 마시네
洶洶白銀屋 거세게 물결치는 집채 같은 큰 파도
立地猶愁予 땅에 서 있어도 오히려 근심스러운데
敎人到彼中 사람에게 저 물속에 들어가게 하니
奚翅撲虎愚 맨손으로 호랑이 잡는 어리석음과 무어다르랴.
女乃顧之笑 여인이 돌아보며 웃고서는
怡肰脫裙襦 기쁜 듯이 태연하게 옷을 벗네
持刀綰手腕 칼을 들어 팔뚝에 매달고
牽繩約身軀 끈을 당겨서는 몸을 묶어 맨다네.
先將繩抵水 먼저 끈을 잡고 물속에 들어가면
拍浮三石(盧+瓜) 통 박 바가지는 둥둥 물에 뜬다네
終乃以身隨 마침내 몸이 물속에 따라 들어가
瞥若江中鳧 잠깐 사이에 강 속의 오리처럼 보인다.
陰沈碧琉璃 유리 같은 푸른 물이 해 그림자에 잠기는데
晃朗驚一噓 환하게 밝은 한줄기 빛이 경이롭구나.
龍堂紫貝闕 용당은 자주색 조개껍질로 꾸민 대궐이라고
曩聞皆知誣 예전에 들었는데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네.
苔藻海之文 해초는 바다의 빛깔인데
滑澾登姸跗 맨발로 밟고 오르니 미끄럽다.
依依赤鬣鬐 붉은 갈기가 야들야들 부드럽고
頭觸驚騰逋 바로 앞의 물고기 놀라 뛰다 달아난다.
靑蒼九孔蠡 짙푸른 빛의 전복(九孔螺)이
匾貼盤陀隅 굴곡진 모퉁이 바위에 납작이 붙어있다.
潛身悄近歬 자맥질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근심하는데
風水浩自如 바람과 물이 마음대로 넓고 넓게 흐르네.
挺刀卒肰下 칼을 빼어들고 돌연히 아래로 들어가
一斲無趑趄 망설임 없이 한 번에 떼어낸다.
無令稍驚覺 자못 놀랍지 아니한가?
粉碎不脫除 부수지 아니하고 손질해 나온다.
團團握中殼 손아귀 안에 껍질이 둥글고 둥근데
何但賈胡珠 어찌 가호(賈胡)의 구슬이라 하지 않으랴.
要知出水處 요컨대 물이 넘쳐 나오는 곳에서
泡沫涌須臾 포말이 잠시 떠오르더니
稍稍頭容露 점점 머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慘慘顔色沮 고통스런 얼굴에 물기가 흐른다.
騞肰乃一喙 휘~익 하고 길게 한번 내뿜는데
而今知免魚 이제야 고기신세 면한 줄 알겠구나.
中置炭火 모래톱에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顙泚方始蘇 이마에 땀 솟으며 생기가 돈다네.
從容整裙帶 조용히 치마끈 정돈하고서
次第提乳雛 다음엔 어린아이 젖 물리네.
蕭蕭白茅屋 허술하게 띠 풀로 이은 오두막집
井臼殘陽徂 우물가 절구통에 석양빛이 비춘다.
夫壻糴米回 남편은 이제야 쌀 사서 돌아오니
始念晨爨疎 비로소 아침거리 어설펐음 걱정하네.
鄰人簇岸上 이웃사람들 언덕에 둘러앉으니
督促來府胥 독촉하는 고을 아전이 달려온다.
鮮肌藿葉鱠 신선하고 살찐 것은 곽엽회 만든다고
急遞歸官廚 급하게 운반하여 관아 주방에 들이고
聯串黃蠟光 잇달아 꽨 황랍 빛나는 것은
乞與京官輸 거두어 서울 관아로 실어 보내네.
紛肰石決朙 애써서 캐어 들인 전복 등등은
是女當桮盂 이곳 여인네에겐 살림 밑천인 것을....
生憐對門女 맞은편 집 여인을 대하니 가련한데
善泅烏鬼徒 헤엄 잘 치는 가마우지 같구나.
肌溫不凚㾕 살가죽이 따뜻하여 오한에 떨지는 않으니
精力破瓜初 심신의 활동력이 파과지년의 나이 같네.
沒水二十丈 물에 잠수해 20장(60m)을 다니고
閉息飯頃餘 반경(飯頃) 정도의 시간동안 숨을 참는다.
生小百無憂 젊은이들도 만사에 걱정이 없어
求㛰溢門閭 마을 어귀 문에 구혼자가 넘친다네.

[주1] 가호(賈胡) : 서역의 장사꾼이라는 뜻, 가호주(賈胡珠)는 서역의 장사꾼이 아름다운 구슬을 얻어서 자기 배를 가르고 숨겨 둔다는 고사. 훌륭한 재능을 쓰지 않고 숨겨둔다는 의미도 있다.
[주2] 오귀(烏鬼) : 당대 남방인이 제사지내던 귀신이름, 흑인, 돼지. 까마귀 귀신, 가마우지.
[주3] 파과(破瓜) : 파과지년(破瓜之年)의 줄임말. 여자의 나이 16세를 이르는 말, 곧 오이 과(瓜) 자를 파자(破字)하면 여덟 팔(八) 자(字)가 둘이 되므로 이팔(二八)이 십육(十六)이 됨. 남자의 나이 64세를 이르는 말, 곧 여덟 팔(八) 자(字)가 두 개이므로 팔팔(八八)이 육십사가 됨.
[주4] 반경(飯頃) : 식경(食頃), 한 끼 음식을 먹을 정도의 시간.
[주5] 생소(生小) : 후생소자(后生小子) 줄임말, 후배, 젊은이, 풋내기  

   
 
3) 석결명배기[石決明盃記] 전복 껍데기 술잔 / 남구명(南九明 1661~1719년).
남해에는 넓적한 그릇 같은 물건이 기이한 것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앵무"가 으뜸이라 일컫고 그 다음이 "소라" 또한 그 다음은 "노실" 이라 한다. 어찌 석결명이 포함되지 않는가. 나는 하나를 얻어 시험 삼아 맛을 보았다. 그 만들어진 모습을 살펴보면, 물품에는 등급이 있었고 앵무의 좌우에 청백색의 운기가 있었다. 소라의 앞뒤에는 두 개의 자루가 있다. 오로지 자연스런 무늬가 새겨있어 사람들이 가공하여 그것을 사용한다. 대간의 벼슬아치를 내버려두니 일이 어그러질까봐 마음이 불안하다. 모두가 손수 올리고자 하나 미끄러지고 엉겨 붙어 쉬이 거꾸러진다. 아무리 그것이 기이하고 교묘하여 장난하는 것 같아도 이미 그 수수하고 검소한 성질을 잃어 온통 단단한 모습이었다. 마땅히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은 보배라 하니 옛 풍습에 따라 어찌 취하고 버림을 가벼이 하리오. 생각건대, 노실(蘆實)이 순박하여 차츰 가까이했는데(색깔이 비슷), 다만 그 바탕은 깊은 자줏빛에다 엷은 검은빛이다.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데, 맑은 정신을 잃고도 마시다가 드문드문 즐거움에 깨지 못하였다. 나는 오히려 병이 난, 가장 기이한 자가 되었다. 아마 이것이 석결명이로다. 천년의 오래된 껍질로 바다 속의 용궁에서 호흡하고 정화하며 밝은 진주를 삼키고 토했으리라.

그 밖의 바다 속에 사는 동물은 전자(篆字)체 형상인데 그 안에는 진귀한 무늬로 가득차고 오색의 아름다운 옷의 무늬와 같았다. 보통의 패류에는 채색된 무늬가 있었다. 모두 부끄러워 양보하다 물러나는데 감히 서로 앞서기를 다투지 않았다. 이제 그 만들어진 모습을 살펴보면, 그 등 뒤는 돌로 갈아도 없어지지 않겠고 그 묻은 때를 돌보지 아니했구나. 그 구멍이 요새같이 물이 새도록 꾸며졌고 타고난 본디 색깔은 가히 온전하며, 자연스런 아름다운 광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이 가공할 필요도 없이 솜씨 있게 아로새겨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슬그머니 잔으로 삼으니 최고의 상품이라, 대체로 보아 잔으로 삼았다. 그 몸통은 둥근 편이며 배는 넓고 그 바닥은 가지런하며 가운데는 연하다. 이른바 앵무, 소라, 노실의 무리를 바라보니 둥근 것이 염려스럽게도 어찌 너그럽지 못할까. 너그러운 것은 염려스럽게도 가지런하지 못함이며 가지런한 것이란 염려스럽게도 연하지 못함이다. 이것은 대접 같다. 홀로 겸하여 넉넉히 있어 한손으로 잡아 장난쳤다. 초목이 무성하고 꽃잎은 흩어져 어지럽다. 아름다운 자태로써 구름과 안개가 짜임새 있듯 하구나. 갈고 다듬지도 않아도 빛나고, 새기고 꾸미지 않아도 빛깔 무늬가 있다. 사치와 검소함에 딱 알맞고, 화려함과 순박함 사이에 적당하다. 아~ 천지에 정예롭고 뛰어난 기운에다, 물속 궁전의 모든 보배를 풀어놓고 만들었구나. 험한 곳엔 교룡이 있어 숨어 있다하여 누각의 아름다운 경치를 생각하며 보았다. 조그마한 무늬로 된 빛깔의 광택의 질이 한 가지 종류가 아니다. 그리고 정기를 모아 아름답게 자라나 이런 어패류가 오직 사치품이 되었으니 그 뜻은 무엇일까? 이와 같이 빛이 번뜩이는 문장에다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고아하게 만들어진 모습에 손으로 만져보니 서로를 비추며 광채가 난다. 입안에 넣으면 늘어진 좋은 맛이 참으로 오래간다. 시문과 서화를 일삼고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 맛에 취하여 시가를 읊지도 못한다. 호걸 친구와 술꾼들은 개의치 않고 취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천한 어부를 시켜 장작불을 충분히 준비토록 했다. 나그네를 욕되게 맞이하는 바, 물 길어 올리는 일을 시켰다. 아, 그 때였다. 비록 빛과 채색을 감추고자 해도, 모려 가자비가 호산(蠔山)에서 스스로 떠나 넓은 변방의 물가에 왔구나. 까마귀가 어찌 있으랴. 내가 사랑하는 것이었다. 바른 사랑은 아니지만 술을 따라 먹기에 알맞고, 그릇을 사용하기에 편하다. 애석하게도 그 바깥은 온통 갑옷같이 단단한 모습이었다. 속에는 채색된 문장이 무성히 있는데도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없다. 대략 기록하다가 단지 특별히 느끼는 바가 있어 말한다.

[ 世之論南海盃品之奇者 首稱鸚鵡 其次小螺 又其次蘆實 獨石決明不與焉 余各得一具試嘗 審其制度 等其品數矣 鸚鵡之左右兩珥 小螺之前後二柄 專斲天質 偏用人工 措諸臺則臲卼而不安 上諸手則凝滑而易跌 雖其奇巧可玩 而已失其朴素渾堅之態 當爲好事者所寶 而尙古者必有取舍焉 惟蘆實稍近於純樸 而但其質深紫而淺黑 盛之以酒 失其淸澈 飮之未覺疎快 余猶病之 最奇者 其石決明乎 千年老甲 潛在龍宮 呼吸精華 呑吐明珠 海蟲棲其外而刻篆籀之狀 寶彩蟠其內而繡雲錦之章 凡介族之有文者 皆縮恧退讓而不敢與之爭先也 今其制度 不過磨其背以去其垢 塞其孔以補其漏 而天生之本色猶全 自然之文彩不虧 不待人工之巧斲華餙 而居然爲盃之上品矣 大抵盃之制 其體欲圓 其腹欲寬 其底欲平 其心欲淺 向所謂鸚鵡小螺蘆實之屬 圓者患其不寬 寬者患其不平 平者患其不淺 而是盃也獨兼而有之 把而玩之 則葳蕤乎花葉之紛披也 斐亹乎雲霞之結構也 不磨琢而光 不雕餙而文 奢與儉得中 華與朴合度 噫 天地精英之氣 散作水宮之諸寶 隱而爲蛟龍之所戲 見而爲樓閣之奇觀 萋斐之文 光澤之質 不一其種 而鍾精毓美 獨侈於是虫者 其意何也 文章若是璀璨 制度若是奇古 到手則光彩相暎 入脣則滋味甚長 而騷人墨客 廢而不詠 酒徒豪朋 舍而不取 甚者海人賤之 以充貯火之具 逆旅辱之 以供挹水之役 於斯時也 雖欲韜光晦彩 與牡蠣蠔山自放於大荒之濱 烏可得耶 余之愛之者 非直愛其斟酌之宜而器用之便也 惜其外有渾堅之姿 內有文章之盛 而不見知於世也 記之蓋亦有所感云 ]

[주] 남구명(南九明) : 1661년(현종 2)∼1719년(숙종 4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기서(箕瑞), 호는 우암(寓菴). 경상북도 영해 출신. 아버지는 종사랑 상주(尙周)이다. 168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10여년간 은거하다가 형 노명(老明)의 강력한 권유로 전적을 지내고, 1711년에 제주판관으로 부임, 흉년에 도민구제에 공을 세웠다. 뒤에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지내고, 다시 귀향하여 풍류를 즐기며 말년을 보냈다. 순천에 동비(銅碑)가 세워지고 제주의 죽림사(竹林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우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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