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수필문학회 김 연 분

 하늘은 속이 터져버린 대소쿠리처럼 눈을 쏟아내고 있다. 카메라 렌즈로는 담을 수 없는 어린 날의 동심이 스멀스멀 앓는 소리를 한다. 운동회 날, 오전 행사가 마무리 되면 대소쿠리로 만든 공을 터뜨려 점심시간을 알렸다. 공이 터지는 순간 함성과 함께 쏟아진 색종이가 눈꽃처럼 날렸다.

내 의식이 과거와 현재로 가다 밀리기를 거듭하듯 차는 제 자리 걸음이다. 집에서 서둘러 출발했지만 불어나는 자동차의 물결 앞에 차단기가 수시로 선다. 질주의 욕망을 버리고 멈춰 서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라 한다. 직진신호를 기다린 지 30여 분을 넘겨서야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서행이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질주하길 좋아한다. 멈추거나 뒤를 돌아봄에는 너그럽지 못하고 인색하다. 그 욕망을 잠재우지 못하여 우리는 스키를 선택한다. 스키만큼 질주의 맛을 더해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질주의 삶에 우리는 너무도 익숙하다.

터널을 지나고 여러 차례의 멈춤 끝에 무주 리조트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해본다. 솔의 향내가 찾아든다. 개운하다. 거실은 스키 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스키어들이 활강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키장이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 날처럼 보인다. 오후 스키를 개장한 직후라 조금 한산하다. 마음이 바빠진다. 마음은 질주의 노예가 되어 밖으로 뛰쳐나간다.

난생 처음 스키화를 신어본다. 예상치 못한 무게에 걷는 것인지 끌고 가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스키의 무게 또한 의외다. 손으로 들기에는 버거워 어깨에 걸친다. 스키화가 삐걱거리는 소리, 옷이 비벼대며 내는 마찰음이 복도를 흔든다. 일행 중 스키를 잘 하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강습을 받기로 했다. 몸이 유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운동신경이 느린 편은 아니라 스키 배우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으려니 했다.

스키에 스키화를 밀어 넣는 것부터 쉽지 않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장착한다. 몇 차례 넘어지는 연습을 통해서 일어나는 방법을 익혔다. 나는 스키 타러 왔지, 넘어지러 온 것이 아니라며 혼자 일어서는 연습을 했다. 드디어 초급자 코스에 올라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 있는 것도 힘들다. 잠시 방심한 틈에 스키는 미끄러져 내려갔다.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 멈추는지 모르겠다.

스키 타러 왔다는 생각은 금시 달아나고 멈춤이 먼저 머릿속을 꽉 채운다. ‘정지’를 외쳐 보지만 가속이 붙어 더 빨리 앞으로 나갈 뿐이다. 질주가 아니고 넘어져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속에 묻혀 나도 넘어진다. 넘어지고 나니 다음에는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기력이 다하여 일어날 기운마저 눈 속에 묻힌다. 아예 눈 위에 누워버린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숨을 고르는 얼굴에 눈이 내려앉는다. 넘어져 누워 있으니 일어설 기력이 되살아난다.

일어서서 잠시 스키 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저마다 완급을 조절하고 있다. 브레이크도 없는 스키와 스키폴로 좌우 깜박이 삼아 방향과 속도를 제어한다. 날렵하다. 불안과 망설임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스키 타는 모습보다 넘어져 있는 것이 훨씬 더 즐겁게 보인다. 그동안 얼마나 질주의 욕망 속에 파묻혀 살아왔던가. 넘어진다는 것은 오로지 부끄러움밖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토록 마음이 편할 수가 없고, 너그러울 수가 없다. 이 여유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무수한 넘어짐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일어서서 스키폴을 잡을 수 있다.

넘어지는 연습을 오늘처럼 많이 해 보기는 처음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았던 모습과 다른 하루를 살았다. 어렸을 때는 넘어져 상처가 나는 것도 대수롭지 않았는데, 어른이 되니 괜스레 부끄럽고 감추고만 싶었다. 이젠 안다. 넘어져야 온전히 제 홀로 일어설 수 있음을.

순식간에 많은 것들을 지나쳐 버렸다. 이제는 스키어들의 힘찬 질주가 부럽지 않다. 나도 천천히 그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것이다. 눈 덮인 차가운 얼음 위에서 끊임없이 넘어지고 일어선 것은 허울뿐인 나의 육신만은 아닌 것 같다. 오롯이 혼자가 된다.      < 2010년 3,4월호 수필과비평 신인당선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