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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종에게 바치는 한시(漢詩)[연재] 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고려의종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2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이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을 하는 일이 잦았다. 1146년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대로 대관전에서 고려 18대왕에 올랐다. 그이 나이 20세였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거제도로 추방된다. 당시 고려초기에 개설된 역원 중에는 개경에서 가장 멀리 있었던 역(驛)이 오양역이라, 산남도 역길을 따라 거제 오양역으로 보내졌다.

오양마을 뒷산을 통해 올라가, 신라시대부터 이어 온 둔덕기성에서 약 2년 9개월을 보낸다. 그가 거제도에 있는 동안의 기록은 현재까지 전무하다. 그러나 황제에서 폐위된 후, 먼 변방 작은 성(城)에서의 삶은 참으로 혹독했으리라 여겨진다.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는 물론이거니와, 개경에서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재복귀의 유혹에 빠져 경주로 나갔다가 이의민 (李義旼)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이때가 1173년 10월이며 향년 47세였다.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능은 희릉(禧陵)이며,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1. 기성유배 고려의종을 추도하며(追悼岐城謫毅宗) / 고영화(高永和)
不向普賢飛(부향상림비) 어찌하여 보현원(普賢院)에 날아가지 않고서,
岐城見者稀(기성견자희) 보아 주는 이 없는 기성(거제)에 사는고?
俗世身早?(속세신조태) 속세에 일찌감치 벗어난 뒤로,
歲寒且安歸(세한차안귀) 추운겨울 오면 어디로 돌아가리.
浩浩雲濤闊(호호운도활) 구름과 바다물결 끝없이 펼쳐 있고
殘月海上窺(잔월해상규) 새벽달은 바다 위를 살피네.
春回山舊靑(춘회산구청) 돌아 온 봄, 산은 옛 같이 푸르니
不肖復爲悲(불초부위비) 다시는 슬퍼하지 않으리.


[주1] 둔덕기성(屯德岐城) : 거제지역 국가사적지정 제509호 문화재, 해발 326m 우봉산 자락에 위치, 신라시대부터 내려 온 성(城)으로 고려의종(약 3년간)과 조선태조 때 고려 왕씨들의 유배지. 기성(岐城)은 거제의 별호.

[주2] 보현원(普賢院) :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 (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2. 그대 그리워(思君) / 고영화(高永和)
見乃梁雲看漠然 견내량의 구름, 막연히 보이는데
逸韻忙情散遠汀 빼어난 소리와 애타는 정이 멀리 물가에 흩어지네.
送君鷄林不敢忘 계림으로 보낸 그대, 차마 잊을 수가 없어
不眠深夜月孤懸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외로운 달만 걸렸구나.


고려 의종이 거제 도착 한 달 전까지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가 오양역에서 13년간 거제 귀양살이를 했다. 그도 산남대로(통영별로)를 이용해 견내량을 건너 오양포에 도착, 오양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당시 서해안 뱃길은 너무 위험하고 또한 수백명의 문무백관과 가솔들, 각종 화물을 싣고 오기가 힘들었으며, 왜구가 남해 서해안에 득실하던 때라 안전한 육로를 이용했다.

3. 작약(芍藥) 시(詩)에 대한 응제(應製) / 황보탁(皇甫倬)

의종은 정치보다 놀이를 좋아했다. 의종(毅宗)이 상림원(上林苑)에 놀이를 나가서 작약꽃을 구경하다가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모신 신하들 가운데서 이를 갱운(?韻)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황보탁이 한 편의 시를 지어서 올렸는데, 왕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나중에 그는 궁궐 벼슬에 임명되었다. 그 시가 아래와 같다.

誰道花無主 누가 꽃을 보고 주인이 없다던고 龍顔日賜親 임금님이 매일 친히 와 보신다네 也應迎早夏 첫여름을 응당 맞이해야 할 텐데 獨自殿餘春 혼자서 남은 봄을 지키고 있구나 午睡風吹覺 졸던 낮잠이 바람결에 깨이고 晨粧雨洗新 새벽 단장이 빗물에 지워졌네 宮娥莫相妬 궁중의 여인이여 질투를 말게나 雖似竟非眞 아무리 닮아도 진짜는 아니라네

작약이 꽃나라의 재상이라고 하나 여성적이다. 오나라 절세미인 '서시(西施)'가 술에 취한 모습과 같다하여 '취서시(醉西施)'라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작약 꽃이 피어나면 시들어질 때가 근심스럽다. 화려하고 풍요롭고 붉은 꽃이 사람의 세상을 바라본다. 같은 땅에 깃들어 사는 생명이거늘, 사람이 짓는 잿빛과 작약 꽃이 지은 빨강 빛의 대조는 심히 극단적이다. 오래오래 작약과 생명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나원(羅願)이 지은 <이아익(爾雅翼)>에는 "음식의 독을 푸는데 이보다 나은 것이 없어서 '약(藥)'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작약은 중국에서 부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함박꽃'이며, 본래 깊은 산중에 자생하는 꽃이다.

작약은 고려 충렬왕 때 왕비가 된 원나라 제국공주로 인해 단번에 정사에 남게 된다. 당시 수녕궁 향각에 작약이 성대하게 피어있었다. 공주가 꺾어 온 작약을 만지다가 흐느껴 울었다. 그러더니 이로부터 얼마못가 죽었다. <고려사>에 공주의 비애를 나타낸 까닭에 후세에까지 그 명성이 전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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