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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번영회 송덕비(頌德碑)건립 추진[기고]옥태명 둔덕번영회 감사

   
 
지난 2월 14일 둔덕번영회에서는 임원, 이사회를 거쳐 둔덕번영회 송덕비(頌德碑)를 건립하고자 둔덕의 발전의 초석을 다짐하고 둔덕번영의 최 일선에서 우리 지역의 문화 창달과 '내 고향 둔덕사랑 운동'의 기치를 내 걸며 오늘도 내일의 미래를 향하여 발전되는 모습을 그리며, 다시 태어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둔덕의 후손들에게 자연생태의 보전과 문화유산들이 기록으로 남아 타의 모범이 되는 공적과 그 분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뜻에서 힘을 모아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송덕비를 세우기 위해 2012년도 2차례 임원 이사회와 총회에서 승인한 예산을 투입하여 참석한 임원들의 뜻에 따라 2천만원의 예산으로 이를 동시에 건립의 뜻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 둔덕번영회 총회에서 송덕비(頌德碑)건립 추진에 따라 집행부는 그 유지를 받들어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건립 장소를 물색 협의 중에 있으며 최선을 다하여 소기의 성과를 기대한다. 이는 우리의 자산이며 길이 후손에 남겨 그 뜻을 기리고 널리 전파하여 이런 분들이 많이 배출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이번에 세우게 되는 송덕비(頌德碑) 박현석, 신옥권 송덕비를 세우게 된다. 그의 공적은 아래와 같으며 이를 둔덕번영회의 웅지를 펴고 단장된 송덕비를 마련하여 후손들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 할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둔덕번영회 송덕비(頌德碑)건립 추진계획서’

   
 ▲ 청마시비동산 팔각정에 세워져 있는 모습

둔덕번영회 송덕비(頌德碑) 추진 건립 계획
o 대상 : ⓵ 박 현 석(朴 絢 碩) ⓶ 신 옥 권( 辛 玉 權)
o 위치 : ⓵둔덕중학교 교정 일부 < 중학교 측 협의 >
             ⓶물색 중
o 예산소요액 : 20,000천원
o 송덕비문(안) : 내용 별첨 참조
"둔덕번영회 임원 이사회를 2012년 10월 14일 회의를 개최하여 이사회의 결의로 송덕비를 세우는데 소요되는 예산을 승인하였고, 2014년 둔덕번영회 총회 시 『송덕비 건립』에 대한 승인을 득하여 2014년 둔덕번영회에서 추진하여 조기에 완공하도록 하였다"
< 송덕비(頌德碑)의 뜻은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말하며, 영어로는 a monument in honor of 라고 하며,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여 돈을 모아 송덕비를 세우고 팔마비 라고 불렀다. 지방 수령의 선정(善政)과 공덕(功德)을 기리는 송덕비의 효시(嚆矢)다. 송덕비는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의 不忘碑라고도 불렀다 >

송덕비(頌德碑)의 대상 :
⓵ 박 현 석 (朴 絢 碩 ⓶ 신 옥 권(辛 玉 權) ⇒ 2기
⓵ 박현석에 대한 공적내용
o 박현석(1861~1937)공은 1861년 하둔리에서 출생하여 사과(司果,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정6품 군직(軍職) 정원21명으로서 부사직(副詞職)의 다음 벼슬이다. 원록체아직(元祿遞兒織)으로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손(嫡長子孫)을 후대하고, 대기문관(待機文官)에게 봉록만을 급여하기 위하여 임명하는 직무 없는 관직이다. 현직에 있지 않은 문무관(文武官) 음관(蔭官)중에서 임명하였다. 벼슬에 올랐고 지역내 주민들에게 자선 및 교육 사업을 펼쳤다. 그의 자(字)는 천(千)이고, 호(號)는 야농(野農)이고 뒤에 진사급제(進士及第)하여 통정대부(정3품)가 되먼서 시문(詩文)과 예도(禮度)에 밝고 효와 우애와 빈민을 위한 구제 사업에 만전(萬全)을 다하고 오히려 모자람을 두려워하며 학교를 설립하고 후세에 주민들의 안위(安慰)를 위하여 다리 4개를 가설하고 분수를 지키며 선인들이 전하는 훈육을 자식과 집안 조카들에게 전하기에 전념하였다.
1923년 6월 15일 박현석(朴絢碩)은 자비 4,200원을 들여 하둔리 407번지(자기 소유지)에다 조선식 목조기와로 지은 면사무소 건물 1동 (건평 33평)을 건축하였으며, 12월 5일 원명(元明)강습회를 설립하였고, 회장에 서남전 면장이 맡았다. 그 당시 학생수는 남 100명 여 20명으로 둔덕 제일의 강습소였다. 이 강습소에서 배출된 인원은 총 160명이라고 한다. 강습소는 술역과 호곡마을 주민들이 협동하여 만등어졌는데, 교실이 협소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박현석씨가 자비 4,200원과 자기 땅을 기증함으로 조선식 목조 기와 건물 1동을 건축하여 하둔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2학급에 3학년 과정을 실시하였는데, 나중에 보통학교로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면제도 개편에 따라 둔덕면협의회는 1920년 11월 30일 첫 의원들을 배출하게 되었는데 박현석씨는 4대에 걸쳐 의원직을 맡았다. 그 당시 의원들은 김영흠(金永欽 상둔 1923년까지) 김달언(金達彦 시목) 潘德三 거림) 신석운(辛錫雲 산방) 김상동(金常敦 방하) 유병홍(柳柄洪 방하) 김태작(金太謶 어구) 박현석(朴絢碩 상둔) 정용기(鄭用基 술역) 장동주(張東柱 학산) 등 10명이었다. 제2대 의원은 金宗俊 술역) 박정옥(朴正玉 거림) 김영흠, 김달언, 반덕삼, 신석운, 김상돈, 김태작, 박현석, 정용기이다. 1920년 11월 30일 둔덕면협의회 제3대 의원들은 김덕중(金德中 상둔) 박영규(朴英奎 상둔) 박계원(朴桂元 시목) 손채익(孫彩益 거림) 김영준(金英俊 산방) 김상돈(金常敦 방하) 유갑도(兪甲道 하둔) 박현석(朴絢碩 하둔) 문재선(文再先 술역) 정두석(鄭斗石 술역)이다. 1929년 11월 30일 제4대 둔덕면협의회 의원들은 박정옥(朴正玉 거림) 최재한(崔在翰 방하) 김홍우(金弘佑 하둔) 김재수(金在守 술역) 이영근(李英根 학산) 김덕중, 박계원, 김영준, 박현석, 정용기이다. 1929년 9월 16일 장우형 면장은 면사무소를 방하리에서 하둔리 407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이전의 면사무소는 직원들이 사무 집행할 수 있는 공간이나 숙직실 등이 좁았는데, 박현석의 대지 527평 기부로 건물 1동(건평 33평)을 건축할 수 있었다. 이 건물은 해방 이후까지 사용하다가 둔덕중학교 교사로 이용하였다. 현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하눈마을 주민들의 뜻을 모아 이 곳에 송덕비를 세웠다. 이 비는 반병원 집밑 길모퉁이에 새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청마시비동산 옆 팔각정 주위에 있다.

신옥권(辛玉權)에 대한 공적내용
▲출신지 : 1904년 11월 4일(음) 둔덕면 산방리 419번지에서 신주식(辛珠湜)의 5남 3녀의 장남으로 출생, 1967년 2월 19일 64세에 지병으로 별세함.
▲년보(年譜)
1904, 11.4 출생
1914 ~ 산방리 서당서 한학(漢學) 수학
1919. 3. 25 거제공립보통학교(현 거제초등학교) 졸업
1922. 3. 25 경상남도 수산전습소(水産傳習所) 졸업 *졸업장 有
1922. 8 통영군 교사 강습회 수료(과목 : 국어, 산술, 체조 교수법)
*수료증 有
1924. 6 京城實踐簿記專修學院 졸업
1924. 8 ~ 1931 둔덕면 서기
1929 경남 지방개량중견청년강습회 수료
1930 둔덕면 國勢조사위원 역임
1931. 5 방하 옛 면사무소에 영명(永明)강습소 설치 주도
1933 하둔 소재 元明강습소 강사
1934 둔덕공립보통학교 강사, 둔덕면 의용경찰단장
1938 함경남도 신포남단수산주식회사 사원
1945. 10 ~ 둔덕면 부면장(당시 면장 9대 김홍관)
1948 대한청년단 둔덕면 단장, 농민회 둔덕면 회장 역임
1952. 5. 22~1954. 7. 18 둔덕면장
1954 ~ 1956 자유당 둔덕면당 위원장
1956 ~ 1959 둔덕초등학교 사친회 회장 역임
1959 ~ 1965 둔덕고등공민학교(통영중 둔덕분교, 거제중 둔덕분교:둔덕 중학교 전신) 교장 (※교명은 확실치 않음)
1963. 9. 17 새마을 유공자 표창(경상남도 지사)
1965. 3. 1 ~ 1967. 2. 10 둔덕중학교 초대 교장 역임
1965. 3 ~ 1967. 2 거제군행정자문위원 역임
1967. 2. 19 별세

▲생애요약
-20대 초반부터 청년운동을 통해 지역 청년들의 항일의식고취
-강습소 교사로서 청소년 지덕체 교육에 매진
-둔덕면 서기(일제시대), 부면장, 면장(해방후부터 휴전 다음해까지)직의 성실한 수행과 많은 업적-면내 지방도 확장 개설, 私財 기부 통한 도로 직선화, 차질없는 피난민 구호, 관내 상이용사 후원 등
-6.25 전장터에 장남 입대시킨 모범적 면 지도자
-4년간의 둔덕초등학교 사친회 회장으로 학교발전에 기여
-8년간 둔덕중학교 교장 재직하면서 중학교육의 초석을 다짐
⇒향토발전과 청소년 교육 위해 전생애를 바친 청년운동가, 지방행정가, 교육자

▲청년농촌운동가
-1921년에 결성된 둔덕청년회 임원으로서 야학을 통한 청년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기근구제운동을 벌였다. 학동들을 지도계몽하기 위해 이미18세 이던 1922년에 통영군의 교사강습회를 수료하였다.
-1925년 12월 청년운동단체인 둔덕우리회를 결성하여 지역내 청년들의 정신함양과 체력단련 사업을 전개하였다. 창립 당시 총무를 맡아 거제축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지덕체 三育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33세인 1937년에는 둔덕우리회의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해방후 대한청년단 둔덕면 단장과 농민회 둔덕면 회장을 역임하면서 해방후 혼란기의 농촌의 안정과 사상적 단결에 앞장서면서 몸소 실천하였다.

▲교육자
-27세인 1931년에는 면서기직을 사임하고 청년들의 계몽을 위해 방하리에 있던 구 면사무소 자리에 영명강습소를 개설하고 강사로 참여해 청소년 교육에 힘썼으며 1933년에는 둔덕면 하둔의 원명강습소(1923년 설립)에서 강습회 강사로도 활동을 겸하였다.
-면장직을 퇴임한 이후에는 둔덕초등학교 사친회 회장으로서, 그리고 둔덕중학교의 교장으로서 작고하기까지 8년간 학교의 발전과 초석을 다지고 지역인재 양성에 전념하였다. (참고-자료에는 둔덕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2년간(1965. 3 ~ 1967. 3)재직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학교법인 인가 이후의 사항이며 실제는 1959년부터 그 전신인 둔덕고등공민학교(이후 거제중 둔덕분교, 통영중 거제분교 명의로 운영됨) 교장으로 취임하여 작고하기까지 교장으로 총 8년간 근무하였음. 교장을 하면서 한문, 도덕과목을 담당함)

▲지방행정가
-1945년 10월 김홍간 9대 면장 시절 부면장으로 근무하면서 민간자치기구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둔덕면 지부 결성에 참여.
-1949년 산방산에 빨치산들이 은거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만행이 잇따르자 마산 주둔군으로 하여금 퇴치케 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 잔당들의 살해위협에 직면하여 상당기간 피신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중인 1952년에 제10대 둔덕면장으로 취임해 2년 2개월간(재임기간 1952. 5. 22~1954. 7. 18) 전쟁 중 및 전쟁후의 후속처리 및 지역 발전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참고-자료에는 1952년 5월 22일 취임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 이전부터 면장직을 수행하였다고 함. 1952년 5월 21일 읍면장 선거가 있었으나 둔덕면을 비롯한 대부분의 면은 기존의 면장이 군수로부터 재임명을 받았다고 함 - 『거제시지』814쪽)
-면장 재직중 여러 증언을 종합한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1)상 둔덕의 도로개설 즉 하둔에서 상둔, 하둔에서 산방(사곡)에 이르는 양대 도로의 도로 폭을 확장하고 굽은 길을 직선화함으로써 地方道 로서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특히 도로로 편입된 일부 농지는 사유지를 처분해 보상하였다.
2)951년 초 거제도에 수십 만명의 피난민이 몰리자 각 면으로 분산했는데 둔덕면으로 배정된 피난민의 구호와 지원에 힘썼다.
마을마다 배정된 수용시설을 설치하거나 부락민들을 설득해 피난민을 분산 수용하였다. 특히 산방의 본가에는 방 여섯 칸 중 두칸을 제외한 4개의 방을 피난민 4가구에 1956년까지 재공 하였으며, 산방 하천변에 천막수용소를 여러개 설치해 20여가구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3)전쟁터에 가장 먼저 내 자식을 보낸 면장
전투가 한창이던 시절 내 자식부터 군에 보내야 다른 면민들이 따를 것이라며 당시 고교(현 통영고)졸업을 6개월 앞둔 장남(辛容正)을 전쟁터에 내보냈다. 참고로 장남은 당시 통신병으로 소대원 40여명 중 30명여명이 전사한 평양전투에 참전한바 있다. (※당시 통영검찰지소(?)에 처조카가 검사로 이어 주변에서 졸업 때까지 만이라도 입대를 미루기를 간청했으나 거절하였다고 함) 전쟁 상이용사의 援護敎導에도 힘써 대한상이용사회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다. (감사장 받은 날 1954. 6.24) <끝>

추기=이밖에도 1953년경 신익희 당시 국회의장 내방시 둔덕에 중학교를 세워달라고 건의했던 일, 하둔에서 학산까지의 도로 확장 등 몇가지 사항에 대한 증언이 이었으나 확인할 수 없는 일이어서 제외하였음,
자료도 빈약하고 증언자도 제한적이어서 둔덕면사무소나 둔덕중학교에 보관 중인 자료, 둔덕에 생존해 계시는 당시 관련자(대부분 70대 후반에서 80대)의 증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1. 둔덕면지
2. 거제시지
3. 둔덕교 60년사
4. 집안 보관 각종 상장, 증서류
5. 기타 가족 및 지인, 둔덕중 졸업생의 증언
2011. 2. 13
이상 기록자 차남 신종오(010-8797-4891)

제10대 신옥권 (재임기간 1952. 5. 22 ~ 1954. 7. 18)면장은 일제식민지 때부터 청년운동가 면서기, 우익단체 활동 등을 하였다. 그는 둔덕면의 산증인처럼 둔덕면을 위해서 최초의 지방선거와 총선 등을 아무 문제없이 준비하여 마무리 했고, 지역 내의 각종 사업 등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신옥권 면장은 청년운동 가이자 정치인으로 지역민과 함께 했다고 한다. 둔덕의 면 의원 선거는 모든 면민들이 참여하여 민주주의 시련을 위해 첫 투표를 시작 했다. 면민들은 지역의 일꾼을 뽑기 위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조금은 들뜬 표정으로 투표장소로 나갔다고 한다. 당시 구역과 투표소를 살펴보면, 제1구 : 시목리 상서 마을집회 제2구 : 둔덕공립초등학교( 현 둔덕초등학교 터) 제3구 : 둔덕면사무소 제4구 : 술역마을 집회소로 지금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초대 면의원과 면장들을 살펴보면, 둔덕지역의 여러 인물들이 당선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초대 면의원 들은 대부분 일제 때 면서기나 면장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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