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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행정구역 변천, 면리제(面里制)와 호구(戶口)[연재]고영화의 거제산책

   
 
☞ 차례 : 1). 거제역사 개론 2). 거제지역 행정구역 변천 3). 거제부(巨濟部) 면리제(面里制)의 변천(變遷) 4). 거제(巨濟)의 호구(戶口) 및 방리수(坊里數) 5). 거제부(巨濟府) 방리(坊里) 및 호구총수(戶口總數)

1). 거제역사 개론
거제의 유구한 역사는 한마디로 "주변부(변방), 해양성(섬과 바다)"인 '주변적 인식'이나 '변방적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거제의 문제인식은 "섬과 바다"라는 공간 인식을 근간으로 하는 것과, 고대로부터 계속되어진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수난사적 인식이다.

[ 또 "일반사를 지방에서 증명하기 위한 역사"나 "중앙을 의식한 역사"가 아니라 "땅에 새겨진 역사", "땅속에 묻힌 역사", "땅과 함께 전해져 온 역사"를 "지방의 향기와 함께 전하는 것"이며, "인간성을 우선" 하는 것이 지방사라고 하가·노보루는 말하고 있다. ]

또한 지역역사 연구에서는 그 지역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면 변별성을 잃게 되고 동어반복적인 논의로 말미암아 탄력성을 잃게 될 수 있다.

국가와 민족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이미 짜여진 틀 속의 역사가 아니라 구체적 일상을 살았던 지역서민의 이야기가 우선되어야 한다. 거제의 무속신앙도 마찬가지다.  아득한 옛날, 인간의 삶이 처음 시작된 이후로 무속신앙은 늘 이 땅의 선조와 함께 해 왔다.

종교라기보다도 우리 조상의 고난에 지친 삶을 위로해온 소중한 자산인데도, 오늘날 우리는 미신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추상적인 조상은 배우지만, 이 땅에 살아온 나의 조상 ,지역의 선조에 대해서는 배움이 없었다. 아니 우리지역 선조의 역사를 부정하기도 한다. 이건 자기분열 행위이자 자기부정행위라 할 수 있다. 간혹 국사 교과서에 지방이야기가 등장해도 그것은 이 땅의 삶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이는 거제 역사를 쓸 때 우짜던지 중앙의 역사를 가져다가 꿰맞추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포상팔국'에 거제도가 포함된다던지, '가야국'에 종속된 지역이었다거나, 아주 오래전 고대 '거제원주민은 북방계열'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고려중기, 고대로부터 한·일 해상교류의 거점 교통로인, 거제도 남동부해안 명진현·송변현·아주현에 거주하던 거제해상민족을 해적으로 간주하여 투항하게 만들고는, 해적이라고 단정하여 약 820명을 합천 진주 등지로 분산 거주케 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중앙 중심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인 사실(史實)들이 정리되어 나갈 때만이 거제의 주체적인 정체성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변방이었던 거제 섬의 역사는 육지와 너무나 다른 일반 서민의 삶이 있었다. 거제문화는 지리적 해상교통의 경유지로써 다양한 문화가 지나가는 통로였다. 육지와 바다의 다양성을 가진 문화가 생명력을 갖는다. 중앙의 양반들에게 거제는, 언제나 독기 가득해 버려진 황폐한 땅, 그리고 교화가 덜된 야만인들만 득실거리는 땅이었다. 이런 표현들은 중앙의 지식인들에게 비춰진 편견일 뿐이다. 이런 시각에 놀랄 일도 아니다. 단지 유교적인 관점에서 다소 과장된 표현이리라. 역사상 최다 유배자수를 가졌던 거제도는 이들이 거제를 떠난 후, 거제의 아름다운 경관과 뒤늦게 깨달은 거제인의 따뜻하고, 깊은 심성을 잊지 못해 대부분 찬사의 글을 남기게 됨은 이러한 까닭이다. 

그리고 공식기록인 정사(正史)도 지배층의 편향된 인식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그것이 그대로 진실일 수는 없다. 반면 민중 사이에 전해져 온 이야기는, 그것이 때론 황당하다 하더라도 마구 무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민중의 이야기가 더욱 진실에 근접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아분열과 자아상실의 현대사회에서 자기 정체성의 확립에는 역사문화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 것처럼 국가에도 국가정신(national geist), 혹은 민족혼(volkseele)이 있다. 지역의 정체성(local identity)도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선사의 신화시대부터 현재까지를 고찰하게 된다. 설화 고전문학 민속 등에는 지역의 혼이 잠재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민요 설화는 개인소작이 아니라 민중의 소산이다. 민중의 무의식적 표현이기 때문에 가장 자연 친근적인 문학이다. 민속문학은 가장 정신적 지주 문학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거제의 정체성(Geoje's identity) 확립에는 이러한 점을 눈여겨 고찰해야하며,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거제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 즉, '감탄' '감동' '감흥'의 삼감(三感)의 3박자를 동시에 갖추고, 여기에다 거제 고유의 문화를 덧붙여야만 관광거제으로써 또는 문화거제로써,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거제역사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지역역사의 본연의 모습을 거제 지역 공동체를 바탕으로 밝혀낼 수 있어야겠다. 따라서 거제역사의 탄력성과 다양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거제적인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가장 거제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예기(禮記) 제통(祭統)편에서 "선조에게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후손이 알지 못하면 밝지 못한 것이다.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다면 어질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 땅의 선조가 남긴 자취는 오늘을 사는 후손된 사람이면 마땅히 알아야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리라.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실만은 아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오늘날의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삶을 개척하면서 전망하고 있는 미래의 것이기도 하다.

2). 거제지역 행정구역 변천
청동기시대 거제도에는 큰 3부족(고인돌 분포도)이 있었는데 가칭, '둔사족(둔덕 사등면)', '연하족(연초 하청면)', '일운족(일운 아주)'이다.[이 외 작은 부족은 거제면 명진리와 남부면 다대포일대]. 3부족이 하나로 통일된 시기가 서기 2세기쯤(독로, 두로국)이며, 그 소재지는 육지와 가장 인접한 지금의 '사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상군(裳郡)설치 時 치소였던 둔덕면 거림리도 배제할 수 없다. 이로부터 거제도의 이름이 "사도도(沙都島)"라 불리었다. 그러나 거제도는 해상무역의 중간 기착지의 역할을 수행하다보니 거제도의 각 지역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소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거제현(사등 둔덕)은 육지에 가까운 관계로 고성지역과 문화의 교류가 활발했으나, 남부지역인 송변현과 아주현은 해상무역의 기착지로써 해상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가야시대에는 경남지역으로부터 가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으나 가야정부의 통제권에 있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고구려 신라 백제처럼 가야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도시국가 연합체인 관계로 남부 해안도서 지방은 각기 독립된 행정을 유지했으며, 거제 토호세력이 어업과 무역을 기반으로 지역 행정경제를 꾸려나갔다.

   
 
<거제도 4현(縣) 3부곡(部曲) 2향(鄕) 1장(莊)의 행정구역 : 거제현(巨濟縣)‧아주현(鵝洲縣)‧송변현(松邊縣)‧명진현(溟珍縣), 하청부곡(河淸部曲)‧고정부곡(古丁部曲)‧죽토부곡(竹吐部曲), 말근향(末斤鄕)‧덕해향(德海鄕), 연정장(鍊汀莊).>

1400여년 전에는 일본, 백제, 가야지역의 해상교통의 중간 경유지로써 특히 아주, 지세포, 구조라, 다대포, 율포 등을 거쳐 남해 섬진강 서해안으로 선박들이 이동했다(고인돌 거제도 남쪽 분포지역과 일치). 그 당시에는 거제도를 "사도도(沙都嶋)"라 일컬었으며, 그 뜻은 "바닷가 모래가 많은 고을 섬"이라는 뜻으로 제법 많은 주민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거제도는 동아시아의 활발한 해상무역의 중심에 있었으며, 뚜렷한 국가의식이나 영토 경계가 없었던 시기라, 언어 또한 거제도과 일본 대마도 큐우슈우(九州) 북부지방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가야국을 점령한 이후부터는 거제는 신라정부의 통제권에 놓이게 된다. 이때까지도 "거로현(居老縣), "송변현(松邊縣)", "매진이현(買珍伊縣)", "거제현(巨濟縣)"이 각각 독립된 고을이었으나,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둔덕면 거림리에 상군(裳郡)을 설치하면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된다. 이에 거제 섬을 ‘상도(裳島)’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후 조선시대까지 ‘거제도의 별칭’으로 ‘상도(裳島)’라는 명칭을 이어왔다.

685년(신문왕 5)에는 상주군(裳州郡)으로 개칭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개명한 3현, 아주현(鵝州縣,거로) 명진현(溟珍縣,매진이) 남수현(南垂縣송변현)을 거제현의 속현으로 삼으면서, 거제군(巨濟郡)으로 개칭되었고, 부곡과 향을 동시에 설치하니 이로부터 중앙정부에서 섬 전체를 "거제도'라 부르게 되었다. 이로써 거제도에는 4현(縣) 3부곡(部曲) 2향(鄕) 1장(莊)의 행정구역을 갖추게 된다. [ 거제현(巨濟縣) 아주현(鵝洲縣) 송변현(松邊縣) 명진현(溟珍縣), 하청부곡(河淸部曲) 고정부곡(古丁部曲) 죽토부곡(竹吐部曲), 말근향(末斤鄕) 덕해향(德海鄕), 연정장(鍊汀莊) ]

소성왕(昭聖王) 원년(799)에는 청주(菁州: 現 진주)의 거로현(居老縣), 즉 아주현(鵝州縣)을 국학생(國學生)의 녹읍(祿邑;食邑)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아주현지역의 농업 생산력 기반이 상당하였으며, 그 결과 신라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배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려초기에는 육지에서 가장 가깝고 인구가 가장 많아 안전한 거제현에 오양역원을 설치하였고, 983년(성종 2년) 거제현이 기성현(岐城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년) 거제현으로 다시 복명되었지만, 거제고성통영 지역을 묶어서 <자고현(自固縣)>을 거제현의 임내에 두면서 행정규모가 확대되기도 했다[최초 광역통합행정구역].

고려시대 거제지역의 군현체계도 재편에 대하여 살펴보면, 12목(牧)이 설치된 성종 2년(983년)에는 기성현(岐城縣)으로 개칭하여 성을 쌓고 12목 가운데 하나인 진주목(晋州牧)에 편입되었으며, 당시 본도(本島)의 칠천도(七川島)와 가조도(加助島)는 목장(牧場)으로 상마(上馬)의 공급처가 되었다. 성종 14년 이래 개편된 12절도사(節度使)체제에서는 거제지역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여 진주(晋州)절도사의 통제 하에 속하였다. 5도 양계체계로 재편되기 시작하는 현종 9년(1018년)에는 지금의 통영과 고성지역인 자고현(自固縣)을 거제현의 임내에 두고 현령(縣令)을 파견하면서 경상도(慶尙道)의 진주목(晋州牧)에 소속시킴으로써 거제현이 주현(主縣)으로 됨과 동시에 그 행정규모가 확대되었으나, 뒤에 고성현이 분리됨으로 인해 다시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원종 12년(1271)에는 진도의 삼별초 항쟁군이 거제지역을 내습함으로 인하여 거제현과 명진현 등의 속현의 관리와 가솔들 약1000 명 정도가 인근 내륙지역인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 등지와 진주목의 임내인 영선현(永善縣)으로 분산·이주시켰다. 하지만 대다수 거제민은 섬에 남아 생활했으며, 거제현령이 거창군 가조면 거제현으로 부임하면서 거제 본섬은 행정권 밖에 놓여있게 되었다(이를 중앙정부에서 섬이 텅 비어 있다고 기술한다). 거창군 거제현은 충렬왕(忠烈王) 때 관성(管城)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구하였다. 우왕(禑王) 때에는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인 조운흘(趙云屹)이 황폐화된 거제섬의 농업·어업의 산업 생산력과 군사적 기능을 복구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비록 행정관청은 육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남해안의 수군진영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이 후에 몽고의 일본 침략과 맞물러 거제 본섬에는 고려말 1300년대 초기, 송변현에 수군진영 '가라산방어소(다대포)'가 설치되면서, 거제본섬에는 다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다. 1356년 (공민왕5년) 김보(金普)가 거제 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왔는데, 이를 관리한 관리는 수군진영 가라산방어소만호였다. 또한 태조1년 1392년 고려 왕씨들이 둔덕기성으로 유배왔을 때에도, 이들을 통제 관리한 관리는 ‘견내량 수군만호’였다. 또한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을 거제도 오아포(가배량)에다 설치한다. 태종11년 1411년, 가배량(加背梁, 통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그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 곳이 여덟이니, 고성(固城) 가배량(加背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도만호가 수어한다.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이었다. 거제(巨濟) 영등포(永登浦)에는, 병선 8척, 군인 7백 20명이 있었고, 1404년 견내량(見乃梁), 거제(巨濟) 옥포(玉浦)에는,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이다. 1418년 당시 오아포 수군절도영에는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 주둔했다. 조선태종 때 거제본섬 수군인원만 3000 여명이 넘었다. 수자리 살던 수군이 대부분이라 그 가족을 헤아리면, 조선건국 1410년경 엄청난 인원이 거제도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통일신라 이래 고려시대까지 거제지역은 진주목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관철, 정치·군사적 상황에 따라 중앙정부로의 종속적 재편을 겪었고, 군현 행정관청의 존립적 위기까지도 맞이하게 되었다. 거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앙정부의 지방제도에 따라 진주의 군현에 속하다가 조선시대는 경상우수영관할로 이어왔고 근대에는 잠시 동래부에 속하기도 했다.

조선시대부터는 거제현(巨濟縣)에 면리제가 도입되어, “거제현⇨ ①사등면 + ②둔덕면, 아주현, 고정부곡 ⇨③고현면, 송변현, 명진현 ⇨④읍내면(동부,서부), 하청부곡⇨⑤청하면(淸河面), 죽토부곡 말근향 덕해향 연정장 ⇨⑥연초면,"으로 바뀌면서 6개면(面) 120개리, 7진영 7목장의 체제를 갖추고 변방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미 1801년 이전에 고현면(古縣面)이 일운(一運)과 이운(二運)으로 분화되고, '읍내면,하청,연초,일운,이운,사등,둔덕면(河淸·延草·一運·二運·沙等·屯德面)'의 "7개면 체제"로 바뀐다. 그 후 읍내면은 그대로 둔 채, 종래의 청하면(淸河面)의 명칭이 하청면으로 바뀌고 있다. 또한 고현면의 분화는, 각기 지세포와 옥포, 조라포가 면내에 자리 잡아 예전의 진하리(鎭下里)를 중심으로 인구의 밀집이나 생산 활동의 활발함이 반영된 소산으로도 여겨진다.

갑오경장 時 둔덕면(屯德面)에 속하였던 '한산도'가 그 인근 군소 도서를 묶어서 독립된 면이 되었고, 연초면(延草面)과 하청면(河淸面)에서 외포면(外浦面)과 장목면(長木面)이 떨어져 나옴으로써 "10개면(한산도 포함)" 139리로 대폭 불어나게 되었다. 광무 4년(1900년) 통제영 터에다 진남군(鎭南郡)을 설치하면서 한산도(閑山島) 비진도 등 부속도서가 통영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거제도의 면리 편성은 조선말기의 개편이 그 골격을 이룬 셈이다.

3). 거제부(巨濟部) 면리제(面里制)의 변천(變遷) 
거제부의 면리제의 변천을 살펴보면, 그 역사의 뿌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약 1400 년前, 신라시대에 설치되었던 향, 부곡, 현(鄕,部曲,縣)을 그 바탕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초기부터 거제현(巨濟縣)에 면리제가 도입되었고, 6개면(面) 7진영 7목장의 체제를 갖추고 변방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 거제현⇨ 사등면 +둔덕면, 아주현⇨ 舊장승포읍 +일운면, 송변현⇨ 남부면+동부면, 명진현⇨ 거제면 +동부면 일부, 하청부곡⇨ 하청면+장목면, 고정부곡⇨ 舊신현읍, 죽토부곡 말근향 덕해향⇨ 연초면.  
다음은 조선후기 거제부의 행정단위 면리제 변천에 대하여 살펴보자. 
 

   
 
조선후기 면리제 변천에는 두 가지 주목 할만 점이 있다. 즉 18세기 단계까지를 보면 [<자료 1> 참고], "6개면 120개리"로 짜여져 있었는데, 그 중 읍내면(邑內面)은 동·서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접어들어서는 "7개면 체제"로 바뀐다. 곧 읍내면은 그대로 둔 채 고현면(古縣面)이 一運과 二運으로 분화 현상이 나타나고, 종래의 청하면(淸河面)의 명칭이 하청면으로 바뀌고 있다.

아울러 ① 리수가 83坊으로 급속히 줄어든다. 아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둔덕면(屯德面)과 하청면은 무려 13동이 줄고 있다. 이것은 하청면의 경우에서처럼 합동(合洞)한 예도 보이지만,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보이던 동리가 대부분 한산도 인근 해역의 지명이고 보면 이웃 고을이었던 고성현과의 행정 구역 조정을 예상해 볼 수 있다.  

②또한 고현면의 분화는 각기 지세포와 옥포, 조라포가 면내에 자리잡아 예전의 진하리(鎭下里)를 중심으로 인구의 밀집이나 생산 활동의 활발함이 반영된 소산으로도 여겨진다. 1801년 이전에 읍내면의 동·서부 외에 하청,연초,일운,이운,사등,둔덕면(河淸·延草·一運·二運·沙等·屯德面)의 7개면의 분화가 확인된다. <1832년 거제읍지>

<자료 2>에서 보면 갑오경장시의 전국 행정 구역의 개편의 결과로 보여지는 19세기말의 단계이다. 이전까지의 7개면 가운데서 둔덕면(屯德面)에 속하였던 '한산도'가 그 인근 군소 도서를 묶어서 독립된 면이 된다.

그리고 연초면(延草面)과 하청면(河淸面)에서 외포면(外浦面)과 장목면(長木面)이 떨어져 나옴으로써 "10개면(한산도 포함)"과 139리로 대폭 불어나게 된다. 일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거제의 면리 편성은 이 시기의 개편이 그 골격을 이룬 셈이다. 그런데 이 무렵의 특징을 살펴보면 상당수 신설된 동명(洞名)도 있지만, 이운·하청·장목면에서 보듯이 옛 지명을 복구하여 쓰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4). 거제(巨濟)의 호구(戶口) 및 방리수(坊里數)
다음으로 거제의 호구와 방리(坊里)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거제인구통계는 1913년까지는 한산도 용호도 등 부속도서를 포함한 것이고, 1953년 거제군 복군부터 현재까지는 現 거제시 관할지역 인구통계이다. 조선시대 거제인구는 옛 문헌 자료마다 그 차이가 크나, 전체적인 인구 변화추이는 대체로 잘 파악할 수 있다.

거제는 조선시대까지 군역의 기피, 사노비 누락, 육지에서 도망 와 숨어 살던 사람, 해상유민 등, 정확한 인구집계가 사실상 불가능 했으며, 일부 수군진영의 수군과 유민은 제외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 인구통계는 관청에 기재 등록된, 가용할 수 있는 백성의 통계였다.  

(1). 청동기시대는 약 1500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거제도 內, 패총과 고인돌의 분포, 그 크기로 추정할 수 있다. 연초 하청지역과 둔덕 사등지역이 인구밀집 지역이었다. 2세기에서 6세기 사이 거제도 '독로국'의 호수는 약 1000여家 정도, 4~5천명 이상의 인구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거제도 內, 둔덕사등의 거제현, 아주옥포지세포의 아주현, 거제면 명진현, 남부동부면 송변현 지역이 각 지역 중심지로써 그 역할을 했다.  

(2). 983년 고려성종 기성현(岐城縣) 사등 거제치소 이후로 해상교역의 부흥 속에 1018년 거제현(巨濟縣) 인구가 약10000명이 되었다. 이 당시 고려개경 정부에서 고을 현縣의 승격 근거로써 인구 10000 명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후 1272년 거창군 진주 등, 육지로 옮겨가면서 인구감소가 크게 일어났다. 이 후에 몽고의 일본 침략과 맞물러 고려말기 송변현에 수군진영 '가라산방어소'가 설치되면서, 거제도에는 다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다.

또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을 거제도 오아포(가배량)에 설치된다. 태종11년 1411년, 가배량(加背梁, 통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그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 곳이 여덟이니, 고성(固城) 가배량(加背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도만호가 수어한다.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이었다. 거제(巨濟) 영등포(永登浦)에는, 병선 8척, 군인 7백 20명이 있었고, 1404년 견내량(見乃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이다. 1418년 당시 오아포 수군절도영에는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 주둔했다. 조선태종 때 거제 수군인원만 3000 여명이 넘었다. 수자리 살던 수군이 대부분이라 그 가족을 헤아리면, 조선건국 후 1410년경 엄청난 인원이 거제도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의 거제도 설치와 수군진영 구축, 거제현 이설로 1500년경, 약 10000명 이상의 인구수를 갖게 되었고, 임진왜란 때까지 꾸준한 인구 증가가 일어났다. 그러나 임진왜란 동안 급격한 인구감소를 겪은 후에, 이후 약 100년 동안 육지로부터 10000명 이상의 이민자와 수군장정이 들어오면서 1680년 이후에 거제인구수가 20000명을 넘게 되었다.
 
(3). 1664년 거제읍치 거제면 이전 時, 13,558명(관청 집계 수).
(4). 1707년 거제유림 신수오 선생 장계 자료, 거제인구 25000명 민호 5900호(승정원일기).
(5). 1750년대 초기(해동지도) 거제인구 총23304명(남:10728명, 여:12576명). 6개면 8진영.
(6). 1790년대 말(지승지도, 여지도) 총 24734명(남:11540, 여:13194). 
(7). 1800년대초(여지도) 총25220명.
(8). 1832년 거제읍지, 총30,023명 (남: 14,822 여: 15,201).
(9). 1880년 31,281명. /  1941년 97,727명. / 1956년 105,048명. / 1990년 144,233명. / 2000년 176,028명. / 2010년 1월 225,903명.  
 
규장각기록에는, 조선초기 세종 때 거창에서 복귀한 거제인은 군정(軍丁) 103명, 주민 153세대 인구 423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거제 전체 인구통계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1270년부터 본섬에 남아있던 거제민과 더불어 고려말기부터 육지에서 이주한 유민 수천 명이 거제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거창군에서 환도하기 전에 설치된, 거제도 수군진영인원(약 3000명)도 제외한 것이었다. 또한 이후 거제7진영이 설치되고 뭍으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이 증가하여 숙종(1674년~1720년)때 주민 6641세대 인구 32,108명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서에는 18세기 중엽까지 5천 수백여 호의 원호(元戶)에 2만 4천여명이라 전한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엽에는 원호 6,981호, 인구수 30,023명으로 불어나서 자료마다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며, 이후로는 6,600여 이상의 호와 3만 명을 웃도는 인구수가 지속된다. 단, 19세기 말엽에는 행정 개편과 관하 군진(8진영)의 폐지가 이뤄지면서 급격한 감소세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잦은 왜란과 바닷가 어촌의 특징인 '여초현상'으로 성비 불균형이 극심했다.  

근현대 6.25전쟁 중, 거제인구는 주민 10만 명, 피난민 약15만 명, 포로 17만 명 등, 한때 약42만 명이나 되었다. 이후 1985년부터의 인구증가와 '남초현상'은 조선경기 활성화에 기인한 것이다.  

● 참고로 거제의 읍치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라시대 상군(裳郡)의 설치 때, 읍치가 거제현 둔덕면 거림리였고, 고려시대 기성현 설치 時부터 거제치소는 사등면 사등성 일대인 것으로 확인된다. 우선 고려사절요에는 1226년1월 고종13년 거제현령 진용갑(陳龍甲)이 왜가 침구하여 사도전(沙島戰)이 일어나, 적 2급을 참살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사도(沙島)는 고현(古縣) 동쪽에 있다. 거제읍지 편에는 고려 고종(高宗) 때에 왜적(倭賊)이 침입하자, 현령 진룡갑(陳龍甲)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사도에서 싸웠는데 적이 밤에 도망쳤다. 그리고 거제부 청구요람 고지도에도 사등 앞바다 '사두도(蛇頭島, 沙島)'를 진용갑이 싸워 이긴 섬으로 표기하고 있다.  

거제현 치소 북쪽 섬에 왜구가 침입했다는 당시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거제현 치소는 사등성임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1422년 거창군에서 다시 환도(還島) 했을 때에도 옛 치소로 돌아왔으나 여러 형편이 좋지 않아 고현(고정리)로 치소를 옮겼다고 한다.  조선시대 1432년부터는 거제현 고현성, 이후 1664년 거제현 거제부 거제면 서상리로 옮겼다.

거제도 본섬의 명칭도 사도도(沙都島), 상도(裳島), 거제도(巨濟島)로 바뀌었다. 1690년 거제면 동상리 김진규 선생은 그의 문집에, 당시 거제도 본섬을 '상도(裳島)'와 '거제도(巨濟島)'로 병기하여 사용했다.

5). 조선후기 거제부(巨濟府) 방리(坊里) 및 호구총수(戶口總數)
● 자료 1.
<거제부(巨濟府) 방리(坊里).『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 ; 『巨濟府邑誌』(1832年刊)>

면명(面名)

 
 리수(里數)와 호구(戶口)
里 
 坊里名(距官門∼里) 방리명(관문에서 거리)
 
 『호구총수(戶口總數)』의 마을명(里名)
읍내면邑內面
26리, 살림집(元戶) 1,782호 사람수(口數) 7,839명 (남 ; 여 3,871 ; 3,968)
東部
14
 고다대포(古多大浦), 저구미{猪仇味(未)}, 갈곶(加乙串)(40리), 망포(網浦), 율포{栗浦←-진하리(鎭下里)}, 가배량{加背梁←-진하리(鎭下里)}(20), 주원도(朱原島)(30월해(越海:바닷길 30리), 구천동{九川洞←구천장(九千場)}, 화치(化峙), 화의(火蟻), 오송정(五松亭)(10), 산촌(山村), 명진{溟(明)珍}, 오수항{梧樹項←오수항(吾水項)}(5)
솔비포(所乙非浦), 당항(堂項), 봉암(蜂巖), 기동(妓洞), 죽도(竹島), 산달(山獺)
西部
 7
내간덕(內看德), 옥산(玉山)(7), 죽림포(竹林浦), 외간덕(外看德), 녹동(鹿洞)(5), 서정(西亭)(1), 성내읍기(城內邑基)
둔덕면屯德面
20리
元戶 1,321호
 口數 5,785명
 (2,808 ; 2,977)
 7
영등{永登←-진하리(鎭下里)}(35리), 한산도(閑山島)(30리越海:바닷길),하둔덕(下屯德), 산방(山芳), 거림치(巨林峙), 상둔덕(上屯德), 법동포(法東浦)(20)
 여찰포(汝次乙浦), 양포(양浦), 두억포(頭億浦), 장동(長洞), 창동(倉洞), 일정포(一碇浦), 야소포(冶所浦), 멸포(며乙浦), 비진도(非珍島), 용초(龍草), 호두(胡頭), 동좌(東佐), 서좌(西佐), 왜구미(倭仇味)
사등면沙等面
7리, 元戶 467호
口數 1,975명 
(983 ; 992)
6
왜성(倭城), 오양(烏壤)(40), 가조도(加助島)(35越海), 지석(支石)(30), 사등(沙等), 두동{豆(頭)洞}(20)
사근포(沙斤浦)
고현면古縣面
 23 리,
元戶 1,461호 口數 5,995명 
(2,979 ; 3,016)
一運
11
지세포{知世浦←-진하리(鎭下里)}, 주림포{舟(酒)林浦}, 항리(項里), 왜구미(倭仇味)(40), 망치(望峙), 양화정(楊花亭)(30), 문동(門洞), 삼거리(三巨里), 남문(南門), 서문(西門), 사동(寺洞)(20)
장평(長坪), 동문(東門), 능포(凌浦), 두모(杜母), 진목정(眞木亭)*『巨濟邑誌』(國中 한 古朝62-16 ; 1880년∼)  二運 11리 저산(猪山)(20) 추가
二運
10
장승거리(長承巨里), 옥명포{玉鳴(明)浦}(40), 관송(貫松), 당항(堂項), 아주{鵝(我)洲}, 옥포{玉浦←-진하리(鎭下里)}, 조라포{助羅浦←-진하리(鎭下里)}(30), 해명(海明), 수월(水月), 양정{楊(羊)亭}(20)
연초면延草面
 15리 
元戶 917호  
口數 3,938명 
(1,946 ; 1992)
12
이물도(利勿島)(50越海), 외포(外浦), 덕포(德浦), 이곡(梨谷), 문암(門巖), 한해{汗海←한내(汗內)}, 오비{鳥飛←대오비(大烏飛) 소오비(小烏飛)}, 명동(椧洞)(40), 다공(茶貢), 연사{烟沙←연화(烟北)  연남(烟南)}, 송정{松亭←상송정(上松亭) 하송정(下松亭)}, 죽토(竹土)(30)
이목리(梨木里), 효자문리(孝子門里), 죽전리(竹田里)

하청면河淸面

29리
元戶 1,033호 
口數 4,491명 
(2,235 ; 2,256)
16
저도(猪島)(75리越海), 황포(黃浦), 유포{柳浦←상유포(上柳浦) 하유포(下柳浦)}, 구영등(舊永登), 농소포(農所浦)(70), 저포(這浦), 장목포{長木浦←-진하리(鎭下里)}, 구율포(舊栗浦), 대금산(大今山), 부(시)방{夫(矢)方}(60리), 칠천도(柒川島)(55越海), 사외포(絲外浦), 사곡{巳串←(蛇串)}, 내가이(內加耳), 외가이{外加耳←외가상(外加上) 외가하(外加下)}, 하청{河淸←하청남(河淸南) 하청북(河淸北)}(50)
 석포(石浦), 실전(實田), 궁농소(宮農所), 송진포(松鎭浦), 외질포(外叱浦), 두모포(豆毛浦), 송포(松浦), 대곡(大谷), 어온포(於溫浦), 장곶(獐串), 이물도(利勿島)
 
6개 면(面)
 
 
120리
元戶 6,981호 
口數 30,023명 
(14,822 ; 15,201)
83坊
 월해(越海) 바닷길 거리
 
 

 ● 자료2.
<거제(巨濟)의 방리(坊里). 갑오경장 後,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1899年刊)>

면명(面名)

 
방리수
(坊里數)
 방리명(坊里名) 〔+신설마을(新設 里名)
[방리=마을]
慶尙道邑誌』(1832년) 마을이름(里名)에서 빠진 것
읍내면邑內面
 
동부(東部)
 14→22
 다대(多大), 저구(猪仇), 갈곶(加乙串), 율포(栗浦), 가배(加背), 구천(九川), 오송(五松), 산촌(山村), 명진(明珍), 오수(烏首) 〔+산양(山陽), 남송(南松), 동호(桐湖), 영북(嶺北), 탑포(塔浦), 죽림(竹林), 유천(柳川), 평지(平地), 부촌(富春), 명사(明沙), 다포(多浦), 학동(鶴洞)
 
망포(網浦), 화치(化峙), 화의(火蟻), 주원도(朱原島) / 죽림포(竹林浦), 성내읍기(城內邑基)
 
서부(西部)
 7→12
 내간(內看), 옥산(玉山), 외간(外看), 녹동(鹿洞), 서정(西亭) 〔+금화(金荷), 화원(花院), 서상(西上), 서하(西下), 동상(東上), 동하(東下), 남동(南洞)
둔덕면屯德面
7→18
 영등(永登), 하둔(下屯), 산방(山芳), 거림(巨林), 상둔(上屯), 법동(法東) 〔+옥동(玉洞), 덕리(德里), 농막(農幕), 유기(柳技), 상서(上西), 녹산(鹿山), 술역(述亦), 적도(赤島), 마장(馬場), 시목(枾木), 어구(於九), 소랑(小郞)
 한산도(閑山島)
사등면沙等面
6→15
왜성(倭城), 오양(烏良(壤)), 가조(加助), 지석(支石), 사등(沙等), 두동(豆洞) 〔+성촌(城村), 장좌(將左), 사근(沙斤), 청곡(靑谷), 서갈(西加乙), 신계(新溪), 아안(阿岸),  광리(廣里), 신호(新湖)
 
일운면一運面
11→22
 주림(舟林), 항리(項里), 왜구(倭仇), 망치(望峙), 양화(楊花), 문동(門東(洞)), 삼거(三巨), 서문(西門) 〔+장평(長坪), 연곡(年谷), 동문(東門), 금곡(金谷), 용산(龍山), 교항(橋項), 소동(小洞), 대동(大洞), 회진(會珍), 선창(船倉), 미조(彌助), 와현(臥峴), 조라도(助羅島=내도 외도),  지심도(只心島)
지세포(知世浦), 남문(南門), 사동(寺洞) /  
관송(貫松), 당항(堂項), 수월(水月)
 
이운면二運面
10→18
 장승(長承), 옥명(玉明), 상아(上鵝), 하아{(下鵝)(←아주(鵝洲)}, 옥포(玉浦), 조라(助羅), 해명(海明), 양정{(良井)(양양정(楊·羊亭)}, 능포{菱(凌)浦}, 두모(杜母), 〔+*저산(猪山), 수양(水陽), 수동(水東), 거로(居老), 관화(貫化), 국산(菊山), 영태(嶺台), 우산(牛山)
연초면延草面
12→18
 
덕치{德峙(浦)}, 이목(梨木), 이남{梨南(←이곡(梨谷)}, 문암(門巖), 한내{汗內(←한해(汗海)}, 대도(大島), 소도{小島(←대,소오비(大·小烏飛)}, 명상(明上), 명하{明下(←명동(椧洞)}, 다공(茶貢), 연사(烟沙), 상송(上松), 하송{下松(←송정(松亭)}, 죽토(竹土) 〔+관암(冠岩), 죽전(竹田), 천곡(泉谷), 주령(珠嶺) 
 이물도(利勿島), 외포(外浦)
하청면河淸面
16→14
석포(石浦), 실전(實田), 장곶{長(獐)串}, 어온(於溫), 송포(松浦), 대곡(大谷), 외질포{外叱浦(瓜田)}, 외상(外上), 외하(外下), 하청(河淸), 〔+하구(河九), 연구(蓮九), 덕곡(德谷), 해안(海安)
이물도(利勿島) / 저포(這浦), 구율포(舊栗浦), 대금산(大今山), 칠천도(柒川島), 사외포(絲外浦), 사곡(巳串), 내가이(內加耳), 외가이(外加耳)
외포면外浦面
 8
덕상(德上), 이호(利湖), 덕하(德下), 유동(柳洞), 시방{矢(夫)方}, 대령(大令), 보곡(寶谷), 율천(栗川)
 
장목면長木面
11
 장목(長木), 관포(冠浦), 송진(松眞), 황포(黃浦), 구영{舊永(←구영등(舊永登)}, 상유(上柳), 하유{下柳(←유포(柳浦)}, 저도(猪島), 농소(農所), 궁종(宮農), 두모(頭毛)
 
한산면閑山面
 14
  죽도(竹島), 산달(山達), 추원(秋元), 봉암(烽岩), 양포(양浦), 비진(比珍), 두억(頭億), 동좌(東佐), 서좌(西佐), 창동(倉洞), 매동(梅洞), 하포(荷浦), 용초(龍草), 호두(胡頭)
 
10面(10개 면)
83→139里
 
 *표 글은 『호구총수(戶口總數)』의 리명(里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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