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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반곡서원문학 1…송시열(宋時烈)[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 고영화

1).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 영남 노론과 거제반곡서원
경상우도에 속하는 거제도는 본디 조선중기 고현동 거제향교 시절부터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일파가 몰락하자, 남명학파가 분해되어 일부는 퇴계학파에 합류했고, 일부는 정계 진출 및 생존의 차원에서 서인에게 접근하였으므로, 남명의 학통은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하자, 송시열의 거제도 유배가 계기가 되어 노론계 학통이 널리 숭상되었다.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은 1704년 영남 노론계 서원중 하나로써, 거제유림들과 송시열 문인인 전극화(全克和,1648년∼1718년)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로 인해 공교육기관인 거제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퇴색하고 사립학교 반곡서원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송시열선생은 거제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집필하였고 거제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떠난 후에 거제유림들이 유배지 배소에다 간략한 사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를 만들어 선생을 추모하였다.

1689년 김진규 선생과 1722년 김창집선생의 연이은 거제면 동상리 유배로 인해, 반곡서원 일대가 도론동(道論洞)이라 불릴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나, 거제도는 유학의 절정기를 맞았다. 거제의 유림들은 중앙정계의 파당에 관계없이 조선 말기까지 안동 도산서원을 정기적으로 찾아 제를 올리기도 했다.

영남의 노론으로는 상주지역에 창령 성씨가 있었다면, 대구에는 옥천 전씨가 있었다. 옥천전씨는 대구의 대표적인 노론(서인) 가문으로, 전유장(全有章)이 현종 8년(1667) 3월에 양현승무소를 올렸다. 전유장은 전유경과 함께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고, 아들 모두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아들 전극태는 함창의 채하징과 송시열변무소를 올린 바 있다. 종유록을 보면, 중앙의 노론계 인사 및 다른 영남지역의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생 전극념과 전극화(全克和,1648년∼1718년)는 김장생 승무소를 올린 바 있으며, 특히 전극화는 거제와 장기에 송시열 서원을 건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극초는 송시열의 덕원 적소행을 배행하였고, 만년에 명왕조가 망하자 동지 13賢과 팔공산에 은거하였다. 숙종 19년(1693) 14賢 후손들이 유계(儒契)를 만들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여름에 수계(修契)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인동의 향전에 깊이 관여하였다.

청도의 밀양박씨 가문은 대구의 대표적인 서인(노론) 집안인 옥천 전씨와의 결혼관계로 맺어진 집안이다. 박내장(朴乃章)이 옥천전씨 시헌의 딸과, 박지현(朴之賢)은 옥천전씨 유장의 딸과, 그리고 박미장(朴彌章)의 사위가 전극념이다. 이 집안의 사승관계를 박지현(朴之賢,1634~1681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증조 양복(陽復)은 일찍부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부 박내장(朴乃章,1602~1665)은 장현광 문인이고, 박지현의 父 박선장(朴宣章,1608~1685)은 사계 김장생 문인이다. 박지현의 아들 박태고(朴太古,1656~1704)는 전극태를 따라 거제로 귀양 온 송시열을 찾아뵙고 입문하였으며, 손자 박중채(朴重采, 1679~1750)는 권상하 문인이다. 거제의 반곡서원과 장기의 죽림서원은 전극화의 주도로, 거제의 옥삼헌(玉三獻)과 장기의 오도전 등 지역의 송시열 문인 중심으로 창건되었다. 그 후 옥삼헌과 오도전은 반곡․죽림서원의 수장․도원장(院首․道院長)이 되었다.

거제는 송시열이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터에서 적거생활 1여년밖에 되지 않아 영향이 크지 않았으나, 뒤이은 김진규의 유배로 인하여 사풍(士風)이 일어났다. 전극화는 종백씨(전극흠)와 함께 숙종 29년(1703)에 거제로 들어가 읍유들과 서당 건립을 상의하여, 읍의 원님이 재력을 모아 서당 이름을 승석당(勝昔堂)으로 정하였다. 거제선비(士人) 옥삼헌(玉三獻) 등이 유상을 모셔와 승석당에 봉안하고 묘우 강당을 지어 김진규에게 봉안문을 청하였다. 숙종 31년(1705) 5월 상순에 전극화는 원수(院首)로서 욕례(縟禮)를 성대하게 치루었다(연방집권6, 「낙포유고」죽림서원창건일기).

장기는 송시열이 숙종 1년(1675) 6월 15일 덕원에서 이배되어 숙종 5년(1679) 4월에 거제로 이배되기까지 5년여 동안 귀양살이 했던 곳이다. 이 오랜 기간 동안 송시열은 강학을 멈추지 않아 대구의 전극태 형제를 비롯 많은 선비(士人)들이 입문하였다. 그 후 장기의 사인들에게서 입사(立祠)에 대한 논의가 없자, 전극화는 거제의 반곡서원 봉안례에서 오도전(吳道全)에게 입사할 것을 촉구하고, 자신이 직접 숙종 33년(1707)에 서울로 가서 유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

[주] 오도전(吳道全) : 자는 여완, 호는 경암, 본관은 해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왔을 때 공의 집에서 거처하였으므로, 문정공의 교화에 힘입어 문장이 뛰어났으며, 장기현의 훈장으로 후진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견문학행이 출중하여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고 예절을 정비하여 많은 유풍선속을 전수하는데 공헌하였고, 공의 행적은 죽림원록에 기록되어 있다.

영남지방 노론계 서원의 건립현황을 보면, 숙종 27년 장희빈이 사사되고 남인세가 현저히 약화되면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영남사림들은 이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같은 지역내에 남인계 서원건립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영남지방에 한정된 상황은 아니고 거의 전국적인 추세였다. 조정에서는 서원이 남설되자 몇 차례 남설금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환국이 되풀이 되고, 자파계 인물의 신원과 자파세력 부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중앙집권세력들인 노론은 남인의 정계 진출 기도를 하면서, 영남지역을 자기 당파의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하여 회유와 탄압의 정책을 병행하였다. 영조년간 노론이 정국 주도권을 잡으면서 노론계 감사나 수령 등을 부임시키면서 영남 남인의 향권에 대한 진압과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노론의 영남에 대한 이 같은 시책 결과 향촌사회에서 지금까지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향론을 주도해 왔던 전통 남인세력에 대항하는 세력의 입지를 넓히게 되었고 양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세기 노론학계는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어 정계와 학계가 낙론의 주도 속에 근기남인들의 부분 참여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호서․호남․영남지역은 점점 정계에서 소외되고, 지역성은 더 고착되었다. 이는 중앙정계와 당색을 달리하는 영남지역에서 더 심하였다.

   
 
(2). 송시열과 거제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존칭은 송자(宋子).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송시열(宋時烈)선생은 그의 나이 73세 때인 1679년 3월 25일에서 1680년 5월15일까지 거제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당시 남인의 영수 남구만이 1679년 여름에 거제로 유폐되어, 이후 약 6개월 동안 거제는 노론(서인)과 남인 계열의 학통이 정면대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해 말에 남구만을 남해현으로 이배 시키면서, 거제는 송시열 노론계 학자들의 유배지로 조선 말기까지 그 명성을 이어갔다. 또한 선생의 거제 유배로 인해, 고현동 거제향교로부터 거제면 향교까지 이어온 남명학파의 학통이 사라지고 노론(서인)계 학통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1679년 거제도유배시절 그의 손자 송주석과 함께 ‘주자어류’를 집중적으로 교감하여, 그 가운데 주자 문인들의 뒤섞인 기록을 정돈하고 번거롭고 중복되는 내용을 산삭하며 류에 맞게 문목을 재분류하여 편집하였다.

손자 주석(疇錫)과 순석(淳錫)은 물론 여러 사람들이 선생의 귀양지 덕원, 거제도, 제주도로 따라와 끝까지 봉양했다. 거제로 따라왔던 회손(晦孫)이 1679년 9월 서울로 돌아갈 때에는, "밝은 햇볕 외로운 섬에 비치고 바닷물 한 몸을 둘렀구나. 바람결에 너를 떠나보내니 책 속의 옛사람 사랑하기 바라노라"[白日明孤島 滄溟遶一身 臨風送爾去 須愛卷中人]며, 손자에게 학문에 정진하라고 당부하는 말씀을 남기기도 했다.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김익훈 등은 물론, 거제 반곡서원에 제향 된 김진규 김창집 민진원 이중협 김수근은 모두 그의 제자이거나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분들이었다.

선생은 거제도(岐城) 귀양살이를 한 반곡서원 배소 인근 샘물에서, 혹여 곤궁한 객지생활과 아름다운 거제풍경에, 그의 신념(정신)이 흔들려 더러워질까 고심한다. "모든 산 그림 같고 바다 아스라하니 고야선인(신선)도 불러올 것만 같아 문득 옷자락 진토에 있음 두려워 샘물에 사흘 동안 깨끗이 빨았네"[羣山如畫海迢迢 姑射仙人若可招 却恐衣裾塵土在 汲泉淸濯此三朝]. 반곡서원 중수기(重修記)에 “동국(東國) 거제는 우암(송시열)에 이어 죽천(김진규)과 몽와(김창집)가 귀양 온 곳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 섬사람들이 처음으로 대군자(大君子)의 도학풍을 보고 가르침을 받아 그 공경함이 깊었다”라고 적혀있다. 우암이 이 섬을 다녀간 후 이 섬에서는 많은 학자가 배출됐다. 그를 사숙하여 성리학을 크게 깨우친 동록 정혼성, 많은 저서를 낸 성기엽, 원원휘, 옥중환 ‘대학문답편’의 저자 윤영개, 김형중, 원도철 등은 거제를 대표하는 학자가 됐다.

   
 
(3) 반곡서원 송시열 유배문학
① 회손(晦孫)에게 주어 작별하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9월 거제 동상리 배소.
白日明孤島 밝은 햇볕 외로운 섬에 비치고
滄溟遶一身 바닷물 한 몸을 둘렀구나.
臨風送爾去 바람결에 너를 떠나보내니
須愛卷中人 책 속의 옛사람 사랑하기 바라노라. 
손자 주석(疇錫)과 순석(淳錫)은 물론 여러 사람들이 선생의 귀양지 덕원, 거제도, 제주도로 따라와 끝까지 봉양했다. 위 글은 거제로 따라왔던 회손(晦孫)이 서울로 돌아갈 때 학문에 힘쓰라 당부하는 글이다.

② 금년은 마침 효종(孝宗)의 탄신 주갑인데 오늘이 또 스무 번째 제삿날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통곡하니 슬픈 마음 더욱 가눌 수가 없었다. 손자 주석(疇錫)이 한 절구를 읊어 보여 주므로 그 운을 사용하여 짓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5월 4일.  
湯文比德敢云阿 탕 임금 문왕 같은 덕 감히 아첨이라 하겠는가
千一昌期驗濁河 천재일우 좋은 기회 황하에 시험했네
奉諱廿年還一甲 가신 지 이십 년에 주갑이 돌아왔으나
呼天天亦奈吾何 목 놓아 울어 봐도 나에게 어찌하리
 
③ 손자 주석(疇錫)이 파리를 읊은 시에 차하다.  
世人情狀甚於蠅 세인의 정상은 파리보다 더한데
六一篇中恠獨憎 육일의 글에 파리만 미워한 것 괴이하네.
若使當時蠅有語 당시의 파리가 말을 했다면
不公之謗似丘陵 불공평하다는 훼방 산 같았으리. 
[주] 육일편중(六一篇中) : 육일은 송(宋) 나라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육일거사(六一居士)라 자칭한 것을 말하고 파리를 미워하는 증창승부(憎蒼蠅賦)를 지었다.
 
④ 바다를 건너오면서 경신년(1680, 숙종 6년, 선생 74세). 견내량을 건너며.
聖德寬臣海島囚 성덕으로 해도의 신하 풀어 주시어
鯨波重渡淚雙流 큰 물결 다시 건너며 눈물 흘렸노라
惟玆舊要要同利 옛 친구 함께 이로움 요하니
千里山川摠帶羞 천 리 산천 모두 부끄러움 띠었네. 

[주] 옛 친구 이로움 요하니 : 기해년 효종의 상사(喪事)에 자의전(慈懿殿)이 기년복을 입도록 주장한 우암이나 초려는 다른 한쪽의 공격을 받아 왔다. 15년 후 현종 갑인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사 때 예론(禮論)이 또 일어났는데 이때 초려는 효종이 적자(適子)이지만 복은 기년이어야 한다는 예설을 만들어 우암과 서신을 왕복한 일이 있다. 그후 6년 경신옥사(庚申獄事) 후에 유배에서 풀릴 때 숙종이 “송시열(宋時烈)의 소견도 이유태(李惟泰)와 같다 하니 모두 해배(解配)토록 하라.” 하였다. 
 
⑤ 주석(疇錫)과 순석(淳錫)에게 보여 주고 화답을 구하다. 기미년(1679년, 선생 73세). 
賤迹寧須說 나의 한 일 무엇 말할 것 있는가?
前頭果若何 앞날이 과연 어찌 될지
都將生受事 쓰라린 일 모두 거두어
收入短長歌 짧고 긴 노래에 넣었노라.
薄俗嗟飜手 각박한 풍속은 손 뒤집듯 뻔하고
殘年歎逝波 쇠잔한 나이 흐르는 물결 같아라.
幸玆安靜日 다행히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
談理恐無多 도리의 이야기 적을까 저어하노라
 
⑥ 김 용궁(金龍宮, 金德民) 신후(愼厚) 이 보내온 시에 차하다. 칠언 절구(七言絶句)
其一
碧天雲盡鴈初廻 푸른 하늘 구름 걷히고 기러기 오니
秋老江南草木衰 강남에 가을 깊어 초목도 시들었구나.
珍重一書千里至 진중한 편지 한 장 천 리 멀리 왔으니
却令開豁楚臣懷 문득 귀양 온 사람 마음을 열어주네
其二
心到閒時辛亦甘 마음 한가로우면 고생도 달가워
休憐遷北復移南 남북으로 옮겨다님 불쌍할 것 없다네.
高軒聽說仙桃熟 높은 마루에서 선도 익은 이야기 듣고
鶴眼將看海變三 학의 눈에 세 번 변하는 바다 보리라.
 
⑦ 기성(岐城). 거제도 죽천 샘물에서
羣山如畫海迢迢 모든 산 그림 같고 바다 아스라하니
姑射仙人若可招 고야선인도 불러올 것만 같아
却恐衣裾塵土在 문득 옷자락 진토에 있음 두려워
汲泉淸濯此三朝 샘물에 사흘 동안 깨끗이 빨았네.

[주] 고야선인 : 신선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묘고야(藐姑射)의 산에 신선이 있는데 살결이 옥설(玉雪) 같고 예쁘기가 처녀 같으며 곡식을 안 먹고 바람을 마신다” 하였다.  거제도 풍경은 신선이 노닐 것 같이 아름다우나 선비의 정신(옷자락)이 진토에 더러워진 것 같아 깨끗한 샘물(죽천竹泉)에 씻으면 나아질까? 생각하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다짐하고 있는 한시(漢詩)이다. 

⑧ 기미년(1679년) 인일(人日 7월)에,  
人日初暾天氣勁 인일 아침 돋는 해 하늘 기운 거세면
人言其驗下民殃 사람들의 말 조짐 백성의 앙화라네
願言聖上回災沴 원컨대 성상께서는 재앙을 돌리어
甘雨和風遍四方 단비 화한 바람 사방에 두루하게 해 주오.
[주] 인일 : 음력 정월 7일. 옛 풍속에 이날의 일기를 가지고 1년 동안의 모든 길흉을 점친다 한다.
 
⑨ 금년은 마침 효종(孝宗)의 탄신 주갑인데 오늘이 또 스무 번째 제삿날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통곡하니 슬픈 마음 더욱 가눌 수가 없었다. 손자 주석(疇錫)이 한 절구를 읊어 보여 주므로 그 운을 사용하여 짓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5월 4일.  
湯文比德敢云阿 탕 임금 문왕 같은 덕 감히 아첨이라 하겠는가?
千一昌期驗濁河 천재일우 좋은 기회 황하에 시험했네.
奉諱廿年還一甲 가신 지 이십 년에 주갑이 돌아왔으나
呼天天亦奈吾何 목 놓아 울어 봐도 나에게 어찌하리.
 
⑩ 최자경(崔子敬) 신(愼)의 운에 차하다. 기미년(1679년, 선생 73세) 9월 하순.
기이(其一)
雲谷僞魁魁逆黨 주자가 위학의 괴수 역당의 괴수라 하여
門生故舊並罹殃 문생과 친구까지 모두 앙화받았는데
如何千載猶尊慕 어찌하여 천 년 뒤에도 오히려 존모하는가
抵死誠心質上蒼 죽도록 지켜온 성심 하늘에 질정하네.
송나라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자를 위학(僞學)의 괴수라 했고 뒤에는 역당의 괴수라 했다.
기이(其二)
胡紘繼祖今雖在 호굉(胡紘)과 계조(繼祖) 지금도 있지만
九死何曾懼禍殃 아홉 번 죽어도 어찌 화를 두려워하랴
惟是一斑窺未得 오직 한쪽도 엿보지 못하였으니
白頭今日媿穹蒼 백발 된 오늘에도 하늘에 부끄럽네.
기삼(其三)
罔極恩垂千億載 망극한 은혜 천년 억년 전해 오니
求疵者必有天殃 트집 잡는 자들 하늘의 화 있으리.
世道人心今若此 세도와 인심 이제 이 지경 되었으니
起看松月夜蒼蒼 일어나 침침한 밤 소나무의 달빛 보았노라.
문중자(文中子)가 ‘통(通)이 부자(夫子 공자(孔子))에게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다.

[주1] 최자경(崔子敬) : 송시열의 문인 최신(崔愼). 자경은 그의 자. 호는 학암(鶴菴). 벼슬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주2] 호굉(胡紘)과 계조(繼祖) : 송 나라 경원(慶元) 병진년에 호굉이 우두머리로 나서서 주자를 위학(僞學)이라고 몰아붙였는데, 심계조(沈繼祖)가 이어 주창하였다. 《宋史 卷394》
 
⑪ 정 찰방(鄭察訪) 치(治) 이 종손(從孫) 강석(康錫)과 주고받은 운에 차하다.
鄒嶧江淮古史遷 추역과 강회에는 옛 사천 있었지만
我浮滄海勝當年 나는 바다에 떠다녔으니 그보다 낫다네.
歸來默坐山窓下 돌아와 묵묵히 산창에 앉아
長遣烟霞鎖洞天 늘 연하에 잠긴 골짝 하늘 보노라.

[주] 추역 강회 사천 : 추역과 강회(江淮)는 땅 이름이고 사천(史遷)은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그는 20세에 강회를 유람하고 추역에서 향사례(鄕射禮)를 배우고 돌아와서 문장이 증진되었다고 한다.
 
⑫ 손자 순석(淳錫)의 망모(亡母) 기일에 차운하다.  
憶曾携爾壙邊臨 일찍이 널 데리고 무덤에 임하니
心似初亡尙不禁 초상 때 같은 마음 금할 수 없었네.
十八忌逢蠻海上 열여덟 번째 기일 바닷가에서 만나니
精靈應識我哀深 정령도 나의 깊은 슬픔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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