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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반곡서원문학 3. 김진규(金鎭圭)[연재]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 고영화
① "견화유사(見花有思)" 꽃을 보니 생각나네.
梅花半落杏花開 매화꽃 반쯤 지니 살구꽃 피고
海外春光客裏催 바다 멀리 봄빛은 나그네 마음 재촉하네.
遙憶故園墻北角 멀리 고향의 우리 집 담 북쪽 모퉁이
數株芳樹手曾栽 내가 심은 몇 그루 나무도 꽃 피어났으리. 

거제도에 봄날이 돌아 왔다. 매화꽃이 막 지고 살구꽃이 피는, 찬란하고 화사한 봄빛은 바닷물결에도 닿아 살랑살랑 반짝인다. 멀리 고향집 정원에도 거제도처럼 꽃이 활짝 피기를 소원한다. 선생의 마음속엔 돌아 온 봄처럼, 다시 고향집에 돌아가고픈 희망과 설레임, 그리고 조바심을 함께 표현한 노래이다.

② "야경(夜景)" 밤의 경치
輕雲華月吐 달을 토해내는 가벼운 구름,
芳樹澹煙沈 꽃나무는 맑은 안개 속에 잠긴다.
夜久孤村靜 밤이 깊어 고요한 외딴 마을, 
淸泉響竹林 맑은 샘물소리 대숲을 울리네. 

밤의 경치를 읊은 서경시(敍景詩)이다. 고요히 비추는 달 빛 아래, 밤늦도록 선생은 홀로 느끼는 바를 소탈하게 묘사해 놓았다.  달을 지나는 엷은 구름, 밤안개가 낮게 걸친 향기로운 숲, 외딴 거제면 동상리 골짜기의 적막감에 낮에는 잘 들리지 않던 죽천(반곡서원 서편 십 수보에 있는 샘물) 샘물 소리 까지도 청아하게 들린다. 거제도의 밤늦은 풍경이라 그런지 한층 정겹게 느껴진다.

③ "주면(晝眠)" 낮잠
卯酒餘醺午睡濃。아침술에 취기가 남아 낮잠을 달게 자는데
離離簷影落窓櫳。드리운 처마 그림자, 격자무늬 창에 떨어진다.
一聲山鳥驚幽夢。한 가락 산새 소리가 그윽한 꿈을 깨워,
起看西峯夕照紅. 일어나 바라본 서산 봉우리, 저녁노을 붉었으랴.

이런저런 생각에 밤새 잠 못 이루다, 아침나절에 먹은 술에 취기가 생겨 잠시 방안에 누웠다가 잠이 든다. 그러다 초가집 바깥에서 둥지로 돌아가는 시끄러운 산새소리에 벌떡 일어나 초가집 격자무늬 창을 열어보니 벌써 서산에 해는 기울고 하늘엔 온통 붉은 노을이 가득하다. 달콤한 지난 세월이 모두 한바탕의 일장춘몽이듯, 깨어보니 덧없는 부귀영화였다. 위 시의 산새소리는 선생이 유배당한 사건인 기사환국을 의미하며, 거제도로 유배와서 뒤늦게 깨닫는 순간 이미 인생의 황혼기가 되었음을 비유하고 있다.

남해도로 유배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서포 김만중은 김진규의 삼촌이다. '당시에 김만중 뿐만 아니라 김만기의 큰아들 김진구는 제주에 유배되었고 둘째 조카 김진규는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셋째 조카 김진서도 진도로 유배가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구나 하고 생각될 수 밖에 없다. 그네들에게 두려운 것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척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이야 이렇게 의지가 강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④ 김진규(金鎭圭)선생께서 유배 첫해인 1689년 겨울에,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인근 배소로, 아내가 보내준 옷가지와 편지를 읽고, 그리운 처자식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秋氣生深閤 가을 기운이 깊은 누각에 밀려올 때
寒衣寄遠人 겨울옷을 멀리서 누군가 보내왔네.
依依出君手 휘청휘청 나가보니 임의 손이라,
戀戀着吾身 애끓는 그리움에 나도 몰래 입어보네.
映月應砧冷 달빛 들어와 "다듬잇돌은 차다" 하여
挑燈想黛顰 등불 심지 돋우니 눈썹먹에 눈살 찌푸리듯 한다.
偏憐淚痕染 눈물 흔적이 얼굴에 번지니 몹시도 애달파,
衫袖卽湘筠 소매 자락을 풍로(風爐) 가까이 가져간다. 
 
又 / 余不識生産事 妻兒常衣破衾弊 五六記平日所睹實事 나는 아이가 태어난 일을 몰랐는데 아내가 헤진 이불을 째서 아이 옷을 만들어 입혔다한다. 예전에 평상시 보았던 사실, 대여섯을 적어본다.
想像裁衣苦 애써 옷을 고쳐 만든 일을 상상하니
慇懃托意深 깊은 뜻이 담겨 은근한 정이 느껴지네.
憂寒增着絮 추위 걱정에 솜옷을 겹쳐 입고
憶遠幾停針 기억해보니, 몇 번이나 바늘에 찔러 멈칫거렸다.
身冷無完帔 몸은 차갑고 온전치 못한 치마에다,
兒號擁弊衾 우는 아이를 헤진 이불에 끼고 앉았었지.
都將篋中帛 아~ 문득 상자 속 비단에 쓴 글을 보니
聊寄枕邊心 애오라지 베갯머리에다 마음을 보냈네.
又楚澤非邊戍 가시나무 울타리는 변경의 수자리가 아닌데도
秋衣亦遠來 가을철 옷이 멀리서도 왔구나.
芰荷那復製 수초들이 어찌 다시 자라는가?
篋笥爲親開 버들가지도 새로이 피어난다.
燈火閨中暗 등불은 안방 깊이 숨고
風霜海外催 바람과 서리가 섬을 재촉한다.
摩挲更惆悵 몸을 비비다 보니 다시 마음 서글퍼져
綵服想生埃 떠올린 비단 옷에 먼지만 인다네.  

해설 : 첫째 구절(句節)을 살펴보면, 멀리 서울 집에서 아내가 보내온 옷을 보고 "나도 몰래 옷을 입었다"라는 표현은, 집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을 느낄 수 있으며, 달빛에 "다듬이 돌이 차다." "눈썹먹에 눈살 찌푸리듯 하네."라고 늘 걱정스레 늘어놓던 아내를 의인화한 멋진 시구이다. 또한 선생은 잠 못 이루며 오두마니 앉아 등불 심지를 돋우고 있다. 등불 심지가 다 타면 다시 심지를 돋우어 주어야 불이 꺼지지 않는다. 선생은 등불 심지를 돋우어 불을 꺼트리지 않을려고 한다. 등불마저 꺼져버리면 깜깜한 어둠속에서 자신과 함께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가물대는 등불 심지를 돋우다가 혹여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기다림이 느껴진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 먹을까 괴로워하는 것 같다.  

둘째 구절은 귀양 떠난 온 후에 태어난 갓난아이를 돌보며, 남편의 겨울옷을 일일이 바느질 장면을 상상하며 애달픈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 구절에서는 아내가 보내준 겨울옷을 입고 보니 수초나 버들가지가 봄이 아닌데도 새로 피어난다고 선생의 들뜬 심정을 나타내고 있고, 보내온 옷으로 인해, 집밖에는 거제도 겨울추위가 재촉하지만, 방안에는 아내의 사랑이 충만하다. 긴 밤 아내가 그리워 여기 저기 비비고 만져보다가, 보내온 옷은 진작 만져 보지도 못한다. 비단 옷을 아내로 비유해, 떨어져 있어 사랑의 안타까움에, 읽는 독자도 서글프게 한다. 버들가지는 고전시에서 이별의 정표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인데, 버들가지를 심으면 뿌리가 다시 내려 새잎이 돋아난다. 헤어졌지만 훗날 재회하자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말이다. 부인을 생각하며 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그려냈으며, 눈앞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한, 그리운 사랑을 표현한 명작이다.

⑤ 김진규(金鎭圭)선생이 거제면 동상리에 유배 살 때 유자 맛을 본 후, 귀양살이가 끝난 1694년 초겨울, 서울로 올라온 선생은 대궐 앞에서 공물로 올라 온 '거제 유자'와 함께 임금을 배알하는 심정에, '거제유자찬가(南州柚歌)'를 지은 아름다운 한시가 전하고 있다.
 
< 남주유가(南州柚歌) 거제유자찬가 >
南州炎德産柚樹 남녘 고을 더위 덕에 유자나무 자란다네
處處人家種園圃 인가 앞뒤 이곳저곳 울안밭에 심었구나
婆娑株榦閱歲月 세월 지나 나부끼는 유자나무 줄기와
沃若枝條含霧雨 가지에 윤기 바르르, 안개비 머금었다
猗嗟嘉木世所稀 아~ 멋있고 아름다워라, 이 세상에 희귀한 것,
燕棗秦栗非其伍 대추 밤 제수과실 그 다섯은 아니네.
歲暮嚴霜悴草木 세모의 된서리에 초목이 파리해도
滿林佳色獨盈矚 아름다운 빛깔 우거진 유자 숲, 어찌 그리 교만할까?
葉茂森森競翠竹 우거진 잎 삼삼하여 취죽(싱싱한 대나무)과 다투는데
子熟煌煌映黃菊 익은 열매 번쩍번쩍 노란국화 초라하다
望中村落張錦繡 촌락을 보노라니 비단 옷 그림이라,
摘來衣裳襲芬馥 유자 따 와서 보니 옷에 배인 향기 뿐,
乍破香霧爪甲濕 향기 안개 지나가니 손발톱이 축축하고
細嚼流霞膓肺沃 살짝 씹은 신선(神仙)의 술, 마음까지 부드럽다
南州吏民不敢甞 남쪽고을 백성들은 맛보지 아니하고
十襲題封獻君王 열 겹이나 귀히 싸서 군왕께 올린다네.
蓬萊殿上深秋日 깊어가는 가을날, 전각 위 축하 장식,
荊楚包開滿庭香 연회 위해 연 보따리, 궁궐에 향기 가득,
想見天笑一爲新 웃는 하늘 바라보니 온 누리 새로워
頓覺玉食增輝光 맛난 음식 나타나 찬란하게 빛나도다.
君餘仍復徧恩錫 임금의 은혜로 모두에게 나누어,
小臣亦甞霑聖澤 신하도 맛을 보니 두루 미친 성은이네.
豈知流落此相見 이렇게도 만나는데 귀양 간 날 알아줄까?
臨風三嗅淚垂臆 바람 따라 맡은 내음, 가슴속 눈물이라.
聞說昨夜貢使發 어젯밤 소식으론 올린 공물 온다는데
幾時當到長安陌 서울 길거리에 언제 당도하려나?
羨爾遙生瘴海村 부러워라, 생산된 먼 장기 낀 어촌에서
猶得年年近至尊 해마다 지존(임금)께 가히 사랑받으니..
自憐懷中餘舊核 가엾다, 마음속에 예전 그 씨앗 남아
美人天末空嬋媛 거제도 미인의 아름다움 헛되는구나.
欲將丹心比珍果 진귀한 과실보다 참된 정성 으뜸인데
安得伴爾朝天閽 어찌 너와 벗되어 도성 문(門)서 배알할까?
嗚呼安得伴爾朝天閽 아~ 어찌 너와 벗되어 도성 문(門)에서 배알할까?

⑥ 17세기 말 김진규 선생께서는, 그물을 쳐서 대구어를 잡는 거제 어부들의 모습과, 처음 먹어보는 대구 맛에, 고향집 홀로 계신 어머님이 생각날 정도로 대구 맛이 훌륭했음을 "대구를 먹으며..(食大口魚有感)"라는 시(詩)에다 표현했다. 巨口纖鱗世所珍 큰 입에 가는 비늘은 세상에 보배인 바獨於魚鼈逈超倫 생선 중에 홀로 대단히 초륜하다 漁人網集窮滄海 어부들은 푸른 바다에서 힘써 그물을 쳐 잡으면, 驛使星馳貢紫宸 역관이 빨리 달리어 대궐에 올린다. 宿昔微臣每霑賜 예부터 미천한 신하에게도 늘 은혜를 베풀었다했는데 流離絶域此甞新 먼 변방에 정처 없이 떠돌다 이에 새로운 맛을 보는구나. 臨餐更結堂闈戀 밥 먹다 다시금 고향집 문이 그리워지나, 惆悵無因遺老親 서글프게도 이유 없이 늙으신 어르신만 계시겠지. [주] 초륜(超倫) : 범상함을 넘어서서 뛰어나다.

⑦ 感島中梅花 거제 매화에 감응하여 / 1692년 김진규(金鎭圭).  
窈窕佳人落絶荒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변방에서 떨어졌는데
昬昬瘴霧蔽容光 장기 낀 어두운 안개로, 빛이 자취를 감추었구나
忽飛炎海三春雪 거제바닷가 세 번째 맞은 봄에 홀연한 흰 눈 날리니
猶帶金宮五夜香 아직도 금빛 띈 초가집에 새벽녘 공기 향기롭다.
豈爲徵歌裁白苧 지은 흰모시, 어찌 노래를 불러야 할까?
秪緣傷別洗紅粧 다만 이별의 상처로 붉은 화장 지울 뿐,
西隣騷客詩相吊 서쪽 이웃의 시인이 위로하는 시구 중에,
玉骨元宜鐵石腸 굳센 의지에는 매화가 당연히 으뜸이라네.  

[주1] 백저(白苧) : 뉘어서 빛깔이 하얗게 된 모시. 눈모시. 흰모시
[주2] 옥골(玉骨) : 빛이 희고 고결(高潔)한 사람. '매화(梅花)'의 다른 이름. 천자(天子)의 유해(遺骸)
[주3] 철심석장(鐵心石腸) : 쇠 같은 마음에 돌 같은 창자라는 뜻으로, 지조(志操)가 철석같이 견고(堅固)하여 외부(外部)의 유혹(誘惑)에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이르는 말.

⑧ 봄날(春日) / 김진규(金鎭圭) 1691년.
화사한 봄날 거제면 동상리, 짙은 푸른 대숲 주위에 봄꽃이 만발하였다. 벌써 거제에서 두 번째 맞는 봄이다. 산과 바다가 모두 나를 알아보는 듯, 아양을 떤다. 비록 궁핍한 귀양살이지만, 복숭아 살구꽃에서 풍기는 봄날의 정취가 나그네의 고독한 마음을 달랠 것이다.  
迢遰長爲客 언제나 멀리 떨어진 나그네
慇懃再見春 은근(慇懃)히 재차 봄을 맞는다.
海山應識我 바닷가 산들은 당연히 나를 아는데
花竹又宜人 꽃과 대나무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네.
日暖波光媚 따뜻한 날, 물결 위의 햇빛이 아양 떨 때
天晴野色新 맑게 갠 날씨에 들 빛이 새롭다.
窮居亦有樂 궁벽하게 살지만 즐거움이 있으니
時物况怡神 시물이 더욱더 기분 좋게 만드네. 
[주] 시물(時物) : 절기(節氣)에 따라 나오는 산물(産物), 절기마다 변하는 사물.

⑨ 저물녘 봄비는 흩어져 내리고.(暮春雨中漫賦) / 사첩(四疊) 중 일부분.
집에서 바라본 거제만 앞바다에는 한산도를 포함한 수많은 섬들이 뒤섞여 있다. 저 섬들이 문득 나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 하다가, 마침 봄비오자 썰물 빠지고 여남은 꽃들이 땅에 떨어져 가득한데, 온 누리 푸른 봄빛 속에, 물가 갈매기 떼 지어 있고, 집 주위 대숲도 여전히 아름답다. 시름겨운 귀양살이 봄날,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은 마음을 담담히 표현했다.

柴門咫尺海冥冥 사립문이 지척인데 바다는 아득하고
孤嶼渾如水上萍 외로운 작은 섬들이 물 위 부평초같이 뒤섞여 있구나.
急雨驅潮天漸黑 급한 비에 조수 몰아내니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殘花滿地樹皆靑 떨어진 꽃 온 땅에 가득해도 온통 푸른 나무.
幽居無事樂沉冥 궁벽하게 살면서 별 일없이 편히 은거하며
流落何須歎梗萍 유랑했는데, 어찌 구태여 부평초가 막히었다 탄식할까나
泛渚羣鷗憐皎皎 물가에 떠있는 갈매기 무리, 흰 빛깔 곱고 어여쁘니
照盃叢竹愛靑靑 잔에 비친 대나무 숲, 푸릇푸릇 아름답네.

   
 
⑩ 맥랑(麥浪). 보리 물결 / 거제면 들판에서..
荻岸寧爲水 억새가 어찌하여 물같이 되었는가?
平田渺漲波 평지 논에 넘친 물결이 끝없고
雪消藍色活 눈이 녹아 남색 빛이 도드라지니
風偃縠紋多 바람 불어 비단물결 뛰어나다.
雉起疑鷗泛 꿩은 머뭇머뭇, 갈매기는 두리둥실,   
農謳當棹歌 농부의 노래가락, 흥겨운 뱃노래.  
滔滔孟夏後 초여름 이후로 도도(滔滔)하여
猶似見黃河 가히 황하 강을 보는 듯하네.  

[주] 도도히(滔滔-) : ①물이 그들먹하게 퍼져. ②거침없이 물 흐르듯. 순한글 '도도하다'는 거만하다는 뜻이고, 한자어인 '도도(滔滔)하다'는 막힘이 없이 기운차다는 뜻.

드넓게 펼쳐진 들판, 멀리서 바람이 엇갈려 다닌다. 새싹들이 초록물결을 이룬 보리밭은 바람의 궤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하다 말고 잠시 허리를 펴며 그 광경을 바라보니 마음은 더없이 흐뭇하다. 보리, 밀, 억새가 굽이치는 늦봄, 거제면 들판에는 일렁이는 보리 물결이 파도처럼 아름다워, 선생께서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짙푸른 보리밭에 굽이치는 보리물결로 풍년을 기약하며, 농부는 흥겨운 뱃노래를 부른다. 거제도의 전형적인 반농반어촌인 해안마을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드넓게 펼쳐진 거제평야, 보리평원은 생명의 젖줄이자 장관이다.

⑪ 새벽에 읊다(曉吟) / 김진규(金鎭圭)
窓外雲峯隔幾重 창밖 구름 덮인 봉우리 몇 겹 저편에
曉天微月透踈松 새벽하늘 희미한 달, 성긴 솔에 사무친다.
翛然一枕禪房夢 서둘러 베개에 누워, 선방(禪房)에서 꿈꾸다가
驚起山僧禮佛鍾 놀라 일어나니, 산중 스님의 예불 종소리네.

절간의 선방(禪房)에서 새벽하늘 저편 봉우리를 바라보니 성긴 소나무 사이로 희미한 달이 비춘다. 뒤척이다가 서둘러 베개에 누워 선잠에 들었다. 꿈속에서 그리운 가족을 만나고, 대궐로 들어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예불 종소리에 놀라 일어나보니 산중의 절간이다. 그의 옆에선,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인생이란 본시 이런 것이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선생은 시구 속에서 “부귀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다. 당나라 심기제의 침중기에 나오는 "일침황량(一枕黃粱)"의 표현을 슬쩍 빌려 와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냈다.

⑫ 국화(菊) / 김진규(金鎭圭).
月移瘦影上窓扉 그림자 희미한 달이 옮겨가 문짝 창 위로 떠오르고
風送寒香入酒卮 바람은 찬 향기를 보내 술잔 속에 들어가네. 
花葉伴人憔悴甚 꽃잎이 사람과 짝하여 심히 초췌한데
與君相慰更相悲 국화와 더불어 서로를 위로하니 더욱더 슬퍼진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거제시는 매년 거제면 농업개발원에서 '거제섬 꽃 축제'를 연다. 모진 서리가 내려 뭇 꽃이 속절없이 다 시든 뒤에도 오롯이 꽃을 피우는 그 꿋꿋한 기상을 기려 옛 선비들은 ‘오상고절(傲霜孤節)’ 또는 ‘오예풍로(傲睨風露)’라고도 했다. 은일과 절조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국화의 은근한 아취를 '거제섬 꽃 축제'에서 맡아보자. 옛사람들이 말하길, '향기를 듣는다'(聞香ㆍ문향)는 멋스러움에 어울릴 만한 꽃이 난초 다음으로 국화일 듯하다. 국화가 지금도 지조와 단아한 품격을 갖춘 옛 선비를 떠올리는 꽃으로 기억되는 것은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덕분이다.

⑬ 붉은 단풍잎 (紅葉). / 김진규(金鎭圭).
霜露醲於酒 서리와 이슬 내려 술 더욱 진해지니
楓林醉色紅 단풍나무 숲이 취해 낯을 붉히누나.
蕭條愁客鬢 시름겨운 나그네 귀밑머리 쓸쓸하니
白髮生秋風 백발이 가을바람을 일으킨다.

찬바람 불고 서리 내릴 쯤 집안에 담근 술은 점점 익어간다. 온통 숲이 술에 취한 듯 붉다. 수심 가득한 귀양살이에 귀밑머리 희게 변해 가는데,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와 백발을 휘날린다. '서리와 이슬'로 인해 '술'이 익어가니 '단풍'이 붉게 물들고, '나그네 수심'이 '백발'로 변해 '가을바람'을 일으킨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대상을 대조(對照)와 대비(對比)로 비유(比喩)해 새로운 연상의 의미를 이끌어 낸다. 선생의 문학적 재치를 엿볼 수 있다.

   
 
⑭ 달밤(月夜) / 김진규(金鎭圭).
고요히 잠 못 드는 깊은 밤, 뭇 소리 들려오고 구름 뚫고 나온 달빛에 온 바다가 밝디 밝다. 더럽혀진 내 영혼이 교교한 달빛에 깨끗이 씻기는 듯한데, 이 땅 거제도는 물길이 끝나는 변경에 있으니, 신선이 사는 삼신산과 가깝다고 확신한다.

境絶遺塵慮 막다른 변경에서 세속의 잡념 더하고
宵深閴衆聲 깊은 밤중 고요한 뭇소리.
雲開天宇曠 구름 걷히고 하늘 전체가 트이니
月浴海波明 달이 목욕하고 바다의 물결 밝아온다.
灝氣盈襟爽 청명한 기운이 가득하여 옷깃이 시원하고
浮光溢目淸 떠 있는 달빛 넘쳐 맑아진 눈.
還忘在羅網 물이 돌다 끝난 곳에 나망(羅網)이 있으니
只道近蓬瀛 다만 그 곳이 봉영산과 가까우리라.  

[주1] 나망(羅網) : ① 그물. 새 잡는 그물. 함정. 법률이나 法網(법망)을 일컫기도 함. ② 그물을 씌워 새를 잡듯이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
[주2] 봉영(蓬瀛) :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 가운데 봉래산과 영주산.

⑮ 조선시대에는 사대부의 가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집사람에 대한 사랑의 직접적인 표현을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 1658~1716)선생은 1689년 7월~1694년 4월까지 거제도 유배생활동안 형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거니와, 아내와 자식의 사랑을 구구절절 거침없이 표현하였다. 영조실록 기사에 기술하기를, 선생의 부인인 정씨(鄭氏)는 정철(鄭澈)의 6대 손녀인데 집안에서의 기거하는 의범(懿範)이 일문의 긍식(矜式)이 되었으며 홀로 된 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마음을 먹고 미음도 마시지 않아 결국 남편을 따라 사망해, 이후 영조 28년(1752년) 5월에 정려(旌閭)를 받았다한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아내에 대한 연정(戀情)의 시편을 남겨 전하고 있으니, 부인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지극하신 분이었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과 현대인과의, 사랑의 시구(詩句)를 비교, 상상해서 읽다보면 그 재미가 솔솔하다.

선생이 거제면에 활짝 핀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아내를 떠올리는 한시 즉, 옛 격식에 맞추어 지은 '의고(擬古)' 中 일부 시편을 감상해 보자.

"물가 모래톱엔 두약꽃이, 깊은 산골엔 어수리꽃 피었네. 캐고 또 캐어 어디에 쓸런가? 부인과는 천리에 막혀있는데. 바람 맞으며 보내주고자 해도 길이 멀어 맡길 심부름꾼 없네. 서로 사랑해도 만날 수 없지만 근심 없는 평온함, 어찌 닮지 않으랴"[汀洲有杜若 幽谷生芳芷 采采亦安用 佳人隔千里 臨風欲相詒 路遠無歸使 愛之而不見 離憂定何似].

옛날 중국 북송시대 소동파 시인이 "드넓은 모래밭에 흐드러진 두약꽃을 보고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했다"고 한다. 어수리 꽃은 높은데 살며 귀하신 산채이다. 머나먼 곳, 그리운 부인(佳人)생각에, 두약꽃 어수리꽃 시어를 늘어놓고 사무친 연민을 그리고 있다.

"고운 아내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데, 알고 보니 눈물에 치마가 젖었다. 가련토다, 하늘에 뜬 맑은 보름달, 선명하게 빛나네[嬋媛夜夜夢 覺來淚盈裳 可憐天上月 三五澄淸光].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 북쪽지방, 빼어난 자태, 부인 침실의 끈인가. 고운 눈썹은 세상에 다시없고 아름다운 얼굴엔 절로 향기 나구나"[佳人出北方 秀色絙洞房 蛾眉絶代無 玉顔自生香]. 이별의 한(恨)이 얼마나 사무치면 꿈속에서도 눈물바다인가. 선명하게 빛나는 저 보름달마저 가련하게 보인다. 날마다 소식 기다리는 북녘 하늘에서 촛불 켜진 부인 침실을 떠올린다. 아~ 그리운 그대, 내 여인이여~. 아내의 자태가 나긋나긋, 놀라 날아오르는 기러기처럼 나부끼니, 마치 승천하는 용 같아 보였으리라(翩若驚鴻, 宛若游龍).

"아내여 아내여~ 함께 머리 묶어 언약했는데 백년언약 깊은 정이 천리에 떨어졌구나. 남편을 받들면서 함께 굶주리고 목마를 그 언제였던가? 부러워라~ 저 작은 새들도 모두 짝지어 살고나"[有妻有妻共結髮 百年深情千里別 /何時擧案同飢渴 羨彼鳥雀皆雙栖].

"장기 낀 바다에서 먼 이별 중인데, 화장대를 엿 보는 자 누구인가? 미인의 눈썹에 이미 스산한 바람소리 일어, 이 모습 바라보니 다만 슬픔만 더할 뿐"[瘴海遠相別 粧奩誰爲窺 雙蛾已蕭颯 對此秪添悲].

"기다리는 편지는 오지 않고 푸른 구름만 서로 어울리는데, 집사람 소식 어이 그리 아득한고? 미천한 이 몸에 박명한 여자팔자, 감히 원망스러우나 작은 성의(誠意) 바라건대, "그대여 무탈하시라"[靑鳥不來碧雲合 美人消息何茫茫 微軀敢怨妾薄命 寸誠庶幾君無病].  비통한 선생의 시(詩)는 타인의 눈에 아무리 투박하고 모호하게 비추더라도 개의할 필요가 없는 자신만의 처연한 독백이었다.

⑯  1690년 음력 6월에 마침내 김진규(金鎭圭) 선생의 부인이 잠시 머물려고 거제도 배소를 찾았다. 중앙절 9월 9일에도 아내와 함께 하였으나, 두고 온 어린 자식과 모친을 오랫동안 홀로 둘 수가 없어 다음해 봄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조각배 겹겹의 바닷물, 6월 때맞춰 아주 먼 길, 먼 변방으로 누가 나를 찾아왔다. 머리에 쪽을 찌고 상투 튼 정(情)이 끝이 없었지. 밥상을 눈썹위로 받드는 예는 허물이 아닐진대, 괴롭게도 얼굴은 더욱 야위어 가고 슬픔과 근심에 눈물이 얼마나 맺히는지.. 죽을 때까지 마음의 빚을 우러러 보며 단지 서로 가엾게 여길 뿐. 한번 이별 후엔 기약 없이 아득했는데 다시 만나니 참으로 꿈만 같구나. 뺨에 흐른 눈물이 가엾게도 흠뻑 젖어, 근심에 잠긴 사랑스런 눈썹으로 점점 퍼지네"[片舸層溟水 長程六月時 窮荒誰我訪 結髮情無極 齊眉禮不愆 辛苦容逾瘦 悲憂涕幾懸 終身負仰望 相對只相憐 一別杳期斷 重逢眞夢如 淚臉憐猶濕 愁眉愛漸舒].

320년 前, 거제시 거제면에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한 글이다. 금슬상화(琴瑟相和) 즉 '거문고와 비파의 조화로운 음률'처럼 부부의 정(情)이 넘치는 선생이셨다. 예로부터 남정네들은 "집의 닭은 멀리하고 들의 꿩을 사랑한다"(家鷄野雉)라는 사자성어에 물들어 사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세상에 인연으로 맺어진 가장 소중한 내 짝을 귀히 여겨야 함을 당연한 일이다. 선생의 감각적인 사랑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내 미소 머금으며, 서거정(徐居正)의 '석부사(石婦辭)'를 떠올렸다.

"천지는 끝이 없고 바다는 가이없거니 차라리 돌이 되어 아무것도 몰라버리리. 강가에 홀로 우뚝 서 있음이여, 천추만세토록 마음 변치 않으련다"[天地無窮兮海無涯 寧化爲石兮頑無知 表獨立兮江之湄 千秋萬歲兮心不移].

"부드러운 인정에 옥으로 꾸민 거문고를 주었는데 그 가락을 누가 붙잡아 둘 것인가? 곁눈질로 바라보며 이미 눈빛으로 통했는데, 내 창자가 꼬이도록 너무 젊고 예뻐, 함께 같이 자며 즐기기를 원하니, 띠를 두른 비단 옷을 차고 다니었지"[柔情付瑤琴 中曲爲誰長 眄睞已目成 婉孌結中腸 願爲合歡帶 繫在羅衣裳]. 

"밤마다 잠자리에 생겨나는 근심, 누가 말했나? 흩날리는 꽃잎 주렴에 들어와 독수공방 비웃네. 처마 앞의 무성한 대나무, 고독한 사랑, 한겨울 푸른빛, 딱 맞는 의미네"[誰言夜愁枕席生 入簾飛花笑獨寐 簷前獨愛竹猗猗 此意要譬歲寒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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